적과 흑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69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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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눈치오의 <쾌락>을 읽다보니, 예전에 읽고 리뷰를 1편만 쓰고 말았던 스탕달의 <적과흑> 생각이 났다. 두 주인공 모두 두 명의 여성을 동시에 사랑하고, 비극적으로 사랑을 끝낸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채 사치와 향락에 쩔은 붕괴 직전의 귀족들의 일상과 대화, 심리를 상세히 묘사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적과흑>에서 쥘리앙은 <쾌락>의 안드레아와 비교해보면 치기와 불안을 껴안고 고뇌하는 젊은 청춘이며, 안드레이와 비교해볼 때,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신분과 부를 기반으로 예술적 감각과 재능과 광범위한 지식 수준 등 모든 면에서 비교 불가의 초라한 청년이다. 


쥘리앵은 확실히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당시 자유와 평등을 열망하던 프랑스 민중들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룩한 공화정의 대업이 나폴레옹의 구테타와 그 후 계속된 전쟁, 그리고 실각과 함께 잃게 되고, 유럽의 다섯 개 나라는 패전국 프랑스로부터 촉발된 자유주의적 개혁에 반하는, 혁명이전으로 모든 것을 되돌리는 왕정복고 라는 역사의 도돌이표를 선택한다. 1789년부터 시작된 혁명의 성과는 부르봉 왕조의 복귀와 그 뒤를 잇는 반동정치에 의해 하나씩 무너져갔고, 귀족들은 득세했다. 이 혁명과 혁명의 사이사이에 끼어있던 암흑기에 평민 태생의 쥘리앙은 남몰레 나폴레옹을 흠모하며, 신분 상승의 한을 품고 시대적 사상 속에 갇힌 채, 순간순간 신분의 한계와 그가 접하는 사회에서의 차별적 지위를 인식하며 가혹한 현실을 살아간다. 이 책이 쓰인 1830은 샤를 10세가 반동정치의 끝판을 보여주던 때다. 구체제의 신분질서가 과거의 특권을 향유하기 위해 온갖 부패와 술수를 동원하던 시기라는 점은 청년 쥘리앙의 개인적인 삶을 지배한다. 이처럼 시대는 개인의 사랑이라는 은밀한 사생활까지도 지배한다.


시골에서 시장의 부인과 아슬아슬하게 놀아나다가 탄로나는 상황이 되자 그곳을 떠나 수도원을 거쳐 어떤 후작집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감옥같은 수도원에서의 생활은 쥘리앙의 남다른 면모와 캐릭터를 부각시키는 배경으로 기능하는데, 그 수도원에서의 생활 부분이 엄청 길다. 거기서 앞으로 인생을 바꿔줄 후작과 연결되는 끈들이 우연히 조금씩 만들어 지는데, 처음에는 그의 뛰어난 비범함으로 인해 동료들에게서 괴롭힘을 당하는 원인이 되지만, 그가 관여하는 자잘한 에피소드들은 차차 그를 그의 삶에 있어 조금씩 유리한 위치로 옮겨놓는다. 타고난 감수성과 천부적인 재능,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야망과 위선적인 행위들의 복잡한 상호작용들은 쥘리앙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들이다. 가령 그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주변의 인물들처럼 똑같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고자 하지만, 타고난 감수성이 만들어내는 연민은 자주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쥘리앵은 두 여인과 사랑을 한다. 첫번쨰 사랑은 처음으로 집을 떠나 사회에서 만나는 첫 여성으로, 10살 연상인 레날부인이다. 왕정복고 시대에 꼼짝 없는 신분제에 묶인 쥘리앵은 야망을 펼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신부가 되기로 결심하는데, 이를 위해 마을의 신부에게 수업을 받고, 그렇게 교육받은 덕분에 시장 집에 아이들 가정교사로 들어오지만, 그의 첫눈에 아이들보다는 아이들의 엄마인 레날 부인이 각인된다. 레날부인과의 사랑으로 19세의 청년답게 매우 저돌적이고 열정적이다. 두번째 사랑 역시 자신을 고용한 집 식구다. 후작 집 딸 마틸다는 여러 백작들이 파리 꾀듯 주변을 가득 맴도는 매혹적인 여인이나, 이미 첫사랑을 경험한 쥘리앵은 이제 밀고 당길 줄 아는 프로 선수가 되었으나 여전히 겉잡을 수 없는 그의 열정은 종종 그의 야망과 그가 지켜온 자존심, 자신이 귀족은 아니지만 이들보다는 더 낫다는 생각과 충돌한다. 레날부인과의 사랑이 순수하고 열정이 넘치는 위험한 사랑이라면, 마틸다와의 사랑은 끊임없이 능숙하게 탐색하고, 계산하면서 서로 주도권을 잡고자 하는 프로페셔널한 사랑놀이다. 


귀족들의 진부한 구애와 표현에 둘러쌓인 마틸다가 순수해 보이고  지적인 청년의 신분상의 이질성에 쉽게 현혹될 수 있다는 설정은 그럴싸하다. 그녀의 갈등은 그를 사랑하면서도 그의 신분을 경멸하는 모순에 있다. 그를 유혹하는 데까지 성공했으나, 그가 자신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다시 그의 하찮은 신분이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우위에 있는 그녀는 밤에 그를 침실로 불러내 훌러덩 옷을 벗어버리고, 유혹에 넘어간 이 가여운 청년을 냉대한다. '하찮은 신부 나부랭이이자 기껏 촌부의 아들인 자'에게 자신을 허락한 그녀는 그 일을 후회하고 쥘리앙은 당황하지만, 그녀를 꺾기 위한 갖은 노력끝에 결국 둘은 밀었다 당겼다를 반복하며 애정을 꽃피운다. 


어두운 과거는 들키라고 있는 법, 2편 중반을 넘어서면서 레날 부인과의 과거의 불륜은 그의 발목을 붙잡아, 다 된 밥에 코빠뜨리가 되어버리고 스토리는 겉잡을 수 없는 복수와 파멸의 길을 달린다. 줄리앙의 야망과 위선을 처음부터 읽어온 독자로서는 급작스런 그의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증오가 스스로를 파괴시킬만큼의 크기로 자란다는 것은, 그 증오가 배신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레날 부인의 편지는 줄리앙에게 있어서 이제까지 어렵사리 쌓아올린 자신의 명성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증오는 그토록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던 젊은 날의 그 아름다운 사랑의 기억이 참혹하게 깨졌기 때문이다. 마틸드를 사랑하면서도 레날 부인에 대한 신의는 그만큼이나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다행이도 총알은 레날부인의 어끼를 스치고, 그에게는 레날 부인의 진심을 확인할 구원의 날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조용히 죽음을 기다린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뭐라 변명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사형을 거의 코앞에 앞둔 그의 감옥엔 두 명의 여자가 경쟁적으로 들락거리지만, 그는 목숨을 구걸하지도 삶의 의지를 보이지도 않는다. 이미 레날 부인을 쏘았을 때, 자신은 스스로를 죽였을 것이다. 그리고 레날 부인이 감옥으로 돌아와 그를 안았을 때, 그녀의 진심을 알았을 때, 아마도 죽어도 여한이 없었나보다. 


찾아보니, 영국에서 미니 시리즈로 했다. 그레고리 펙 주연의 영화로도 했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 않다. 미니시리즈는 자막이 없긴 하지만 유튜브에 4회로 나뉘어져 있다. 쥘리앵과 마틸드, 레날 부인 모두 책 속에서 나온 것처럼 상상을 잘 옮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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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0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0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3-10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민음사 판본을 세 번 읽기 시도했는데, 1권을 완독하지 못했습니다. 작년에 발자크 소설을 읽고 있어서 다음에 스탕달에 도전하려고 했는데, 다른 책에 눈길을 가는 바람에 시도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CREBBP 2016-03-10 21:47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게 십년씩 미뤄둔 소설이 저는 아주 수두룩해요. 이 책을 마칠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이북 읽어주기 덕분이죠. 차에서 짬짬이 듣다보니 감질나서 내킨 김에 읽어버리더라는.. 근데 읽어주기는 집중력에 문제가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새고운 집중력 강화 훈련이 될 거 같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