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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좋아하면 생기는 일
서필훈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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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감정이 육체와 정신에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자꾸 행동하게 만든다. 본인도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들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인다는 것을. 그래도 멈출 수가 없다. 눈앞에 뻔히 고생길이 있는데도 그것을 향해 돌진한다. 그러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물론 그 행복 속에는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환경, 그로인한 온갖 어려움과 고난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좋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점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알 수도, 만날 수도 없었던 다양한 세상을 접하고 그 전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참 운이 좋고, 행복한 사람이다.

 

 매일 반복됐던 일상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다가온 한 순간, 그 순간을 받아들인 사람은 빠져 나갈 수 없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이 된다. 그러니 그 속에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 강하게 볶은 원두를 융 필터로 진하게 내린 커피였는데 흔치 않은 노란색 잔에 담겨 있었다. 커피는 육수처럼 걸쭉하고 표면에는 기름이 둥둥 떠 있고 색깔은 검다 못해 보랏빛이 감돌았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모금 마셨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호로록 쩝쩝. 나는 인생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는 그 커피를 마시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4.p

 

 그렇게 커피의 세계로 들어간 저자는 보헤미안 커피숍에서 일하게 되었고, 커피에 대해 가르쳐 주는 많은 사람들과 스승을 만났으며, 커피 산지를 찾아 하늘을 날아 세계를 떠돌아 다녔다. 그 뒤 힘들게 연남동 전통시장 안에 작은 공방을 열고 ‘커피리브레’를 시작했다. 빚과 경영난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좋은 커피를 찾아 전 세계를 돌고 돌았다. 그 열정이 대단하다. 커피를 진짜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커피’란 무엇인가. 내게 커피는 검은 액체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커피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과 땅과 하늘이 도와가며 만들어내는 농작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자라지 않는 농작물이기에 일단 눈에 보이지 않고, 재배와 무역 과정 또한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평생 모르고 편하게 기호식품으로써 커피를 음용할 수 있다. 공정무역이 많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 이면의 불편한 진실은 괜히 들추고 싶지 않은 것이 소비자로서의 솔직한 마음이다.

 

 오늘 아침 맛있게 마신 커피가 어디서 왔는지 누가 어떻게 생산했고 정당한 대가를 받았는지, 커피 생산자의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제때 밥을 먹고 지내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오랫동안 우리는 커피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미처 마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63.p

 

 그러나 좋은 원두를 찾아 소비자에게 공급해야 하는 저자에게는 커피를 생산하고 가공하며 유통하는 모든 사람들, 또 그 커피를 맛있게 마셔주는 사람들 모두가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소통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고고학자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 끊어졌던 이야기를 잇는 작가이자 오랫동안 잊힌 존재들의 얼굴을 복원하는 기술자다. 나도 그렇게 커피를 재배한 농부들부터 커피 가공소의 노동자, 커피를 항구까지 실어 나르는 트럭 운전사, 항구 노동자와 배의 항해사,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까지, 한 잔의 커피가 누군가의 손에 들리기까지의 거기 담긴 모두의 얼굴을 ‘복원’해보고 싶었다. 15.p

 

 생산자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소비자가 자신의 소비 행위가 가진 힘과 가치에 귀 기울일 수 있게 이어주는 쌍방향 메신저의 일, 내가 꿈꾸는 소통이다. 19.p

 

 우연히 마시게 된 커피 한 잔이 저자를 참 멀리도 데려다 놓았다. 그의 꿈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커피 속에는 참 많은 것이 담겨 있다.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커피는 역사다’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매일 마시고 있는 커피 한 잔 속에는 안타깝지만 다국적기업의 횡포와 선진국들과 종교까지 가담한 학살로 인한 피가 담겨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유지하고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노동의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은 생업으로서 커피를 재배하기 위해 땀을 흘리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직업으로서 혹은 음료로서 커피를 좋아하는 마음과 커피를 생산한 사람들의 역사, 문화, 사회경제적 상황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적어도 나에게 무엇을 좋아한다는 의미는 그렇다. 194.p

 

 지구 반대편에서 내가 마시는 커피나무를 재배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땀을 흘리고 있다. 그것을 재배하여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가족을 부양한다. 저자가 한 잔의 커피를 마시다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나아갔던 것처럼 나 또한 호기심으로 읽게 된 이 책으로 인해 커피 속에 담긴 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언젠가는 바로 잡혀야 하는 공정과정과 무역에, 날로 심각해지는 온난화 현상과 기후 변화에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것은 돌고 돌아서 다른 모습으로 내게 찾아올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에.

 

 커피는 맛있지만, 엄연히 자본주의의 상품이고 나는 그저 장사꾼이다. 사실 내 머릿속은 온통 일 걱정뿐이다. 아주 가끔, 그곳에서 마주했던 커피 밭과 커피 기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생각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곤 한다. 세상 속에서 커피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이며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산지를 떠돌건 한국에서 커피를 팔건 모든 것은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래도 커피를 좋아한다. 정녕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노력과 책임이 필요한 일인 것 같다. 226.p

 

 백신을 접종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코로나19는 전 세계를 혼란 속에 빠뜨리고 있다. 이 시기가 지나간다고 해도 예전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애써 일상을 유지하고, 곧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커피의 맛처럼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하다. 커피 맛을 잘 모르는 사람은 그 쓴 것을 왜 마시냐며 타박하지만 커피의 맛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다. 예전에는 자판기의 달달한 커피를 좋아했다. 아마 달달한 커피보다 짧게 주어진 여유로운 시간을 좋아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원두를 갈아 직접 내려 마시는 달고 쌉싸름한 커피의 맛과 오묘한 향기까지 즐기는 커피애용가이다. 나 또한 커피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제대로 대우받기를 원한다.

 

 바쁜 사람에게도, 백수에게도 하루는 공평하게 빨리 지나간다. 하루를 보내며 대단한 의미나 보람을 좇지 않는다. 미래를 준비한답시고 오늘의 고통을 감내하거나 지금의 즐거움을 유예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오늘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 일주일에 두세 번 장바구니를 옆에 메고 시장에 가서 채소와 과일을 사온다. 저녁은 심혈을 기울여 최대한 맛있게 해 먹으려고 한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지나가는 날들이지만 그래도 하루를 살아냈으니 작은 위로를 받아 마땅하다. 244.p

 

 커피를 마시다 보면 바쁜 일과 속에서도 잠시 여유를 찾게 된다. 또 현실 너머 엉뚱한 순간을 상상하거나 즐거운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래서 커피가 좋고 끊을 수 없다. 맛있는 커피를 매일 마시고 싶은 이유이며 그럴 수 있는 일상이 기쁘고 고맙다. 이 기쁨이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골고루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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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꽃의 삶 피오나 스태퍼드 식물 시리즈
피오나 스태퍼드 지음, 강경이 옮김 / 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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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은 사람들의 마음을 황홀하게 만든다. 아름다운 모양뿐만 아니라 꽃이 가지고 있는 나름의 향기 때문에 한순간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하기도 한다. 한때 꽃꽂이에 몰두했던 시기가 있었다. 퇴근 시간 사람들이 가득 탄 버스 안에서 지친 몸을 겨우 다잡으며 손잡이를 잡고 서 있을 때, 프리지아 꽃향기가 스쳐지나갔다. 그 순간 고단하고 힘들었던 육체에 힘이 생기며 눈을 번쩍 뜨이게 했던 경험이 나를 꽃의 세계로 이끌었다. 사람들은 연약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로는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된다. 꽃은 그런 인간의 욕망을 가장 극대화 시키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꽃은 인간의 욕망에 호락호락 응해주지 않는다. 꽃의 속성이 사시사철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우리 곁에 머물러 주지 않는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결국 한 계절 최고의 절정기를 이루다가 사라진다. 아름다움은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말이다

 

 

 꽃에 관한 많은 책들 중에서 피오나 스태퍼드의 덧없는 꽃의 삶에 눈길이 간 것도 제목 때문이었다. 꽃의 인생을 정확하게 대변해준 제목이다. 그러나 그 덧없는 것을 알게 되는 것도 한순간 찬란하게 피었다가 제 몫을 다하고 사라진 시간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꽃처럼 황홀하고 향기로웠던 순간에 함께 했던 사람과 추억을 가슴속에 간직하며 때때로 힘겹고 어려운 일상을 견디며 살아간다. 저자가 나는 이파리와 꽃잎으로 내 삶의 마디마디를 가늠할 수 있다.”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러하다. 어린 시절 그녀의 가족이 어디를 가든지 꽃과 함께 한 것처럼 우리도 삶의 한 페이지마다 꽃과 향기가 함께 하였을 것이다. 소유하지 않았어도 내가 버스 안에서 프리지아 향기를 맡고 힘을 냈던 것처럼 말이다.

 

 

 

  저자가 언급한 많은 꽃 중에서 자신의 추억과 연결된 꽃을 찾아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중 하나이다. 영국 곳곳 마을 길가의 지루한 초봄 풍경에 수선화가 드문드문 반짝이기 시작해 결국 도로변이 선명한 레몬빛으로 타오른다.’는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제주도의 대정 추사 유배지에 피어있던 수선화를 생각했다. 제주도에서 쓸쓸한 유배생활을 했던 추사 김정희에게 위한을 주었던 수선화는 내가 이곳을 찾았을 때도 하얀 꽃잎 속에 노란 알전구 같은 꽃잎을 품고 피어 있었다. 초록색 줄기와 잎사귀가 안정감 있게 꽃잎을 바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든든해 보였다. 무엇보다 향기가 짙어서 꽃무리 옆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꽃들은 모습뿐만 아니라 향기로 말을 건다. 나는 수선화 때문에 제주도의 추사 유배지를 기억한다.

 

 

  장미도 마찬가지이다. 장미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동시에 상징적 의미가 가득한 꽃이라 기록된 의미에 맞게 사용하기보다 개인적인 경험과 연결시켜 자신만의 의미를 두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장미하면 고등학교 1학년 때, 여름방학이 끝나고 아침 일찍 자율학습 시간에 맞춰 등교한 후, 교실 책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던 일이 생각난다. 우리 반 교실이 1층에 있었는데 창밖 화단에 주먹보다 훨씬 컸던 붉은 장미들과 눈빛을 교환했었다. 아직 이슬이 채 사라지지 않은 장미꽃은 아름답다기보다 씩씩하고 당당해 보였다.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붉은빛을 머금고 아침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힘을 내라고 응원하는 것 같았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장미꽃이 붉게 물들 때쯤이면 반팔 티셔츠 아래로 차가운 아침 공기가 스미면서 좁쌀보다 더 작은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때의 차가운 기운이 좋았다. 지금도 가끔 여름이 끝나갈 때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차가운 기운을 느끼고 싶어질 때가 있다

 

 

 작년 봄에 돌아가신 아버지 장례식에 진한 꽃향기가 가득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향냄새가 아닌 꽃향기로 아버지를 기억하게 되었다. 한식날 쯤 사촌 동생들이 깨끗하게 벌초를 한 선산을 찾았을 때, 아버지 산소에는 엉겅퀴가 자리를 잡고 보라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뜯어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오후 햇살이 구름에 가려 그늘이 지면서 모처럼 아빠 산소 앞에서 엄마, 언니들과 조카랑 웃으며 지난 추억을 이야기했다. 꽃의 일생이 덧없는 것처럼 인간의 인생도 덧없는 것 같지만 추억을 나누고 함께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했다. 꽃들도 그러할 것 같다. 추상적인 삶이라는 커다란 시간 속에 꽃은 우리에게 다가와 각자만의 또 다른 꽃이 되어 주었다. 그것 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아름다워질 수 있다.

 

 

https://blog.naver.com/goodivy0311/222112969808

 

#덧없는꽃의삶 #출판사클#꽃책#식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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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잔상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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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후에 남은 것들

사랑의 잔상들- 장혜령 산문집

 

 

  사람이 호감을 갖고 다가왔을 때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손을 내밀고, 내민 손을 잡아 주는 것이다. 서로 손을 잡음으로써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조금씩 마음을 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 함께 존재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손을 내미는 것은 최초의 용기이고, 떨림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도 우정도 그렇게 시작된다.

 

 

기꺼이 원했던 건

손을 내미는 것.”

 

이 말은 이렇게도 들린다. 우리 삶은 결코 돌이킬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기꺼이 원했던 건,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고. 12.p

 

 

 

  그래서인지 수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초등학교 수업시간, 선생님과 친구들 몰래 짝꿍이 내민 손을 잡고 가슴 뛰게 행복해했던 일을 잊지 못한다. 철없던 어린 소녀였지만, 그 감정의 시작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사랑도 현재 진행 중일 때보다 그 열기가 식고 끝났을 때 그 실재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사랑하던 대상이 변했거나 사라졌을 때, 그 뒤에 남는 것은 오롯이 자신이 느끼고 체험했던 기억과 그것들의 변주이다. 그래서 그 이후 남겨진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사랑이 삶을 확장시키거나 갉아먹을지라도 여전히 그것을 갈망하고 또 다른 사랑 속에 뛰어들게 만든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 사랑은 큰 에너지이자 환상이다. 아름답지만 슬픈 환상.

 

 

언젠가부터 내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과 맞닿은 무수한 기억의 편련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미지들은 하나의 확고한 선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돌연히 나타나는 섬광과도 같다. 그 빛은 순식간에 우리의 마음을 강타하여 잠식한 뒤 이내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그런 빛들이 없었다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그 빛들의 자취는 내가 캄캄한 삶 속에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지도와도 같았다. 14.p

 

  만약에 우리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랑이 없다고 믿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면 삶은 더 효용적이고 간결해졌겠지만, 그만큼 건조하고 재미없는 삶이 되었을 것이다. 깊은 밤, 눈을 감고 감미로웠던 순간을 되씹어 보는 시간과 나 아닌 타인의 슬픔에 가슴저려가며 눈물 흘려주던 보석 같은 사랑을 잃고 어떻게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름다워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눌 줄 알기에 사람들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우리는 그 잔상들을 붙잡으며 단단히 견디고 버티며 살아갈 수 있다.

 

 

  장혜령의 문장은 산문이면서 시이다. 사랑의 잔상을 자신만의 문장으로 풀어놓았고, 소유했다. 그러나 그 문장을 읽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독자는 또 다른 자신만의 사랑과 문장을 갖게된다. 그리고 나아가 읽는 이의 마음을 감싸준다. 사랑의 잔상들이 사랑을 잃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들의 버팀목 같다고 속삭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은 아프면서도 힘이 있다.

 

 

영어 단어 'deliver'에는 전달하다라는 일반적으로 자주 쓰이는 뜻 외에 구원하다라는 뜻이 있다. 누군가에게서 누군가에게로, 손에서 손으로 무엇을 전한다는 것,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그 무엇을 옮겨놓는 일에 구원의 의미가 담긴다는 것은 무척 상징적이다. 205.p

 

 

  사랑은 작가에게 수많은 잔상을 남겨 주었다. 그 잔상들은 우리에게 사랑의 문장이 되어 다가왔다.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아주며, 손에 담긴 무언가를 소중히 받고, 다른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건넨다는 것은 참 떨리면서도 무언가 벅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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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
패티 스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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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경험이 어떻게 소설이 되어가는지,
그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제목처럼 몰입하며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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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급해졌어, 아름다운 것을 모두 보고 싶어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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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의 여행은 영원히 진행 중

 

 

1. 마음이 급해졌어, 아름다운 것을 모두 보고 싶어/ 마스다 미리

 

  나는 패키지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침잠이 많기 때문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나의 패키지여행은 중국 상하이, 항주, 소주를 도는 45일 여행이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에 호텔 조식을 먹고, 8시에 다시 모여 출발하는 이른바 678 아침 스케줄이 내게는 강행군이었다. 그 뒤로는 패키지여행을 가지 않았다. 조금 번거롭기는 했지만 직접 여행준비를 하고 현지에서는 오전 시간을 느긋하게 즐긴다. 지금도 나의 국내외 여행은 자유롭게 선택하고 여유를 즐기지만, 이 책을 읽으며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것을 많이 봐두고 싶다.’

마흔 살이 됐을 때, 왠지 그런 다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책이나 텔레비전에서 보아온, 세상의 많은 아름다운 것들. 이를테면 풍경이나 축제 같은 것.

봐두고 싶네. 하지만 갈 일은 없을 테지.’

그렇게 동경했던 곳으로 앞으로 10년에 걸쳐 다 다녀보는 건 어떨까?

등을 민 것은 가이드가 동행하는 패키지 투어의 존재였습니다.

- 여행을 시작하며 중에서

 

  아름다운 것을 많이 봐두고 싶다는 소망은 저자만의 것은 아니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탐할 권리와 본능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특히 처음에 나오는 북유럽 오로라 여행은 마음을 먹는다 해서 쉽게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새벽 두 시가 지났고, 기온은 영하 18도인 세계.’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의 마음도 두근거렸다. 코끝이 아릴 정도의 차디찬 밤공기 속에서 발을 동동 거리며 오로라가 나타나주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들은 저자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으며, 혹은 그 누구일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탄할 수 있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일 것이다. 패키지여행이 있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오로라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여행객 대부분 60대 이상 부부도 있지만, 여성 그룹이 많아서 재잘재잘 무척 즐거워 보인다. 북극권 여행이다. 춥고 멀고, 상당히 힘들 텐데 지친 기색도 없어서 젊을 때밖에 갈 수 없어라고 생각했던 나를 반성했다. 젊지 않아도 어느 때라도 어디든 갈 수 있는 것 같다. 30.p

 

  애쓰고 수고한 자신을 위해, 육체를 이끌고 새로운 세계까지 걸어 나온 여행자는 장소를 옮길 때마다 다시 태어난다. 젊지 않아도 괜찮다. 나이 들어가는 것에 쫄지 않고, 다가올 미래를 두근거리며 기다리고 싶다면 여행을 떠나야 한다. 낯선 곳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새로워진 나나로 돌아오는 우리는 행복하다. 혼자 참가해서 청승맞아 보일 수 있어도, 시간에 쫓겨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 여행을 35일로 밖에는 다녀올 수 없어도 떠나고, 보고 싶은 것을 보며,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은 총알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여유로움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벽돌색 지붕의 귀여운 구시가지. 많은 관광객이 그 경치에 빨려들었다. 더 천천히 보고 싶었는데, 투어는 항상 시간에 쫓긴다. 특히 이번에는 독일 35일이라는 총알 투어다.

그런 여행으로는 아무것도 본 게 안 돼.”

하는 의견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언가는 남을 터. 아무것도 본 게 되지 않는다고, 누가 단정할 것인가? 59.p

 

  자신의 취향에 맞게 자유여행을 할 수 있지만,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것은 아니다. 체력이 받쳐 주던 20~40대를 지나, 힘에 부치는 나이가 되었거나 긴 시간을 낼 수 없을 때, 혹은 동행자 없이 멀고 험한 여행지를 선택해야 할 때는 자유여행이 아닌 또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그 대안의 중심에 패키지여행이 있다. 또 이 여행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패키지여행만 있다면 몇 살이 되었든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용기를 내어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지루한 일상의 자리로도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 저자처럼 아름다운 것들을 두 눈과 마음속에 차곡차곡 간직하고 싶은 나도 나이 드는 것이 두렵지 않다.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한때 나의 SNS 아이디는 걸어야 할 이유를 찾다였다. 걷기는 좋은 친구이자 삶의 돌파구였다. 땅을 디디며 두 발로 체중을 느낄 때 라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지금도 걷기에 대한 말을 듣거나 글을 읽으면 몸이 근질근질해지고 당장 동네라도 한 바퀴 돌고 싶어진다.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서 한량처럼 빈둥거렸을 때, 나를 일으켜준 것은 걷기였다. 늦은 아침에 눈을 뜨면 가족들이 모두 나간 후였다. 오전의 햇살이 집안의 먼지까지 비춰줄 때 나는 느릿느릿 세수를 하고 밥을 먹었다. 그다음 잠시 멍하니 앉아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지만 그 무언가가 어떤 것인지 몰랐다. 무료한 시간을 달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벚꽃 피는 봄에 가고 싶었던 남산이 창밖으로 보였다. 나는 신발을 주섬주섬 주워 신고 가까운 남산을 향해 걸었다. 차비도 들지 않고 무엇보다 하염없이 시간 보내기에 좋았다. 국립극장 앞에서 케이블카가 있는 곳까지 산책하기 좋은 코스가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걷기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던 과거의 어느 막막한 날에도, 이따금 잠까지 줄어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지금도 꾸준히 나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 점이 마음에 든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있는 한 계속 할 수 있다는 것.

 

  영화배우 하정우가 아니라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었을 때, 화려한 배우의 삶 뒤로 끊임없이 걷고 고민하고 조금씩 나아가는 인간 하정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걷기 예찬을 읽으며 아무 것도 아닌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과거의 모습이 떠올랐다. 현재의 나는, 긴 인생을 두고 보았을 때 1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세상 모든 고통과 우울을 껴안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 기분은 무척 힘이 세서 누구나 기분에 좌지우지되기 쉽다. 29.p

 

-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다. 34.p

 

  그런 우울한 기분은 사람을 병들게 만든다. 20대 초중반의 아름다운 청춘이 잉여 인간처럼 자신의 존재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참 쉽다. 기분의 힘이 세다는 것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때 나는 열심히 걸었다. 걸으면서 산에 핀 꽃들도 많이 보았다. 아기였을 때, 우리는 걷기 위해 얼마나 혼신의 힘을 쏟았던가. 기억나지 않겠지만 온 힘을 다해 한발을 내딛었을 것이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앞을 향해 걸으면서 환희의 함성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걸으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고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9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다. 8키로가 조금 안 되는 배낭의 무게가 인생의 무게보다 더 무겁다는 걸 그때 느꼈다. 발의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바람에 오른쪽 팔에 깁스를 했을 때, “너는 다리를 다친 것이 아니고 팔을 다친 것이니 얼마든지 걸을 수 있어.” 라고 말해준 의사 덕분에 열심히 걸어서 목적지인 산티아고에 무사히 도착했다. 배낭과 한 몸이 되어 끝까지 걷겠다는 나의 결심은 운반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삶의 변수는 나의 생각을 조금씩 내려놓고 다른 방법과 타협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나는 조금 불편하지만 훨씬 가벼워진 몸으로 계속 걸어 나갔다. 걸어보니 알 수 있었다. 오롯이 두 발로 걸어간다는 것, 그것이 자유라는 것을.

 

그저 신이 내게 맡긴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도록 두 다리의 힘만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고민하고 머리를 굴려봤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렇게 기도한 이후로 이상하게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무슨 일에든지 더 담대해질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내게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무모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부지런하게 갈 뿐이다. 291.p

 

  여행이란, 두 다리를 움직여 어딘가로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걸을 수 있기에, 아니 혹여 걸을 수 없다 하더라도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한다면 지금이라도 우리는 훌훌 떠났다가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이니까. 걸으면서 시작되고 다시 걸어서 돌아올 수 있는 우리의 여행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3. 영원한 외출/ 마스다 미리

 

     

  내가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을 때, 아빠의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201812, 폐렴으로 입원하신 아빠는 담낭암 4기 판정을 받았다. 아빠는 항암치료를 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담당 의사도 80세가 넘은 어르신께 항암치료 보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을 추천했다. 자신의 할아버지도 그렇게 하셨다면서. 그때쯤 마스다 미리의 <영원한 외출>이 나왔다. 마음을 잡지 못해 힘겨워하는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누구나 부모의 죽음을 맞이한다. 명백한 사실이지만 애써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았던 가까운 미래. 누군가 모두 겪는 일이라고 말해주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깨달았다. 슬픔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구나. 저자가 담담하게 써내려간 글 속에서 나는 힘을 얻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은 본인에게나 누구에게나 처음이다.

앞으로 하루하루 체력이 떨어질 거란 건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25.p

 

  우리 가족은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밀도 깊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가족티를 맞춰 입고 활기찬 모습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주말이 되면 교외로 나가 외식을 했다. 한편으로 나는 1년 전부터 계획해 두었던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을 취소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빠는 내가 그렇게 하길 원하지 않으셨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여비까지 보태주었다. 자신의 병과 나의 여행은 무관한 것이며, 삶의 계획은 각자 다른 것이라고. 다행히 아빠는 내가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감사하다.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나를 독려해 주신 것과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신 것. 그리고 나 혼자 걸어갈 수 있도록 80여 년 동안 내 인생의 여행길에 동행자가 되어 주었던 모든 것이 말이다.

 

사람은 먹으면 힘이 나는 것 같다.

그 핑계로 나는 아버지에게 다가온 죽음을 앞에 두고 일을 하고, 가을옷과 구두를 사고, 카페에서 케이크를 먹으면서 책을 읽었다.

퇴원 후 아버지의 취미는 오로지 식(). 다음 식사 때는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이 관심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저녁 식사 후, 내일 아침은 어묵을 먹고 싶어. 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우리는 어묵 재료로 어떤 게 좋을까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두부, 엄마는 곤약, 나는 무, 평화로운 한때였다. 아버지는 내일 아침 세븐일레븐에 어묵을 사러 가겠다고 선언하고, 침실로 사라졌다. 39.p

 

  어느 날, TV를 보시던 아빠는 푸른바다를 보고 저기가 어디냐고 물으셨다. 화면 속에는 남해바다가 사파이어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아빠와의 여행을 준비했다. 아빠와 함께 하는 마지막 여행.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어느 한 때의 봄맞이 여행처럼 하동의 매화를 구경하고, 섬진강 재첩국을 맛있게 먹으며 남해로 내려가 23일을 보냈다.

  이제 막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한 매화나무 아래서 엄마와 나란히 서서 웃고 계시는 아빠사진을 보면, 인간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게 된다. 처음 사랑했을 때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웃음을 잃지 않을 것, 자연의 변화를 함께 느끼며 떠나간 이를 그리워할 수 있도록 주위 사람들에게 곁을 내어줄 것.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연습하기 위해 이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온 존재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제작해도 아무도 볼 수 없는 작품.

그 작품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존재를 아는 데 의미가 있다.

 

가지 못해도 좋다. 보이지 않아도 좋다. 아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97.p

 

소중한 사람을 이 세상에서 잃었다고 해도 있었던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 괜찮다. 그것이 흰나비를 대신하는 나의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힌트는 바깥에, 사람 수만큼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98.p

 

  비록 핸드폰 영상 통화와 메시지로 보낸 동영상뿐이었지만, 아빠는 내가 바로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있을 때 함께 계셨고, 포르투의 동루이스 다리에서 맞았던 바람 소리도 함께 들었다. 지금은 곁에서 함께 할 수 없지만, 나는 아빠가 내가 가보지 못한 세상을 여행 중이라고 믿는다. 병들고 나약한 노인이 아니라 걱정 없이 상쾌하고 가뿐한 여행자가 되어서 말이다. 먼 훗날 나도 그 여행에 동참하게 되겠지.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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