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난해성이야 제쳐놓고라도, 이 작품이 연작인지, 단편인지, 헷갈렸다. 처음 줄간될 때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과 <기교들>로 따로 출간되었던 것을 두개로<픽션들>에 합친 것이라 그렇다. 첫 작품인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는  본편이 있고 그 본편과 연결되는 듯이 보이는 <1947의 후기>가 또 있다. 이 두 개의 작품은 연작처럼 내용이 연결되어 있고 1947의 후기라는 제목을 갖지만, 목차상으로는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 속해있다.


내가 꼽는 '가장 잠에 빠지기 좋은' 책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의 첫권인데, (늘 읽다 잠들어서, 2편까지 나가지를 못했다), 이 소설 역시 잠을 불러오는 데에 있어서는 만만치 않은 상대다. 비교적 얆음에도 불구하고, 몇 줄 읽기만 하면 늘 잠에 빠져서, 과연 이 책을 다 읽을 수는 있을까 의아했는데, <틀뢴>이 독자의 기선을 완전 제압해 놓은 후는 살짝 풀어주는 느낌으로, 그 다음부터는 읽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우선 해석적 난해성은 제쳐놓더라도, 실존인물들과 가상인물들이 마구 섞여 한도 끝도 없이 언급되어 내용 파악조차 어려웠다. 이 요약 불가능한 이 첫번째 소설을 억지로라도 요약해보면, 존재조차 의심스러운 괴상한 사람들과 괴상한 이론들이 브리태니어 백과사전의 해적판에 몰래 숨어있으면서 수 세기에 걸쳐 세계의 지식과 관념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는 내용이다. 이게 내가 내 식대로 파악한 전체적 줄기고, 실제로 그런 내용인지 확신할 수 없음을 실토한다.


제목을 볼 때, 틀뢴은 17세기에 결성된 비밀 결사이고, 우크바르는 그 특정 판본의 백과사전에 실린 지명 이름으로, 실제 틀뢴의 사상이 싹트고 발전하는 국경과 역사,  언어, 문학 등이 모호한 세계다. 존재한다는 증거를 찾기 어려우나, 여기 저기서 그 환상의 세계가 조금씩 드러나고 매혹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현실에 침투할까.


이 모호하고 이상한 세계의 국가들은 태생부터 관념적이고, 그리하여 ‘틀뢴 사람들에게 세상이란 공간 속에 물체들이 뒤섞인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행위들로 이루어진 이질적인 연속물’이다. 틀뢴의 언어에는 명사가 없고, 동사로 이루어졌거나(남반구) 형용사로만 이루어졌다(북반구). 모든 학문은 심리학의 하위에 속해있고, 그들은 ‘우주를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계속적으로 전개되는 일련의 정신적 과정으로 이해(p23)’한다. 이 곳에서 ‘정신적 상태는 축약이 불가’능하므로, 거기에 ‘이름을 부여하고 분류하는 행위는  왜곡과 편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로 다른 지역의 언어 모두에서 왜 명사가 없는지를, 이해 가능한 몇 안되는 부분이다. 명사는 축약이고, 압축이다. MP3 포맷이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영역의 음폭을 모두 제거하여 깨끗하고 단순하게, 그리고 작디 작은 기기의 어느 작은 하드웨어가 담을 수 있는 적은 용량에 압축한다. jpg와 png 같은 사진 파일이 화면에 담을 수 있는 쓸모 있는 정보들만 축약하여 효율적으로 저장한다. 이처럼 언어(명사)는 모호하고 들쭉날쭉하고 무한한 어떤 세계를 하나의 단어로 그 복잡성을 마치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단호하게 그 단어가 오랫동안 품어온 뜻에 어긋나는 의미들을 그것을 표현하는 세계에서 제거해 버린다. 그렇다면 형용사나 동사는 다른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이해하자.


틀뢴의 한 학파는 시간을 부정하고, 다른 학파는 ‘이미 모든 시간은 지나갔고 우리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과정에 대한 어스레한 기억 혹은 반영이며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왜곡되고 훼손되었다고 단정(p25)’한다. 또다른 학파는 ‘우리가 여기서 잠들어 있는 동안 우리는 또 다른 어떤 곳에서 깨어 있고, 그래서 모든 사람은 사실상 두 사람’이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동시에 있다는 말에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유비쿼터스 시대가 연상되어 소름돋는다. 작품의 알레고리보다는 뭔가 괴상하고, 신비한 걸 찾다 보니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5도살장>도 생각난다. 아니나 다를까, 진중권은 틀뢴의 이러한 알레고리를 과학기술, 네트워크의 사이버 스페이스와 연결짓는 통찰을 보인 바 있다. 해석보다는 모호한 채로인 게 더 선호될 때가 있다. 소설 속에서 틀뢴이라는 비밀 결사가 생긴 17 혹은 18세기와 같은 시기에 서구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과학기술이 전면에 대신하면서 가치관, 패러다임의 변화가 가속화된 것을 주목했을 거란 건 확실하다.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그리고 <원형의 폐허들>은 일단 황당함에 있어서 <틀뢴...>을 따라잡지 못하므로 읽기가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훨씬 수월했다. 그 중에서 <원형의 폐허들>이 가장 흥미로와서 리뷰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틀뢴의 난해성을 토로하다 보니 한쪽이 되었다. <원형의 폐허들>에 대해서는 훨씬 얘기거리가 풍부할 것 같다. 다음으로 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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