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그타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5
E. L. 닥터로 지음, 최용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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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잎과 가지가 달린 나무도 그걸 받치는 메인 몸통과 뿌리를 찾을 수 있듯이, 관련도 없어 보이는 여러 인물의 이야기들은 산재하여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다가 축을 주위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크게는 두 개의 축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실제 사건의 주인공인 에벌린을 둘러싼 삼각관계와 살인 사건, 또 하나는 콜하우스 워커의 자동차 똥 투척 사건이다. 백만장자 랜들 쏘가 자신의 아내 에벌린 네스빗과의 16세 때의 일을 빌미로 스탠포드 화이트를 총으로 쏴 죽인 살인 사건은 백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까지도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세기의 스캔들이지만 콜하우스 워커의 자동차 파손에서 시작된 테러극은 가상의 이야기로 보인다. 


이렇게 소설 속에서는 가상의 인물과 실제 인물들이 섞여 있고 실제 이야기와 실제 이야기가 가상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어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소설인지 찾아보기 전에는 구분하기 힘들다. 이 두 개의 스토리 라인을 따라 전혀 관계 없어 보이는 실존했던 세기의 마술사 해리 후디니의 이야기가 점점이 박혀 있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콜하우스 워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특별 주문 제작한 가죽 지붕을 씌운 세심하게 잘 관리된 포드 모델 T 뒷좌석에 지역 소방서 직원들이 똥을 사서 얹어놓고 통행세를 요구하는 행패를 부린 이유는 그 멋진 차의 주인인 콜하우스 워커가 ‘니그로’이기 때문이 아니라 니그로가 니그로답지 않아서다. 그는 옷을 잘 차려 입었고 예의바르고 정중했으며 교육받았고 교양있게 말했다. 그들은 그의 차를 지나가지 못하게 길을 막고 통행세를 요구했으며 그 아름다운 차 뒷좌석에 똥을 갖다 넣았다. 이렇게 시작된 콜하우스 워커의 테러적 복수극이 전체 스토리의 가장 큰 줄기인데 이렇게만 보면 무슨 액션 혹은 스릴러 극을 연상시키지만 실제로 지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여전히 이들 사건과 직간접으로 연결된 20세기 초의 인간군상들이고, 쉼없이 가속화되던 미국 사회 신문에 뉴스에 등장했던 역사적 인물들이 직조해 내는 거대한 역사의 조각들이다.


니그로도 없었다. 이민자도 없었다. 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는 당대 중산층 백인들의 행복하고 안락한 삶 속에서,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반대쪽 편의 삶과 고통이 안중에도 없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과거 시제의 이 말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이 가족에게 이민자들과 흑인들이 가족의 삶 깊숙히 스며들게 되며 어떤 변활 겪게 됨을 암시한다. 이것은 인식의 변화다.


‘단란’했던 가족의 변화는 로버트 피어리를 따라 북극 탐험을 떠난 몇달간의 아버지의 부재에서 시작된다. 가부장적 권위와 그럭저럭 중산층의 부를 유지시키는 성공 궤도의 사업을 운영하는 가장은 처가 식구들을 부양하고 처남의 월급을 주는 성실한 남편으로, 수줍고 순종적이고 예쁜, 전통적 역할에 충실한 아내와 쌍을 이루어 모범적 가정의 질서를 유지해왔다. 가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줄 알았던 전통적 여성인 어머니의 가치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발견된다. 그의 부재기간 사업상의 위기를 해결하고 능동적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에는 전통적 가치관에 따라 집안에 묶여 남편의 시각으로만 보던 사회를 스스로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그 기간동안 자립 변화 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고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고 이제껏 보이지 않던 것들에 눈뜨기 시작한다. 뜰에서 우연히 발견한 버려진(산채로 묻힌) 신생아와 아기의 엄마 새라를 가정에 들이고 돌보기 시작한 어머니는 당대 중산층의 눈에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이지도 않던 흑인을 가정 속에 편입시킨 혁명적 결정일이 된다. 이 일은 이들 가정에서 변화와 진보의 물결을 어머니를 통해 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북극 탐험에 얼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귀국한 아버지는 갈색 아기와 새라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머니의 결정을 존중한다. 


어느날 부터인가 콜하우스 워커 주니어가 새라를 찾아오기 시작한다. 새라와 콜하우스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끈질기게 매주 새라를 찾아오던 콜하우스를 새라는 얼굴 한 번 안비치고 그대로 돌려보내기를 계속한다는 것. 그러나 다른 흑인들과는 달리 양복을 잘 차려입고 특별주문한 가죽 루푸가 달린 포드 모델 T를 타고 와서 정중하고 예절바르게 행동하는 이들 가족은 어느 날 그를 집으로 들여 차를 대접하고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그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음악가다. 그들의 거실에서 래그타임을 연주하자 우울과 대인 기피로 윗방에 숨어 지내던 새라는 음악을 매개로 점차 마음을 열고 콜하우스를 받아들여 약혼하고 결혼 날짜를 잡는다. 그토록 우울하고 어두웠던 새라는 아름답고 행복에 겨운 꽃같이 아름다운 소녀로 변신한다. 결혼을 앞둔 어느날 콜하우스에게 자동차 똥 투척과 동반된 파괴 사건이 일어나고 콜하우스는 그 특유의 예의 바른 태도로 경찰에 호소하지만 조롱과 무시만 돌려받고 차는 점점 더 파괴되어간다. 콜하우스는 자신의 자동차를 변상받을 때까지 결혼할 수 없음을 알려오고, 때마침 부통령 방문에 이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했던 새라는 경찰의 오해로 폭력을 당해 죽게 된다. 


내러이터가 누구인지 불분명한데 가족을 설명할 때의 기준이 소년을 중심으로 어머니 아버지 외할아버지 외삼촌이 이름없이 언급되므로 화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추측할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분명치 않은 화자의 시점은 이 가정의 구성원들 개개인들에게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환하고 빛나는 세계를 온전히 구성하는 듯한 이 중산층 백인들의 사회와, 어둡고 우울한 유색인 및 이민자들 사회의 가교 역할을 하는 듯한 사람은 어머니 뿐만이 아니다. 아버지의 회사에서 월급만 축내는 줄로 알고 있던 외삼촌은 처음에 소개된 에벌린 네스벳을 짝사랑하며 쫓아다니다가 훗날 콜하우스 워커의 테러 지원을 하는데 그가 죽은 후 아버지의 부재 중 회사에 큰 성과를 남겼음이 드러난다. 결국 외삼촌은 가상과 실제 사이를 연결하고 정의를 쫓아 온몸을 불태우다 ‘의롭게’ 죽는더. 아버지의 부재 중 그가 회사에서 개발한 일련의 무기들이 아버지의 부 뿐만 아니라 미국의 세계 대전에 복무했음은 그의 추후 행적과 비교할 때 아이로니가 아닐 수 없다.


미국 백인의 눈에 외삼촌이 도운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지만 역사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 나오는 와습들은 이름이 없는 주인공 가족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위키에 이름을 넣으면 행적이 나오는 실제 인물들이다. 전설의 마술사 탈출가 해리 후디니, 건축가 스탠포드 화이트, 모델 영화배우 애블린 네스빗, 스탠포드 화이트를 죽인 백만장자이자 애블린의 남푠 해리 켄달 쏘, JP 모건, 포드 자동차 회장 해리 포드,무정부주의자 사회 운동가 옘마 골드만 등이 그렇다. 이민자 타테와 소방서 직원들 세라 콜하우스 등은 가상인물이지만 실제 똑같은 일이 있었다고 해도 이름을 날리지 못했을 인물이다. 


역사적 사건들은 허구의 프레임 속에서 장르적 경계를 허물어 확장하고 그를 통해 20세기 초반 미국이라는 나라의 면면을 노출한다. 역사란 단지 전쟁과 제도와 대형 사건들로만 구성되지 않으며 그 역사 속의 개인이 역사와 함께 주고 받는 영향들의 복잡한 네트웍이다. 저자는 가상의 맥락에서 역사적 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들을 교차시킨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또 내일도 자유와 평화는 미국이 추구하는 이상이지만 그 자유와 평화는 백인 중산층이 독점할 자유이고 평화였던 게 시대의 비극이었다. 




콜하우스 워커는 자신의 슬픔을 전쟁을 위한 촉매로 썼다.세라를 잃은 슬픔 그녀와 누렸을 행복한 삶에 대한 아쉬움은 고대 전사들이 복수를 다짐하는 의식으로 굳어졌다.247


이민자들은 대부분 이탈리아나 동유럽 출신이었다. (..) 이민자들은 더러웠고 문맹이었다. 몸에서는 생선 마늘 냄새가났다. 상처에서는 고름이 흘렀다. 이민자들은 자존심이라 건 없었고 무보수나 다름없는 삯을 줘도 일했다. 이민자들은 도둑질을 했다. 술을 마셨다. 자기 딸을 강간했다. 별 것 아닌 일로 서로를 죽였다. 이민자들을 가장 멸시하는 자들 중에 아일랜드인 2세들이 있었다. 이들의 아버지들 역시 예전에 똑같은 범죄를 저질렀다.25


그런 여러 경험에도 불구하고 후디니에게는 우리가 정치적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절대 생겨나지 않았다. 후디니는 자신이 왜 마음에 상처를 받았는지 합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후디니는 자신의 삶이 보통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얼마나 혁명적으로 살았는지를 평생토록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후디니는 유대인이었다. 진짜 이름은 에리히 바이스였다 45



결혼 관습과 매춘 관습 사이에는 아무 연관성도 없습니까 부끄러운 줄 아시오. 63



진실은 여성들은 투표할 수 없으며 원하는 상대와 사랑을 할 수 없고 정신과 영혼을 개발할 수 없고 영적인 모험을 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옘마 골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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