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 100세 철학자의 대표산문선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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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깊은 사유

새하얀 꽃이 만개같이 펴 있던 그 자리에는 어느덧 초록잎이 돋아났고, 그 자리 아래에는 꽃비의 흔적만 우수수 남아있다. 은은하게 분홍빛으로 물든 벚꽃을 너무 좋아하는데, 피기가 무섭게 바람에, 미에 날려버려 아쉽다. 봄마다 늘, 짧은 만남이 아쉬웠지만 이번 봄은 특히 더 아쉽다. 봄볕도 좋고, 다른 일련의 꽃이 화사피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지만 봄 다운 느낌 보다는 코와 입을 가리고 다녀야 할 날이 많아 우울함을 더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과거를 떠올리게 되고, 먹을 것, 입을 것이 풍요롭지만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디서부터 축이 무너졌는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양보다 '질'에 무게를 두게된다. 하나를 먹더라도 제대로 된 것을 먹게 되고, 하나를 하더라도 조금 더 오래 쓸 수 있을 것을 산다. 그래서 그런지 책을 읽더라도 가벼운 에세이 보다는 조금 더 묵직한 에세이를 고르게 되고, 그이의 생각을 읽으며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는 100세를 목전에 둔 김형석 교수의 산문집이다. 그의 대표작<영원과 사랑의 대화>(2017, 김영사)에 엮인 것을 제외하고 남은 글들을 모은 책이다. 1세대 대표 철학자인 그의 책은 작설차를 깊이 우려내서 마시는 것처럼 깊은 여운과 시공간을 초월해 느꼈던 인간의 본질적인 물음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내를 먼저 보내고 다시 홀로 남아 여생을 보내는 김형석 교수의 남아 있는 시간은 쓸쓸하고 고독하다. 그럼에도 그가 가졌던 회한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들이 더해져 지혜롭고 행복한 날들을 기억해본다. 그의 글들은 묵직하면서도 은은하다. 철학에 관련된 글들은 철학에 조예가 깊지 않아 어렵게 느껴지지만 철학자, 음악가, 작가를 포함해 그들이 가졌던 삶의 고독은 예술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공통적으로 똑같이 다가온다.

책은 상실, 인생, 종교, 조금 오래된 이야기들로 묶은 수필들로 이루어져있다. 그 중에서 나는 상실에 관한 이야기 중에 고독에 관하여라는 수필이 가장 인상깊었다. 고독은 혼자 있어서 느껴지는 부분도 많지만 누군가 함께 살아도 스스로 느낄 수 있는 마음의 빈자리이기에 김형석 교수의 글귀가 더 눈에 들어온다. 한 사람이 100년의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한 동시에 그가 살았던 시간의 궤들이 너무나 많은 변천사를 겪어왔다.

외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김형석 교수와 같은 시간의 흐름을 겪었을 것이고, 그것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지 여쭤보고 싶을 정도로 100년의 시간은 많은 시간을 함의하고 있다. 각각의 글들은 그 시간의 인연과 이별과 내가 갖고 있는 물건들, 종교, 삶과 죽음, 그리움에 관한 글들이다. 그의 글 중에서 반가운 것은 시인 윤동주에 관한 이야기와 마지막 검은 고양이 '깜둥이'에 관한 일화였다. 인연이라는 것에 대한 소중함과 빈자리의 허전함이 동시에 드러나 마음을 애잔하게 만들었으며 유명한 대학의 철학교수이지만 일상에서는 그를 별난사람으로 취급하는 이웃사람들의 이야기도 미소를 짓게 만든다.

철학이란 삶의 모든 것에 있고, 가볍든 무겁든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삶의 위안이 되고 근심이 되기도 한다. 철학에 대한 조예가 없어 어느 철학자를 내세워 이야기를 할 수 없지만 김형석 교수의 잔잔하면서도 깊은 이야기는 우리가 삶에 있어서 한번쯤 깊이 생각해야 할 주제다. 아직은 노년의 삶을 생각해야 될 나이는 아니지만 인간이 삶아가는 것이 어떤 것이고, 앞으로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안고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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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이 마음의 상태라는 말 속에서 '마음'은 인간적인 내용의 표현이며, 따라서 모든 고독은 인간적인 것이다. - p.46


정신이 자란다는 것은 이렇게 고독이 자란다는 뜻이다. 키르케고르의 '그가 지니고 있는 고독의 척도가 곧 그의 인간의 척도'라는 뜻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괴테도 베토벤도 톨스토이도 니체도 키르케고르도 모두가 고독했다고 믿고 있다. 보다 깊은 문제 속에도 보다 높은 이상 속에도 언제나 그와 비례되는 고독이 머무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 p.52


예술적인 고독은 미에 대한 그리움이며, 가능성을 동반하지 못하는 그리움은 언제나 고독을 남겨준다. 사랑하며 누릴 수 없는 아름다움은 고독만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이 아름다운 고독의 힘을 빌려 예술품을 창조하는 것이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콘체르토가 고독을 자아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 p.55


영원하다는 것은 삶의 의미가 실재實在로 바뀐다는 뜻이다. 살았다는 뜻이 영원히 남을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예수는 그것이 신의 뜻대로 사는 일이라고 가르쳤고, 석가는 진실에서 중생을 위하는 수고라고 알려주고 있다. 개인적인 삶의 의미가 이웃과 역사에 영구히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 p.78


교육이란 어린이들의 능력을 계발해주며 선한 의지와 신념을 뒷받침해주는 일이다. 그 선의의 뒷받침은 모든 학생에게 필요하며 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열등감과 좌절을 느끼는 학생들일수록 더 많은 칭찬과 성장을 위한 후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앞서는 학생들보다는 처지는 학생들이 더 많은 칭찬과 격겨를 받도록 하는 것이 교육적 책임일지 모른다. - p.170~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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