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미우라 아야코 지음, 김윤옥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199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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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 이면에는 가진 자 밑에 눌려 착취당하고 신음하는 약한 자들의 한숨의 역사가 공존한다. 또한 이처럼 부당하게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던 풀뿌리 인생들의 소외된 인권과 그들 삶의 최소한의 보장을 위해 소리를 높이다가 거대한 권력의 폭력 앞에 무참히 짓밟힌 생명들 역시 부지기수이다. 우리 민족 역시 그러한 암울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제 억압하에서 민족이 당하였던 착취와 눈물. 해방 후 일제는 물러갔지만 가진 자들의 여전한 억압과 착취 아래 이에 항거하다 얼마나 많은 청춘들이 한 송이 꽃잎처럼 스러져 갔던가! 피로 붉게 물들인 5월의 광주, 불의에 맞서 학업을 뒤로한 채 투사가 되어 자욱한 최루가스 가운데서 이상을 키워가던 지난 80년대의 끈끈한 생명력. 아마도 우리 사회가 조금씩이라도 따뜻하고 살만한 세상으로 진보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희생들이 사회의 거름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우라 아야코의 “어머니”라는 소설은 그와 같은 실존 인물(고바야시 다키지)의 삶과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평등한 사회를 꿈꾸며 활동하였던 다키지라는 실존 인물. 그의 어머니가 다키지에 대해 회상하는 진술을 기본 틀로 작가는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가난한 시절, 공권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경찰 아저씨의 따뜻한 인간미를 느끼고 자랐던 어머니는 공권력이라는 것이 백성을 위한 도구라는 막연한 이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세상의 불평등을 보았으며,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있다. 그래서 그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소설을 쓴다. 그의 소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 평등의 세상을 지향하게 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가진 자들의 마수에 걸려 결국 경찰의 고문 앞에 목숨을 잃게 된다.

사랑하는 아들을 공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어머니의 슬픔을 저자는 어머니의 독백을 통해 잔잔하게 전개해 간다. 특히 세상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각의 변화는 아마도 저자가 독자들에게 말하는 외침이 아닌가 싶다. 처음의 어머니는 기존의 세상에 대한 반성과 극복보다는 그에 대한 순응의 자세를 보인다. 이러한 것은 시작부분에 언급되는 어머니의 어린 시절 고향에서 느꼈던 경찰 아저씨의 따뜻함에 대한 묘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어쩜, 공권력의 진정한 이상을 보여주는 저자의 의도이리라.

주어진 환경에서 순응하며 그 틀거리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던 어머니의 시각은 자신의 아들의 죽음 앞에서 조금씩 변화한다. “나는 아무래도 모를 일이 있었소. 다키지가 아무리 극악한 놈이라 하더라도 체포하자마자 몽둥이로 때리고, 송곳으로 찌르고, 제멋대로 찔러서 죽여버려도 되는 건지요. 경찰은 재판을 하지 않고 즉각 죽여도 되는 법인지요. 이것을 알 수가 없소. 이런 경우에 경찰이 한 일은 살인이 되지 않는지요. 나는 법률이라는 것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경찰이 나쁘다 싶으면 누구든 죄다 죽여도 된다고는 아무래도 생각이 되지 않거든요.” 이러한 어머니의 눈을 비춰진 공권력의 모순 고발은 비록 작고 약한 푸념에 그칠 듯 보이지만 독자들의 가슴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힘을 가진다. 아마도 ‘어머니’라는 존재의 이미지를 통해 잔잔한 고발이 결코 잔잔함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의 가슴을 후벼놓는 효과를 갖는 듯하다.

권력의 희생양이 된 맑은 영혼의 소유자 다키지의 어머니는 오늘도 권력을 놓치고 싶지 않아 다른 생명들을 억압하는 독재자들, 그리고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공권력의 횡포에 대해 잔잔하게 대항한다. 혹, 아직도 우리 사회가 이러한 우리네 어머니의 절규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회는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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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
장지오노 지음, 김경온 옮김 / 두레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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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란 무엇인가? 어떤 특별한 힘을 가진 사람의 의지에 의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소경이 보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15층 건물에서 뛰어내렸는데 멀쩡히 살아나는 것일까? 물론 이러한 것들을 기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잔잔한 전율을 느끼게 하는 기적이 여기 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주인공 ‘부피에’의 말없는 노력으로 죽음의 공간이 생명의 영역으로 바뀌어 감을 그리고 있다. 이 책은 오늘날처럼 자신의 이익에만 매달리고 다른 생명에는 무관심한 문명의 위기에 진정한 문명의 영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부피에’는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려 메마른 광야에서 매일매일 하나 하나의 씨앗을 심어감으로 메마른 땅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한 사람의 말없는 행동함으로 먼지만 날리던 골짜기에선 다시 맑은 물이 흐르고, 말라버린 샘에선 생수가 솟아난다. 또한 생기를 느낄 수 없는 황량한 흙먼지만이 몰아치던 광야가 신선하고 싱그러움이 넘쳐나는 동산으로 변해간다.

그로 인해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며 미래가 없던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의 사르러져 가던 마을은 생기가 넘치고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미래의 희망을 공유하고 나누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바뀌어간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단 한사람의 말없는 행동함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주인공 ‘부피에’의 이런 모든 행동함은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닌 이 땅의 생명력 회복을 지향하기에 그의 인격됨은 더욱 두드러진다. 철저한 이타적인 사랑과 행동함으로 인한 생명의 회복. 이것이 바로 진정한 기적이 아닐까?

기적이 잊혀져 가는 문명의 시기이기에, 또한 타인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안위함만을 목표하는 현대사회이기에, 이러한 기적을 그리고 있는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읽을 때마다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이 책은 나태해져 가는 나를 반성하게 하며, 움켜쥐기 위해 바둥거리는 우리네 삶을 부끄럽게 한다. 아울러 작은 힘이나마 이 땅의 회복을 위해 행동하기를 결단케 한다.

비록 짧은 글이지만 이 글은 읽는 사람들에게 긴 감동과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끝없는 생명력을 가진 글이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생명의 나무를 심어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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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뼈도 살아날 수 있다
전병욱 지음 / 나침반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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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적은 교회성장의 대표적 선두주자로 알려지고 있는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많은 면을 깨우치고 있음이 사실이다. 먼저, 종교지도자들이 어떤 자세로 자신의 목회를 감당해야 할 것인가를 반성케 한다. 또한 지도자로서의 열정을 회복하도록 자극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런 면에 있어 저자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많으며, 본서가 공헌하는 바는 크다고 본다.

하지만, 본서가 가지고 있는 단점 역시 그 이상으로 많은 듯 하다.

우선, 그의 확언적인 문체를 들 수 있다. 자신과 신학적 노선이 다른 목회자들이나, 자신과 같은 방법이 아닌 목회자들을 저주받을 자라고까지 확언하는 것은 저자의 미숙함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본 서평을 쓰는 본인이나 또는 저자와는 다른 신학적 노선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 역시 저자를 향해 그가 했던 질책들과 용어를 사용해서 말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저자는 '성장'이란 단어보다는 '부흥'이란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본인은 '부흥'이란 말보다는 오히려 '성장'이란 단어사용이 옳을 듯 하다. 부흥이란 저자가 말하듯이 어떤 조직이나 구성원 수의 비약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자세를 가리키는 것이다. 저자는 '초대교회는 성장한 것이 아니라 부흥했다'고 말하는데, 사실 초대교회는 부흥했기에 성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 초대교회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섰기에 외적으로 성장했던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저자의 주위에 있었던 그러한 성장이 부흥 없이 이루어질리 없겠지만, 이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또한 저자는 '십자가는 생명의 문제입니다(85쪽)'라고 말하며, 뒤이어 잘못된 축복의 문제를 다루며 이를 기복이라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옳다. 하지만, 십자가가 생명인 것은 그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의 삶이 전재되어져야 함이 진리이다. 예수의 현실적인 삶이 없이 그저 막연한 복음(십자가)으로 인한 구원만 강조하는 저자의 메시지 역시 하나의 기복에 그침을 저자는 놓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태도는 인간의 옷을 입고 우리 곁에 오신 예수를 믿는 자세라기보다는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다시 말해 바울이 이해한 예수를 믿는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조금 진보적인 신학자들이나 똑똑하다는 젊은 목회자들은......'실천'을 강조한다. '현실'을 강조한다. '프락시스 없는 도그마는 의미 없다'고 부르짖는다. 성경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무식의 소치다! 체험 없는 '책상 신학'의 더러운 산물이다. 로마서, 갈라디어서......를 보라. 그 강조점이 어떠한가?......교리에 대한 언급이 있고 난 후에, 실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실천을 강조하는 최근의 신학은 '바리새 신학'이다. 변형된 위선만을 조장하는 위험한 신학이다(125쪽).'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야말로 성경을 많이 모르는 듯 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교리를 주장하신 적도 없고, 그분은 교리를 설명하신 적도 없다. 그분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것은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 그리고 세리와 창녀들의 친구가 되셨으며, 병든 자들을 고쳐주신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예수야말로 '책상신학'의 선두주자이며 '바리새 신학'을 한 사람이며 변형된 위선만을 조장하는 위험한 자가 되는 것이다.

본서의 저자는 아마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는 바울의 신학과 예수가 몸으로 보여준 진리 자체를 혼동하고 있는 듯 하다. 바울의 신학은 그가 처한 선교적 상황에서 나온 것이며, 그가 가진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인 것이다. 저자는 이를 마치 예수의 진리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무식의 소치를 행하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물론, 이러한 저자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주는 목회사역에서의 열정은 본받을만하다. 하지만, 잘못된 열정이 커다란 비극을 잉태함을 우리는 역사에서 종종 보았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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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보는 길 - 정채봉 에세이
정채봉 지음 / 샘터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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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런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속에서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지만, 친한 느낌을 주는 친구와 함께 있었는데, 그 친구가 자꾸 나를 조롱하는 것이었다. 분을 이기지 못한 난 꿈속에서 그 친구를 실컷 때려주었다. 잠을 자며 꿈꾸고 있는 내가 시원함을 만끽할 정도로 많이 때려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 다음에 나에게 밀려오는 것은 커다란 후회였다. 잠시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친구를 용서하기는커녕 그 친구를 실컷 두들겨주었던 나의 못난 모습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울면 울수록 나의 못난 모습이 더욱 두드러져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울다 지쳐 잠에서 깨었는데, 꿈속에서 뿐이 아니라 실제로도 울고 있던 나를 발견하게 된다. 꿈속에서 얼마나 울었던지 잠이 깬 후에도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던 내 모습. 그 울음만으로도 어린 시절로 돌아가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비록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 동안 내가 잃어버렸던, 아니 그래서 다시 되찾아야 할 모습을 알려주고 있는 듯한 경험이었다.

정채봉님의 글들은 내가 꾸었던 꿈속의 반성처럼 자신을 반성케 하게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글은 친근하고 편안한 언어로 다가오지만 커다란 힘으로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의 글들은 일상의 삶이 느껴지면서도 일상을 벗어난 그래서 마치 꿈을 쫓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그의 글들이 일상을 벗어난 느낌을 주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실제 그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하기에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러한 삶이 우리네의 삶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의 글들은 커다란 변화를 요구하지 않고 인간으로써의 최소한의 아름다움을 회복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그러한 아름다움의 근원을 상당수 동심의 세상으로 풀어간다. 우리의 몸이나 정신, 그리고 이성이 성장하고 우리의 생활수준이 높아짐에도 오히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어린이의 마음 바로 동심의 세상, 즉 인간다움의 회복임을 그는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최소한의 요구이지만 이 요구는 결국 온전한 인간다움의 회복을 뜻하기에 커다란 결단과 변화를 필요로 한다.

결국 그의 글들을 통해 최소한의 것마저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며, 몸뚱이는 커져 버렸지만, 인간다움은 작아져 버린 나를 반성케 한다.

편안하고 따뜻한 언어로 묘사하는 그 작은 삶의 모습들이 결국 행하기에 소원한 듯한 진리에의 삶임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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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 하느님을 만나다
박재순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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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속의 욥기는 성서뿐만이 아니라, 여타문학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문학작품이라는 평들이 많이 있다. 그렇기에 욥에 대한 이야기는 비단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그 줄거리가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상 욥기의 온전한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드물다. 단지 알고 있는 내용이란, 욥기 전체 42장 중에서 1-2장과 마지막 42장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욥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욥기는 단순히 쉬운 이야기가 아닌 상당히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본서는 이처럼, 종교를 떠나서 사랑 받고 있으며, 또한 그럼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욥기에 대한 묵상이다. 지은이인 박재순 목사는 욥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생존현실로부터 풀어간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아픔과 한숨이 바로 욥기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이스라엘의 아픔이 배어있는 욥기가 어렵게 느껴지고 공감이 되지 않는 이유를 바로 독자들의 경험 부재에 있다고 보기에 고난 당하였던 지은이 자신의 이야기와 주위의 많은 한숨과 눈물의 이야기가 욥기 묵상에 커다란 자료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그토록 엄청난 고난가운데서 처절하게 절규하고 하나님께 투정하던 욥이 결국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욥의 그토록 아픈 현실 때문임을 말하며, 아울러 욥을 위로하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왔지만, 욥을 위로하기보다는 오히려 욥을 정죄하는 친구들의 모습은 바로 그들에게 생존현실의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은 그들의 이론이 오히려 위로 받을 자를 위로치 못하고 더욱 아프게 하는 무기가 됨을 보여준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들, 특히 종교인들이 성경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또한 각자 나름대로의 많은 교리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 지식과 교리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사랑의 교리라 하더라도 이것이 실제로는 사람을 아프게 하고 정죄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저자는 욥기 해석에 있어서 문맥을 따라 살피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내용의 잘잘못은 그 내용을 말하는 자의 마음에 있다는 접근을 한다. 예를 들면, 우리네 식당 곳곳에 부적처럼 걸려있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성경구절은 실제로는 욥을 정죄하는 친구 중 하나가 한 말이다. 그렇기에 이 말은 근본적으로 옳은 의도로 씌여지지 않은 욥기 전체가 옳지 않다고 보는 사상 중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그렇기에 실제로 식당들 곳곳에 걸려 있는 그 구절은 아주 잘못된 접근이다). 하지만, 저자의 접근대로라면, 같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어떤 의도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앞 뒤 문맥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대포 정신으로 사용하고 있는 위의 구절의 사용이 꼭 잘못되었다고 만은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하지만 그럼에도 이 구절 사용이 잘못된 것은 이 구절 사용이 바로 자신들만의 부귀를 위한 부적으로 사용된다는 데 있다).

단지, 본서의 아쉬운 점은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위주로 성경을 묵상하기에 욥기 본 저자가 의도하는 메시지를 간혹 간과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본서가 욥기에 대한 신학적 해석작업이 아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묵상이기 때문에 그러한 접근방법이 큰 단점은 아니리라 여겨진다.

본서는 분명 삶의 무게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밝은 위안을 줄 수 있는 글임에 분명하다. 또한 이런 위안이 공허한 울림이 아닌 공감의 위안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위안이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형성된 어떤 '판'에 의하여 날마다 어두운 곳에서 신음하며 좌절과 절망 가운데에서 허덕이는 희생자들이 더 이상 없는 사회가 이 땅에 건설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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