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가장 다양한 번역본이 나와있는 책을 꼽으라고 하면 아마도 햄릿이 아닐까 싶다. 알라딘 상품 페이지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햄릿을 키워드로 뒤져보니 상품 검색 창에 12페이지에 걸쳐 상품 목록이 나열된다. 한 페이지당 20권씩 나열되니까 240 종이 있다는 소리다. 그 중 일부는 어린이 책, 일부는 이북과 같은 판본, 그리고 특별판 개정판 등등이 있으니 절반 정도로잘라도 여전히 많다. 가장 많이 팔린 건 1998년 민음사 (최종철 옮김) 판이다. 아마도 개정판을 안찍고 예전 가격을 유지한 덕에 검색창의 왕좌를 지킬 수 있던 거 아닐까 싶다. 나에게는 열책과 펭귄클래식과 문예판 세 가지가 이북으로 있는데, 이것 저것 바꿔가며 읽었다. 일장일단이 있어서였다. 


햄릿의 고뇌는 선왕의 모습으로 나타난유령의 말을 얼마나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지로 시작된다.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의 작품인데, 한맺힌 유령이 나타나서 살아 있는 사람에게 사연을 얘기하는 방식은 마치 동양 괴담 같은 걸 연상시킨다. 햄릿과 당대의 사람들은 유령의 존재를 어떤 형태로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선왕이 죽은 후  태자가 왕위를 계승받는 우리 상식과 달리 애초에 햄릿이 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 계승을 받지 못했는지는 설명도 암시도 없는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더욱이 그는 어린 아이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햄릿의 불만은 숙부의 왕위 계승보다, 정절을 지키지 않는 어머니를 향한다. 그는 왕위에는 관심도 없다. 햄릿의 여성 혐오의 화살은 어머니 뿐만 아니라 아무 죄도 관습도 어기지 않은 자신의 약혼녀에게까지 향한다. 더욱이 포틴브라스를 무찌른 선왕과 비교할 때 현재 왕인 숙부는 간교하고 무능한 인간이다.   ‘돼지우리 같은 침대’에서 혐오스러운 인간과 침실에서 함께 뒹굴며, ‘나의 생쥐’라는 호칭을 쓰는 두 사람의 관계는 햄릿에게 추악할 뿐이다. 


DNA의 절반을 공유한 어머니는 숙부보다 훨씬 가까운 핏줄이고 혐오의 끝엔 사랑이 맞닿아 있는 애증의 대상이다. 게다가 선왕(의 유령)은 자신을 배반하고 숙부와 바로 결혼해버린 왕비의 안위를 햄릿에게 부탁한다. 유령이 되어서조차 우뚝 선 거역할 수 없는 아버지. 숙부와 놀아난 어머니. 그는 고민할 수밖에 없다. 


햄릿형 인간이라 하면 흔히 우유부단형으로 말해지곤 하지만, 그가 아버지의 복수를 유예하는 까닭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왕좌를 차지한 숙부가 유령이 말한대로  진짜 아버지를 살해했는지 확신이 없다. 아니 꿈에서, 혹은 환상 속에서, 죽은 부모가 나타나 누가 죽였다 라고 말하면 바로 그 사람을 죽일 수 있나. 살아있는 생생한 증거가 아니라 유령의 말을 어떻게 믿어야 하나, 시대가 중세면 유령이 해결사인가.


햄릿은 신중했을 뿐이다. 이를 알아내기 위해 미친척을 하고 돌아다니며 고도의 심리전술로 왕의 의중을 떠보지만, 이로 인해 사건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을 가족 관계의 비극적 복수전에 끌어들이고, 계략과 반전의 드라마틱한 전개를 제공한다. 왕은 햄릿이 미쳤는지, 미친척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의 미친짓에는 왕의 범죄 행위를 알고 있는듯한 암시가 곳곳에 뿌려져 있으며, 이 때문에 왕은 햄릿의 친구이자 신하들을 스파이처럼 활용하지만, 생각과 의심이 많은 햄릿이 그들에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다.


그가 택한 방법은 선왕의 살해사건과 유사한 세네카의 연극을 왕과 왕비 앞에서 공연함으로써, 그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 대사를 듣고 나서도 그의 숨은 비밀이 드러나지 않을 경우, 우리가 보았던 것은 악마였을 것이고, 내 상상력이 불칸의 모루처럼 흉악한 것이겠지.”


하지만 이유있는 탐색전이 끝나고 결정적으로 숙부의 살인이 확인된 후에도 그는 실행하지 못한다. 공연을 계기로 선왕 살해의 심증을 굳힌 햄릿의 우유부단함이 가장 크게 부각되는 곳이 바로 왕이 공연을 박차고 나가 홀로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복수의 기회를 날려 보내는 장면이다.


참회하고 있을 때 죽이면 천국에 갈 터이니 진정한 복수가 아니라는 이유는 참으로 기독교다운 발상이다. 선왕은 참회할 기회도 없이 죽어 지옥을 떠도는데, 선왕을 죽인 숙부를 이 순간 죽이면 그는 천국에 갈거라는 그의 숙고는 결정장애적 경향을 충분히 보여준다. 게다가 그 순간은 선왕의 시해 사건을 확인하는 격정적인 순간이며, 다시 또 왕이 홀로 있을 기회가 올지 모르기에 유령의 말을 듣고 어차피 복수하기로 작정했다면 중요한 기회를 놓친 것이 맞으며, 다른 기회가 오더라도 다른 백가지 이유를 들어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많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왕을 죽이는 건 반역이다. 그가 어떤 계략으로 왕이 되었건 현재 왕이기에 왕을 죽이는 일에는 큰 위험이 따르며 성공한다고 해도 바로 반역죄로 체포될 것이다. 그러니 적자인 자신이 왕좌를 차지하도록 제대로 복수하려면 세를 규합하여 제대로 역모를 꾸며야 한다. 허나 계속 느끼는 거지만 햄릿은 자기 자신이 왕이 되는 일 자체에 별관심이 없어 보인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햄릿과 신하와 하인들을 시켜 햄릿의 의중을 떠보고 급기야는 햄릿마저 살해하고자 하는 왕의 계략이 서로 엇갈리며 엉뚱한 사람이 죽어 나가고 피해자가 속출한다. 오필리아는 햄릿이 사랑한 여인이지만 왕의 고문 플로니어스의 딸로 햄릿에게는 적의 딸이나 마찬가지다. 이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은 엉뚱하게도 왕의 고문 폴로니우스의 가족이다. 첫번째로 희생된 사람은 폴로니우스로,  왕이 햄릿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왕비에게 햄릿을 잘 구슬려 심문(?)하게 하고, 그들의 대화를 몰래 지켜보다가 변을 당한다. 폴로니우스의 가족은 권력의 최전방에서 햄릿의 집안 식구들 못지않게 깊게 연루되어 개인개인이 모두 다른 이유로 죽게 되는 비극의 가문이다.


오필리어에게 구애했던 햄릿은 유령을 만난 후 오필리어에게 인간적인 모욕을 넘어서는 대우를 하는데, 그 전에 오필리어는 먼저 가족들에게 햄릿이 바람둥이이며, 너에 대한 모든 찬사와 달콤한 사랑의 말들은 모두 거짓이니 그의 모든 구애를 물리치라고 조언한다. 딱한 오필리어는 구애를 물리칠 기회도 별로 없이, 미처버린(미친척 한) 햄릿에게 먼저 가혹한 말폭탄을 받는다.  햄릿의 혹독하고 매정한 말로 끝난 실연의 슬픔을 이겨내기도 힘든 오필리아에게 아버지는 햄릿에게 살해되고, 햄릿은 영국으로 떠나게 된 사실 등등이 모두 겹쳐 드디어 미친듯 행동하다가 결국 익사하는데, 오필리어의 죽음은 자살과 사고의 중간 정도에 있다. 실수로 떨어졌으나, 그대로 드레스를 날개처럼 펼치고 물 위에 누워 그 옷들  물을 흡수해 빨려들어갈 때까지 그대로 있었으니 말이다.


폴로니우스 살해 사건으로 인해 추이는 다시 왕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여론을 잠재울 구실로 왕은 햄릿의 신하이자 친구였던 두 사람에게 친서를 들려 햄릿을 영국으로 파견(?)한다. 하지만 그들이 영국 왕에게 도착해 보일 친서는 그 자리에서 햄릿의 목을 치라는 내용이다. 햄릿의 치밀함은, 그들이 지닌 친서를 바꿔치기함으로써, 또다시 두 사람의 희생을 낳고, 홀로 살아 돌아온 햄릿과 마주친 왕은 이번엔 해외에서 돌아온 폴로니우스의 아들 레어테스를 이용하여 햄릿을 죽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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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0 10: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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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0 13: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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