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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음, 형사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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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상실, 읽어버린 시간 사이에서.


 작년 읽을 책 중에서 찬호께이가 쓴 <13.67>은 몇 손가락에 꼽을 만큼 가장 밀도 높은 소설이었다. 그의 책을 접하기 이전까지 중국 소설을 여러권 접했지만 다시 책을 읽고 싶을 정도로 강렬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서로 비슷한 느낌의 이야기가 각각의 작가의 입을 통해 읽혀졌고, 특히나 추리소설 쪽에서는 이렇다할 작품을 만나보지 못했다. 기대없이 읽었던 책이 내가 좋아하는 장르와, 색깔과, 무게감이 딱 맞아 떨어졌을 때에는 또 한명의 좋은 작가를 찾았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좋은 만남에 들떠있었다. 단편이 이렇게 좋은데 장편소설은 또,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대감이 컸던 이었다.


<기억하지 않음, 형사>는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순서로는 두번째이지만 집필 순서로 따진다면 이 책이 먼저 쓰여졌다. 책을 읽으면서도 역시! 찬호께이다, 싶을 정도로 차근차근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후다닥 빠르게 이야기를 짓지 않고 벽돌하나 하나를 올리듯이 이야기 뼈대를 구성하고, 그 사건에 맞게 단서를 쥐어주며 점점 더 이야기에 집중하는 힘이 있다보니 나도 모르게 쉬유이 형사의 시선으로 사건을 읽어나간다. 찬호께이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그가 쓰는 홍콩의 관리체계나 경찰의 직급, 홍콩에 관련된 역사나 지리적인 이야기들이 낯설었으나 전작을 통해 단련이 되었는지 이제는 자연스럽게 주인공들의 이름이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둥청 아파트에서 정위안다와 뤼슈란, 뤼슈란의 몸 속에 있던 태아까지 세명의 목숨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고, 살인 용의자인 린젠성은 차량을 탈취해 도망을 가다가 목숨을 잃었다. 담당형사인 쉬유이는 잠시 잠을 잔듯 차안에서 깨어나 정위안다 부부의 사건을 생각하며 그가 근무하는 경찰서로 가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것들이 달라져 있다. 자신은 2003년의 삶을 살고 있지만 시간은 2009년. 숙취로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 그가 겪었던 일 때문에 내적으로 상처를 입었고 그는 단기 기억 상실증으로 6년의 시간을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도 다행히 그 사건을 취재하려는 기자 아친을 만나게 되고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사건을 되짚어간다.


중반을 넘을 때까지도 한호께이는 정석으로 벽돌을 쌓아가듯 이야기가 물샐 틈 없이 전진하고 또 전진하며 이야기의 막바지에 이른다. 7할 때까지 견고하게 성을 쌓고 또 쌓아가던 그가 마치 젠가처럼 한 순간에 '기억'과 '상실'이라는 주제와 맞닿음으로서 한순간에 이야기를 뒤집는다. 견고하게 쌓아가던 성이 무너지면서 이야기는 다시 변주에 또 변주가 되어 이야기가 생성된다. 단기 기억 상실증이라는 주제는 책을 비롯해서 드라마, 영화 속에서 단골로 한 번씩 쓰이는 주제이며, 그 것이 이야기를 한번씩 뒤틀 때 얼마나 자유로이 쓰이는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가 탄탄하게 그리던 이야기를 '기억'이라는 소재로 한 번 비틀었을 때 '의아'하게 느껴졌고, 완전히 이야기를 비틀어 버렸을 때는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마음 속에 가득찼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결말의 아쉬움과 중반 이후의 이야기가 내 생각과 달리 트릭이라고 쓰여질 정도로 반전이 있는 이야기였지만 찬호께이의 이번 작품 역시 재밌다. <13.67>이라는 작품을 통해 찬호께에게 도장을 쿡 찍은 독자에게는 다소 아쉬운 결말이지만 아직 그의 작품을 안 읽은 독자에게는 우리나라에서 먼저 출간된 순서로 읽기 보다는 찬호께이가 집필한 순서대로 읽는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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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이토록 천박한 도시다. 살인, 강도, 남치, 강간, 뭐든지 나와 상관없으면 시민들은 방관자적 입장에서 사건을 감상한다.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모두 냉혈동물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현대사회의 인간은 공감능력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좋게 말하면 이성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냉혹하다.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정보는 더 쉽게 유통되고, 우리는 세상일에 점점 더 마비된다. 어쩌면 세상에 나쁜 일이 너무 많아서 냉혹해져야 했는지도 모른다. 한 겹 또 한 겹의 갑옷으로 자신을 감싸고서 이 '번화한 사회'에 적응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방관자적 입장에서 사물을 보아야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은 몹시 연약하다. 그러나 형사는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날이 길어지는 만큼 일하는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에 방관자적 입장을 취할 수 없다. - p.11~12


-경찰에게 가장 중요한 건 말야, 당연히 자기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지.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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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제니 한 지음, 이지연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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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소녀의 사랑스런 성장 이야기이자 발랄한 로맨스 소설.


 십대 때부터도 '사랑이야기'를 무척 좋아해서 만화는 순정만화 밖에 보지 않았을 정도로 한 길만 고집했는데 강산이 몇 번 변해도 취향이라는 것이 별반 달라지지가 않는가보다. 요즘도 틈틈이 짬이 날 때마다 로맨스 소설을 읽거나 연재하고 있는 작품을 찾아 읽곤 한다. 사실, 굳이 로맨스 소설을 찾아 읽지 않아도 영원불멸한 소재가 '사랑'이다 보니 드라마, 영화, 문학소설, 미술을 통해 사랑의 다층적인 면면을 많이 바라 볼 수 있다. 다만, 시간이 지나 어릴 때 생각했던 고민, 내 나이 또래의 남자 아이와의 사랑이 어른의 사랑과 달리 풋풋하고, 달콤한, 사랑스러움이 가득 남아 있지만 그 속에서도 달콤 쌉싸름하게 다가 올 때는 무게의 추가 한 없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제니 한의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는 열여섯살 라라 진이 그동안 짝사랑했던 남자들에게 부치지 않을 편지를 써서 혼자 몰래 간직했지만 어느날 갑자기 그 편지를 모아둔 보관함이 사라지고 편지는 그 주인공들에게 붙여져 라라 진의 속내를 상대방 남자 아이들에게 공개가 되며 일어난 일을 그리고 있다. 무엇보다 한 때 그녀가 짝사랑했지만 이제 언니의 남자친구가 되어 있는 조시(오빠)와 한 때 친했지만 점점 멀어졌던 인기가 많은 피터와의 사이가 한 순간에 달라진다. 언니와 헤어졌지만 옆집에서 항상 얼굴을 마주 볼 수 밖에 없었던 시간 속에서 라라 진은 거리를 두려고 하고 그때 편지는 전달되어 조시와 피터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이내 두 남자가 라라 진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처음에는 조시에게 마음을 두다보니 점점 멀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피터와의 가짜 남자친구를 만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피터의 매력 속으로 빠져든다.


누군가의 마음을 송두리째 내 손안에 쥐고 있다는 건 엄청난 책임이 필요한 일이니까. - p. 50


누구에게 속한다는 것, 이전에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게 지금까지 내가 줄곧 바랐던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정말로 누군가의 것이 되는 것, 그리고 정말로 누군가를 내것으로 만드는 것. - p.221


언뜻 보면 막장 스토리일 것 같지만 그 또래의 아이들의 사랑이야기임에도 제법 잘 읽힌다. 로맨스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서 첫째인 마고 언니를 의지하면서도 동시에 라이벌로 느끼며 토닥거리기도 하고 어린 동생인 키티를 아끼며 돌보는 라라 진의 이야기는 사랑스런 로맨스 소설인 동시에 성장 소설이기도 하다. 아빠를 도와가며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멀리 대학을 간 언니를 대신해 키티를 엄마같이 보육함으로서 열여섯 살인 라라진이 조금 더 성숙해지며 자신이 누구를 좋아하는지 깨닫게 된다.


조시도 피터도 라라 진을 처음 좋아하는 상대가 아닌 누군가의 연인이었고 지금도 그들 마음 속에는 연관이 되어 있어 라라 진이 푹 빠져 버리기에는 아니올시다, 라고 싶었지만 피터 말대로 그것은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예전 같으면 조금 삐딱한 마음으로 봤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예전에 생각했던 잣대가 조금은 유연성 있게 가치를 두게 되는 것 같다. 어떤 이가 더 내 마음에 들어오는지 시간이 지나 점점 더 선명해지는 색깔을 찾아가는 책이라 그런지 제니 한의 이야기가 가볍게도,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국계 미국인인 제니한의 이야기 속에 중간중간 한국에 관한 것들이 소개 되어 그녀가 느끼고, 맛보고, 생각한 것들을 느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친근감이 많이 간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 된 그녀의 다음 작품은 어떤 주제로 쓰였을지 무척 궁금하다. 다음에는 조금 더 묵직한 이야기로 만났으면 좋겠다.


누군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처음에는 하고 싶은 얘기들을 잔뜩 쌓아둔다. 모든 걸 기억해 두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건 손바닥에 모래를 쥐고 있는 것과 같다. 그 작은 알갱이들은 모두 손을 빠져나가고 결국에는 빈주먹만 꽉쥐고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모든걸 쌓아두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마침내 서로 보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큰 안부만 주고받게 된다. 작은 것들까지 모두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큰 수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을 만드는 것은 그 작은 것들이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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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마더스
도리스 레싱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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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노(老)자가의 강렬한 필치를 느낄 수 있는 네 편의 중편들.


  많은 이들이 도리스 레싱의 책을 읽고 나서 그녀의 책을 추천해 줄 때마다 꼭 읽어보겠다고 리스트에 적어놓았다가 작년에서야 비로소 그녀의 데뷔작을 만났다. <풀잎을 노래한다>를 읽으면서 문명이 가져다 준 야만과 인종간의 갈등, 백인들의 오만함, 도시와 시골간의 대립 그리고 한 여자의 일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책이었는데 제목에서 주는 청량함 보다는 목을 죄어오는 묵직함으로 느껴졌던 책이다. 한 여자의 일생을 이렇게 극적으로 다채롭게 그려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결혼 적령기의 여자의 일생을 사회적인 문제와 결부시켜 사회의 문제와 개인적인 문제를 결합시킨 작품이었듯 <그랜드마더스> 역시 도리스 레싱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네 편의 중편 소설은 저마다의 색깔로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무엇보다 표제작인 <그랜드마더스>가 가장 인상 깊었다. 한동안 드라마를 안보다가 부모님이 보시는 드라마를 옆에서 몇 번 본 것이 인연이 되어 곧잘 드라마 할 시간이면 그 드라마를 챙겨보았는데 '막장드라마'의 끝판왕 맛보는구나 싶을 정도로 이야기의 구성이 엉성하지만 때로는 배우들의 열연에 끊지 못하고 계속 봤다. 영화 '투마더스'의 원작 소설인 도리스 레싱의 이야기는 영화 제목처럼 로즈와 릴이라는 두 소녀가 오랜시간 함께 하면서 소녀에서 여자로, 한 남자의 아내로, 엄마로 생활하면서도 늘 두 사람은 언제나 함께였다. 그래서 로즈가 톰을 낳고, 릴이 이안을 낳았을 때도 두 집안의 결합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아이들이 성장하고 각기 로즈와 릴이 남편과 이혼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뒤바뀐다. 


아이들의 엄마이면서 동시에 서로의 엄마인 로즈와 릴은 소년에서 남자로 성장한 톰과 이안을 내 아이처럼 돌보다가 이내 불안정한 이안이 로즈에게 기대하면서 더욱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 옆에서 그 것을 지켜본 톰은 두 사람의 관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릴에게 이야기를 하지만 이내 톰 역시 릴의 관계 또한 깊은 연정에 푹 빠져 버린다. 드라마에서 막장의 끝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도리스 레싱의 작품에서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이야기에 발을 빠뜨릴 만큼 이야기는 더 깊숙히 들어간다.


'그랜드마더스'만큼이나 인상깊었던 빅토리아와 스테이브니 가(家)와 러브 차일드 역시 '사랑'을 매개로 인생의 소용돌이에 빠져 허우적거린 남녀의 사랑 이후에 펼쳐지는 지독하리만치 고독하고 잔인한 생애를 그리고 있다. 그것이 여자의 일생 혹은 남자의 일생이라 할지라도 그녀의 책을 통해 그 일생을 읽노라면 앞으로 펼쳐질 나날들에 대한 기대 보다는 묵직한 무게감이 절로 느껴진다. 도리스 레싱의 이야기는 기존의 드라마보다 더 막장 같은 이야기가 들어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이라는 테두리 속에 그들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억지가 아닌 이해로서 그들의 모습을 더 깊이 들여다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난다.


책을 다 읽고 영화 '투마더스'가 궁금해 찾아 보기도 하고 도리스 레싱이 쓴 다른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도리스 레싱은 단순히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 만큼이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던지지 못했던 물음들을 작품 속에 하나 둘씩 던져 놓는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을 읽고 나면 개운하기 보다는 찜찜하면서도 계속해서 그녀가 던져놓은 물음들을 떠올리며 올가미에 걸린 인물들을 생각한다. 과연 그녀가 선택한 그 삶이, 그 생이 온전한 길이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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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관 1 - 2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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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보다 더 농밀하고 치밀하게 권력의 고삐를 쥐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무더운 여름날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인 <로마의 일인자>가 출간되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재밌게 책을 읽었다. <로마인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목소리가 너무나 깊이 스며들어 있어서 객관적으로 로마 역사를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느껴지곤 했었는데 콜린 매컬로가 쓴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는 각 인물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권력의 가장 큰 꼭대기에 이르기 위해 올라서는 과정들이 그려져 있다. <로마의 일인자>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꾸고 정략결혼을 통해 입지를 다져가는 과정이라면 <풀잎관>은 입지를 다져 놓은 곳에 자신의 입지를 더 견고하게 탑을 쌓아가는 과정을 담은 책이다.


<풀잎관>에서 마리우스와 루푸스의 나이는 이미 예순 살이 되었고 술라 역시 마흔두 살의 중후한 매력이 물씬 나오는 남자로 성장했다. 이전에 만났던 마리우스가 조금 더 유연한 사고를 지닌 남자였다면 뇌졸증으로 쓰러진 후에는 조급한 성격과 자신이 옮다고 생각한 것들은 절대 굽히지 않는 옹고집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직한 면모가 있고, 자신의 아내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마리우스는 자신의 길을 평탄하게 가는 것 같다. 그런 반면 술라는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매이기 보다는 자유로운 성정을 갖고 있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율릴라와의 결혼으로 입지를 다져 놓았지만 여전히 남자들에게는 신임을 못받는 인물로 표현되기도 한다. 여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이 많지만 많은 여자들과의 염문은 그로 하여금 여자에 대해 치를 떨만큼 증오한다. 술라라는 인물은 선과 악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의미로 정의할 수 없기에 계속해서 눈을 떼지 않고 살펴보고 싶다.


로마의 일인자가 연정을 담은 봄이라면, 풀잎관은 냉정하고도 차가운 겨울이다. <풀잎관>에서도 역시 남녀간의 사랑을 담고 있지만 부적절한 사랑이고,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봄이지만 누군가에는 사무치는 겨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더불어 권력의 고삐를 쥔 사내에게는 여자들이 가정을 돌보고 자신들과 사랑을 나누는 사람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살고 있는 재산이라는 인식이 깊이 뿌리 박혀 있다. 특히 풀잎관에서 더 시리도록 그런 인격인들이 많이 나와있어 눈을 찌푸리게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권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가이우스의 욕망은 끝이 없었고, 아내의 조카인 카이사르가 영민하다는 이야기에 누군가가 이야기 해 주었던 예언이 마음 속에 파고 들었던 것처럼 나 아닌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해 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간다는 사실만으로 누군가를 시기하고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시공간을 떠나 여전히 인간의 이기심은 변치 않음을 이야기 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우스와 술라, 루푸스의 이야기와 리비아와 드루수스의 이야기는 마음이 아팠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기본이 되지 않고 돈이나 권력의 관계에 따라 만들어진 정략 결혼의 폐해를 볼 수 있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관계에 대한 중요성 보다 보다 더 치밀하고 간교해진 가운데 자신이 가진 입지의 구축과 혈통이 깨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이야기가 앞으로의 로마를 어떻게 바꿔나갈지를 알려주고 있다.

***

 

​"그렇지. 그리고 원로원의 저 멍청한 작자들이 제대하는 최하층민 병사들에게 땅뙈기를 나눠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해서야. 마리우스, 최하층민은 아무런 돈도 재산도 없다는 걸 절대 잊지 말거라! 나는 최하층민에게 우리 군에 입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럼으로써 이전에는 아무런 쓸모도 없었던 시민 계급이라는 새로운 피를 로마에 수혈해주었어. 그렇게 모인 최하층민 병사들은 누미디아에서, 아콰이 섹스티아이에서, 베르켈라이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입증해 보였단다. 재산을 가진 기존 군인들보다 더 잘 싸우면 잘 싸웠지 결코 못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이들이 재대하고서 다시 로마의 빈민굴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 땅을 갖고 정착하게 해주어야 해. 이탈리아 내 로마 공유지에 최하층민 병사들을 정착시키겠다고 하면 1계급과 2계급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새로 시민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이런 곳에다 그들을 정착시킬 법을 제정한거란다. 그들이 여기에 정착했다면 우리 속주들이 로마화되고, 그렇게 때가 무르익으면 우리로마의 동조세력이 늘었을 테데. 불행히도 원로원과 기사계급의 지도층 인사들은 로마가 무엇과도 섞일 수 없는 븍한 곳이라 생각하고 로마의 관습과 생활양식이 전 세계로 전파되는 것을 원치 않는단 말이지." - p.74


 

"불행히도 이런 아이들이 항상 그 가능성에 부응하지는 못한다는 말이지. 재능의 불꽃이 어릴 때 너무 밝게 타오르다가 나이가 들면 점점 시들어 꺼져버리거나, 지나친 확신과 자만심에 빠져 있다가 순식간에 추락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오. 하지만 어쩌다 한 명씩은 대단히 유용한 인물이 되지. 이렇게 유용한 이들은 커다란 보물이라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늘 그 부모들을 도와주는 것이오."  - p.84​


"너는 어린 카이사르가 갖는 중요한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고 반드시 이 아이가 걸출한 이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온힘을 다해야 한다. 이 아이가 아니면 다른 누구도 이룩할 수 없는 목적의식을 불어넣어주거라. 모스 마이오룸을 보존하고 옛 전통과 오랜 혈통의 기세를 되살리도록 말이다. " -p.93


손에 든 물건은 얼마나 오랫동안 내려다보고 있었는지 몰랐다. 이제는 머릿속에 단 한 가지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가 가진 건 분노뿐이었다. 아니면, 그건 고통이었을까? 큰 슬픔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크나큰 외로움이었을까? 그는 활활 타는 불길에서 따뜻함을 지나 서늘하게 식었고 마침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제야 이 끔찍한 불능을, 필연이자 위안을 주는 살인에 그토록 매혹되어 있는 자신이 같은 귀족 신분의 여자들에게는 도저히 그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 p.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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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일인자 1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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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일인자로 올라서기 위한 첫 발걸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라는 말이 있다. 아피아 가도를 시작으로 로마는 많은 길을 건설했고 보다 빨리 물자를 수송하고 길을 오갈 수 있었기에 로마의 힘이 세계전역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도 이탈리아는 물론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많은 나라에서 보여지는 수로와 건축물은 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가에 대해 알 수 있을 정도로 로마의 힘은 강력했다. 처음 시작은 미비했으나 세월이 갈수록 성장기를 지나 그들이 만들어 놓은 체제 속에서 로마의 힘은 강력해졌고, 그들이 세운 원로원의 힘과 로마인의 유연한 사고가 로마를 더 부강하게 만들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 공화정은 점차 쇠퇴하면서 체제의 분열과 사람들의 나태함이 더해져 강국이었던 로마는 역사의 뒤안길로 서서히 허물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워왔다.

아직도 로마에 관련된 역사서는 물론이고 로마 하면 떠오르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단번에 떠오를만큼 우리에게 로마역사는 그 어떤 나라의 역사보다 필연적으로 많이 읽힌다. 2012년부터 2013년까지 장기 프로젝트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전 권을 완독했다. 혼자 읽었으면 못 읽었을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 평설을 다 같이 함께 읽고 토론했기에 끝을 볼 수 있었다. 일본 작가인 시오노 나나미의 시선을 통해 로마 역사를 깊이 읽을 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녀의 글 속에 보여지는 치중된 역사적 관점이 때로는 불편하게 여겨졌다.

<로마의 일인자>는 <가시나무 새>로 유명한 콜린 매컬로가 여생을 걸로 쓴 대작이다. 작가가 자료를 모으로 고증하는 시간만 13년이 걸렸고 집필 이후에는 시력을 잃었을 만큼 책을 완결하기 까지 근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시오노 나나미 역시 <로마인 이야기>에 자신의 한 평생을 보냈을 만큼 긴 시간을 거쳐 시리즈를 완성 시켰던 만큼 로마에 관한 역사를 쓴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 해야 좋은 작품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콜린 매컬로의 <로마의 일인자>는 기원전 110년을 시작으로 마리우스와 카이사르, 술라의 이야기를 교차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돈은 많지만 로마 사회에서 깊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마리우스와 전통적으로 귀족 출신이지만 돈이 부족해 그 명성을 후대까지 권력을 짊어지지 못하는 카이사르와 귀족출신이지만 돈이 없어 여자들과 난잡한 생활을 하는 술라의 배경이 각각 그려지고 있다. 무엇보다 카이사르를 중심으로 로마의 일인자를 꿈꾸고 있는 마리우스가 카이사르와 손을 잡으면서 서로가 원하는 것에 이익을 취하는 공생관계를 톡톡히 보여준다면 술라의 배경과 더불어 카이사르의 막내딸 율릴라와의 만남은 오묘하다.

마리우스와 카이사르, 술라가 가족이 되어 로마 사회의 중심부로 들어가게 되고 그들이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 나가면서 얻게 되는 이익들이 앞으로의 그들이 가고자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첫 시작은 그들이 가족이 되어 로마의 일인자로 올라서기 위한 첫 발걸음을 떼었다는 것이다. <로마의 일인자>를 읽으면서 조금 생소했던 부분은 로마의 영웅 카이사르가 아닌 아버지로서의 카이사르의 면면이 많이 그려져 있다. 아버지로서의 따듯함과 가족의 생각을 모으고 합리적인 의견을 추렴하여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되 가족의 명예를 드 높이는 길을 추구하는 면을 보면서 이전에 내가 알고 있던 카이사르와는 다른 면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집안과 아들의 출세길을 보장하기 위해 마리우스를 끌어당기는 모습은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보다는 정치 9단의 정치인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권력의 중심에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뒷 배경이 단단해야 했고 그들은 혈연으로서 그 끈을 단단히 묶었다. 권력의 시작점으로 걸어들어가는 세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며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전진해가며 자신이 가고자 하는 로마의 가장 으뜸인 자리에 누가 오를 것인가에 대한 기대와 당시 로마 사회에 만연한 사회적인 분위기와 정략혼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생생히 그려져 있다. <로마인 이야기>와 다른 소설 소설 속의 이야기를 통해 콜린 매컬로가 로마를 그리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귀를 기울이며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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