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의 서 - 제3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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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와 고독의 끝이 죽음으로 향해하는 가는 이야기.


 동전의 양면같이 남자와 여자의 삶이 닮아있다. 누군가 자살을 하거나 죽음이 따라야만 여자의 역할이 행해진다. 그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지만 절제절명의 순간에 그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캐치하지 못해 그를 다시 죽음으로 몰고간 순간, 순간들에 대해 죄의식을 느낀다. 언제나 죽음을 마주해야만 하는 일은 그녀를 숨막히게 한다. 순간적으로 내가 마주 하는 순간들에 대해 일탈하고픈 마음에 상아는 박물관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정안을 만나게 된다.

건강하던 엄마가 서서히 생기를 잃고 죽어가고, 엄마의 죽음 이후 가장 가까이 자신을 보살피던 아버지는 할머니댁에 자신을 놓아두고 서서히 텀을 벌려나간다. 시간에 따라 점점 더 틈이 벌어지고 아버지의 존재는 이내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다. 자신을 버리고, 다시 새 가정을 꾸린 아버지 곁에 잠시 살았으나, 서로 닮아있는 그들의 모습과 달리 그는 그들과 섞일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아버지 조차도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자, 정안은 저 멀리 떨어져 살아간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는 학예사로서 고대 유물을 만지며 보존하며, 퇴색된 유물들을 다시 봉합해 제 빛깔을 되찾아준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두려워 누구와도 관계없이 그저 조용히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가 어둠을 마주 하면서 살아간다. 상아 역시 타인이 불행해야만 그녀가 손길을 내밀어 도와 줄 수 있기에 새로이 만나는 이들 모두 사나운 바람을 할퀴어간 사람들 뿐이다. 사회에 마음을 놓지 못하고 정신을 놓거나 소외감에 서서히 죽음을 향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상아를 점점 더 죄의식에 짓누르게 만든다.

유년시절 함께 살던 계부의 이상한 행동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살던 그녀가,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내지 못하고 죽음과 죽음을 마주하는 일이 계속해서 가중되다 보니 그녀 역시 고독의 끝자락에 서 있게 된다. 홀린듯 박물관에 들어가 진열장에 있는 악수를 만져보듯 유리로 손을 내딛자, 정안이 그녀의 손을 잡듯 가까스로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낸다.

정안은 미라 특별전에 오라며 팜플렛을 건네고 상아는 그것을 받아 서둘러 박물관을 나온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정안은 상아에게서 자신이 만지고 있는 미라와 같은 모습이 상상이 되고, 그녀의 모습에서 죽음의 향기를 느끼게 된다. 소외와 고독이 만들어낸 남녀는 누구와도 관계없이 그저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지만 삶의 끝자락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위안이 된다. 각각의 짤막한 단편집인 줄 알았으나 연작소설처럼 이루어진 이 책은 어둠 속의 빛처럼 죽음과 사랑이 공존하는 이야기다.

침잠한 죽음의 향내가 가득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소외와 고독에 의해 누군가의 온기가 필요하고, 그것이 한 남자 한 여자에 의해 다시 피어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가 활짝 피어나는 꽃처럼 만개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프지만 아니라는 결론으로 이야기는 끝이난다. 뉴스를 틀면 익숙하게 들려져 오는 그들의 소식은 또 누군가에게 소리없는 상처를 입히고, 그렇게 소리소문없이 누군가의 부재로 인해 상처를 입으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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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태어날 때부터 유독 자신에게만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시간과 사투를 벌이려는 듯 시간이 무너뜨려놓은 것들에 매달리곤 했다. 그리하여 기어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기 위해 면봉이나 수술용 메스로 녹의 찌꺼기들을 닦아내고 그것들을 특수 약품에 침수시켰다가 말리기를 여러번 해가면서 본래의 모습으로 되살려내곤 했다. 그렇게 그는 시간의 흔적을 지워내는 데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 p.52~53


그는 이상한 상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의 눈앞에 여자의 벌거벗은 몸이 보였다. 그는 상상 속에서 여자에게 떨리는 손으로 X선을 비추었다. 여자의 가슴에는 푸른 녹이 피어나 있고, 움푹 팬 아랫배에는 거뭇하게 곰팡이가 슬러있었다. 여자가 서서히 돌아섰다. 그는 소스라쳤다. 여자의 등은 나무부처의 등처럼 도금이 벗겨진 지 오래였다. 산소와 접촉된 부위부터 산화되어 거무스름하게 타들어가 있었다. 그런 여자의 몸속에서 나무부처를 갉아먹으며 섭생하는 흰개미들이 기어나오고 있었다. 학예사들이 사자(死者)라고 부르는 지독한 흰개미 떼였다. 그는 아찔한 먹먹함에 눈을 감았다. - p.55~56


여기를 봐.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존재의 몸에는 자신의 운명이 어떠한 무늬처럼 아로새겨져 있어. 그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다 그래. 너의 손에도 너의 운명이 새겨져 있단다. 그러고는 엄마는 그의 손바닥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 p.107


누군가의 죽음을 유기하기 위해 파놓은 깊은 구덩이 같은 발굴 현장에 내리고 있는 눈송이들이 그는 죽음처럼 보였다. 죽음은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언제나 우리 머리 위로 일정하게 떨어져 내려 삶의 윤곽을 뒤덮어버리는 선뜩한 비늘들인 것이었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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