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는 꽃이 피네 - 열두 개의 달 시화집 四月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윤동주 외 지음, 파울 클레 그림 / 저녁달고양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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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말없는 시이고, 시는 말하는 그림이다.”

 

시화집 뒤표지에 적혀 있는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시리즈>를 설명해주는 문장이다. 시리즈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시리즈는 1년 열두 달 전 12권으로 기획된 시화집이다. 시와 그림이 함께 실려 있다. 1365, 하루에 시 한편 씩 묵상할 수 있도록 365+1편의 시와 500여 점의 명화가 함께 실려 있다.

 

열두 달 가운데 봄이 약동하는 4월 시화집의 제목은 산에는 꽃이 피네이다. 4월의 명화는 파울 클레라는 작가의 작품들이 실려 있다. 시는 윤동주 시인을 비롯한 19명의 시인들 시가 실려 있다.

 

4월이란 시기로 인해 봄을 노래하는 시들이 대부분이다. 시화집은 한 손에 쏙 들어갈 만큼 자그마한 크기여서 휴대하기에 좋다. 언제나 가방 속에 넣고 다니며, 하루에 한 편씩 시를 음미하고, 그림을 감상하며, 그림이 보여주는 시를 들을 수 있고, 시가 말하는 그림을 볼 수 있다.

 

시집에 실린 시들을 묵상하는 가운데, 유독 끌리는 시가 있다. 정지용 시인의 <해바라기 씨> 란 시다. 옮겨본다.

 

해바라기 씨를 심자. / 담모통이 참새 눈 숨기고 / 해바라기 씨를 심자. //

누나가 손으로 다지고 나면 / 바둑이가 앞발로 다지고 / 괭이가 꼬리로 다진다. //

우리가 눈감고 한밤 자고 나면 / 이실이 나려와 가치 자고 가고, //

우리가 이웃에 간 동안에 / 해ㅅ빛이 입마추고 가고, //

해바라기는 첫시약시 인데 / 사흘이 지나도 부끄러워 / 고개를 아니 든다. //

가만히 엿보러 왔다가 / 소리를 깩! 지르고 간놈이 - /

오오, 사철나무 잎에 숨은 / 청개고리 고놈 이다.

정지용, <해바라기 씨> 전문

 

오늘 우리의 맞춤법과 다른 표현들이 눈에 많이 띤다. 그래서인지 더 예스러운 시간의 힘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얼마 전 텃밭에 상추와 결명자 씨앗을 조금 심었다. 상추는 어느덧 제법 자라 속아내 줘야 할 지경이지만, 결명자 요 녀석들은 한 달이 지나는데 싹을 틔울 기미가 없다. 아무래도 조금 일찍 심은 것 아닌가 걱정하며, 언제나 싹을 틔울까 들여다보곤 하지만, 시인이 노래한 해바라기 시처럼 부끄러움을 타는 걸까? 감감 무소식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기대하는 바가 있고, 꿈꾸는 것들이 있어, 그 일을 위해 씨앗을 뿌리지만, 싹이 트지 않고 열매도 멀기만 하다. 그럼에도 시인이 노래한 시처럼, 여전히 심고, 다지며, 밤새 이실도 내리고, 해ㅅ빛도 입 맞추길 바라며, 기다리면 어느 샌가 싹이 솟아나 금세 꽃을 피우지 않을까?(해바라기가 싹이 나 자라는 모습을 보면, 하루가 다르게 크는 걸 느낄 수 있다. 우리 집 조그마한 텃밭 한쪽엔 해바라기 씨앗에서 자란 싹들이 제법 실하게 자라고 있다.) 4: 산에는 꽃이 피네를 펼치며, 우리 삶에도 언제나 예쁜 꽃들이 가득 피어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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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장난감 - 이시카와 다쿠보쿠 단카집
이시카와 다쿠보쿠 지음, 엄인경 옮김 / 필요한책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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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표적 전통시인 단카에 대해선 그런 것이 있다는 것만 알뿐 실제 접한 적은 없었다. 그러던 차 단카의 거장이라는 이시카와 다쿠보쿠 시인의 단카집 슬픈 장난감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집어 들었다.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이미 100여 년이 지난 일본 단카 문학계의 거장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마지막 단카집이다.

 

단카집 제목이 슬픈 장난감이다. 장난감이란 단카가 시인에게는 유일하게 즐길 대상이었음을 의미할 게다. 그런데, ‘슬픈이란 단어가 붙어 있음이 시인의 삶이 어땠을 지를 잘 보여준다. 큰 누나도, 엄마도, 본인도, 그리고 사후 아내 역시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삶이었으니.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을 짓누르는 슬픔의 상황, 슬픔의 원인, 그것들을 시인은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 슬픔의 못자리에서 시어들을 끌어올린다. 마치 시인이 단카 지망생에게 한 조언처럼 말이다.

 

나는 생각한다. 만약 아무개 군으로 하여금 단 하나, 예를 들어 스스로 자신을 가련하다고 한 말만이라도, 그것이 얼마나 또한 어떻게 가련한지를 정면으로 마주하여 생각하고, 그 다음 거기에서 확고히 움직일 수 없는 숨은 어떤 사실을 승인할 때 비로소 그 아무개 군의 단카는 저절로 생기 있는 인간의 단카가 될 것이라고.(141)

 

책은 다쿠보쿠가 권면하듯 자신의 슬픔의 삶에 오롯이 마주하고 있다. 특히 병상에서의 슬픔을 노래한 내용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아들의 쾌유를 위해 차를 끊고 기도하는 어머니에 대한 노래가 애달프다(마치 기독교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듯 기분 좋게 하는 차를 끊고 기도하는 모습이다. 그 어머니 역시 다쿠보쿠보다 1년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같은 폐결핵으로.).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시인을 더욱 힘겹게 했으리라.

 

단카에 대해 품고 있는 애정, 하지만, 삶은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고. 이런 한계적 삶으로 인한 슬픔. 게다가 떨굴 수 없는 가난으로 인한 슬픔(시인의 마지막은 영양실조로 인한 폐결핵의 악화라고 한다. 결국 가난이 죽음의 원인이었던 것.). 이런 다양한 슬픔들이 승화된 시어들을 단카집을 통해 만나게 된다.

 

단카란 장르가 우리에게 익숙할 순 없다. 특히, 단카는 일본어 그대로 접해야 그 맛이 제대로 느낄 테니까. 책엔 그렇기에 일본어가 그대로 함께 실려 있다. 하지만, 일본어에 까막눈인 나에겐 아무 소용이 없다. 그저 번역된 우리말로 접하며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처음엔 이게 뭐지? 싶었지만, 읽어나가다 보니 단카가 어떤 느낌인지는 어렴풋 다가온다. 아니, 어쩌면 단카가 어떤 느낌인지보다는 그 안에 담겨진 시인의 마음이 느껴진 것이 맞을지 모르겠다.

 

좌절한 천재라는 수식어,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마지막 나날들에서 길어 올린 단카. 그 마지막 단카집의 마지막 단카는 미완으로 끝나고 있다. “큰 보폭으로 가장자리를 걸으니미처 세 줄(전통적 단카는 5·7·5·7·7의 운율을 지닌 531음절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시인의 단카는 모두 3행으로 구성되어 있다.)을 채우지 못하고 한 줄로 마친 마지막 단카.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더욱 극적이고 운명적인 표현이 아닐까? 26년의 세월을 살다간 좌절한 천재이시카와 다쿠보쿠가 남긴 문학의 걸음이 어쩌면 큰 보폭임에도 가장자리에 머문 건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단카집을 처음으로 만났음에 만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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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살아남았지 -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선집 에프 클래식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이옥용 옮김 / F(에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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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정권에 의해 모든 저서가 불태워졌다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을 만났다. , 살아남았지란 제목의 시선집이다. 이 시집에는 그의 초창기 작품부터 시작하여, 중기, 후기의 모든 작품들이 망라되어 있다.

 

무엇보다 나치 정권에 의해 그가 집필한 모든 책들이 불태워졌다니, 어떤 내용이기에 그럴까 하는 궁금증이 먼저 생겼다. 시인의 시는 어렵지 않다. 어떤 시들은 마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은 느낌도 갖게 한다. 솔직히 어떤 시는 이거, 시라고 말해도 돼?’싶을 정도로 쉬운 것들도 있다(어려워야 시인 줄 아는 시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다.). 그 이유를 시집 뒤편에 실린 역자 해설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시인은 자신의 책상에서 보이는 창가에 언제나 조그만 나무 당나귀를 올려놓았다고 한다. 그 당나귀의 목에는 나도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문학은 특정층만의 고유물이 아닌 문학 작품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게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자 시인(극작가로 더욱 유명하지만, 시집을 만났으니 시인이라 부르자.)이 더욱 멋져 보인다.

 

시인의 시를 접하며, 지성인이 역사 앞에 어떤 자세로 서야 하는지를 생각해본다. 우리민족 역시 수많은 질고의 역사를 겪으며, 소위 지성인이라는 문학인들이 일제에 동조하는 글을 쓰고, 독제 정권을 찬양하는 글을 쓰는 과오를 범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물론, 끝내 역사 앞에 바로 선 지성인의 모습을 지켜낸 이들 역시 많지만 말이다. 시인은 끝내 참된 지성인의 모습으로 역사 앞에 바로 섰던 이다. 그런 이였기에 그의 시는 더욱 힘이 있지 않나 싶다.

 

가장 훌륭한 작가 중 하나인 어떤 추방된 작가는

태워 버린 책들의 목록을 살펴보다가

자신의 책들이 누락된 사실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불같이 화가 난 그는 후닥닥 책상으로 달려가 권력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제 것도 불태우세요! 그는 단숨에 써내려갔다. 제 것도 태워요!

그렇게 해 주세요! 제 것들을 남겨 놓지 마세요!

< 분서(焚書) > 일부

 

나치 정권에서 홍보되어지고 찬양받는 시란 무엇일까? 우리 역사 가운데 독재정권에서 인정받고 승승장구했던 시를 우린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분서 목록에 자신의 책이 누락된 사실을 알고 화들짝 놀랄 만한 깨어있는 양심과 지성을 가진 시인이 과연 지금 얼마나 있을까?

 

시인의 시들은 많은 경우 어둡고 암울하며, 때론 허무적이기도 하고, 때론 자학적인 느낌을 갖게도 한다. 때론 비판적이고, 때론 풍자적이기도 하다. 이런 어두운 느낌은 시인이 살아낸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되지 않을까 싶다. 어두운 시대에 거짓 희망, 거짓 밝음만을 양산해 내지 않은 시인의 선택이 또한 멋스럽다.

 

많은 독자들에게 존경받던 한 시인의 몰락을 지켜보며 실망과 분노를 느껴야 하는 현 시점이기에 더욱 베르톨트 브레히트 이 시인의 시들이 힘이 있게 느껴진다.

 

좋은 시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 <어린이 십자군> 이란 시가 진한 여운을 남긴다. 전쟁으로 인해 가장 먼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영원한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들, 전쟁은 결국 이들만을 남겨 놓는다. 그리고 그들은 점점 하나로 뭉쳐 자신들만의 세상을 찾아 길을 떠난다. 이들에겐 민족의 장벽, 사상의 장벽, 종교의 장벽도 없다. 나치당원의 아들과 유대인의 아들이 함께 어우러져 길을 걷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정과 삶, 그리고 미래를 파괴해버린 전쟁이란 괴물을 떠나 평화로운 세상을 찾아 떠난다. 이들에겐 여전히 그 평화로운 세상, 이상적 공간은 멀기만 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끝내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희망을 품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는 그 여정 자체가 이미 이상적인 상태가 아닐까? 극한 결핍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부끄러운 역사 중 하나인 십자군 전쟁에서의 어린이 십자군을 풍자한 이들의 걸음이야말로 진정한 새 하늘 새 땅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 걸음이야말로 시인이 역사 앞에 바라는 소망이었으리라 생각하자 어쩐지 가슴이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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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멀리까지는 가지 말아라, 사랑아 - 나태주 용혜원 이정하 시인의 시와 짧은 글
나태주.용혜원.이정하 지음 / 미래타임즈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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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요즘을 시가 사라진 시대라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오히려 더 많은 시가 양산되고 넘쳐나는 시대는 아닐까? 누구든 자작시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고, sns를 통해 타인에게 쉽게 오픈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누구나 시인이 되어버린 시대임에도, 왜 시가 사라졌다는 말을 할까? 아니 정확히는 시가 외면 받는 시대, 시집이 팔리지 않는 시대라고 말해야 정확하지 않을까? 그럼, 왜 시집이 팔리지 않을까? 대학 시절, 문학청년을 꿈꾸지 않는다 할지라도 시집 한 권쯤 책가방에 넣고 다니던 우리가 어쩌다 시집 한권 사는 것마저 망설이게 되었을까?

 

그건, 시인들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지 않을까? 시란 시인의 손을 떠나 독자에게 가면 독자의 것이 되어 마땅하건만 독자는 당초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할 수 없는, 외계어와 다름없는 시어 때문은 아닐까? 그런 시를 접할 때마다 과연 시인은 자신이 쓴 시를 이해하긴 할까? 하는 궁금증이 들 때도 있다(물론, 나의 무지 역시 탓하게 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너무 가벼워진 시 역시 시를 외면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의 공감을 이끌어내긴 하지만, 어쩐지 시인의 삶의 무게나 진실, 삶의 고민이나 시대적 고민이 느껴지지 않는 가벼움이 가득한 시가 각광받는 것 역시 좋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리 풍요로운 시대라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의 영혼은 궁핍하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여전히 시가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우리의 영혼을 위로해줄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과연 시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시에 대한 정의는 정의를 내린 사람의 숫자만큼 다양하다. 그뿐 아니라 내가 시의 정의를 내릴 수준도 아니다. 그럼, 질문을 바꿔본다. 좋은 시란 무엇인가? 잠깐, 이것 역시 내가 정의 내릴 게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시란 무엇인가? 이 질문이면 적당하겠다. 내가 좋아하는 시란 무엇일까?

 

그건, 운율 속에 담긴 절제된 언어를 통해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정신을 깨어나게 하는 시어들이다. 무엇보다 시는 마음을 어루만지는 힘이 있어야 좋다. 무슨 소리인지 당초 알 수 없는, 그래서 전공하지 않은 다른 분야의 박사학위 논문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는 수수께끼 암호문은 사양한다. 쉽고 가벼운 듯싶지만 그 안에 시인의 삶의 자리의 무게가 담겨 있고, 시인의 정신과 시인의 진실의 무게가 녹아 있는 언어. 그러면서도 때론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주며, 때론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들고, 삶을 꾸짖는 힘도 있는 언어라면 좋겠다.

 

서두가 길어졌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시집, 너무 멀리까지는 가지 말아라, 사랑아는 좋아할 수밖에 없고, 좋은 시집이라 꼽을 수밖에 없는 시집이다. 이 시집은 나태주, 용혜원, 이정하, 이렇게 세 시인의 합작품이다. 시인의 이름만 들어도, 이 시대의 대표적 감성시인들을 모아놨구나 싶다. 그런 시인들이 자신의 시 가운데 선별한 시가 시집에 담겨 있다. 그러니, 시집 속의 시들은 하나같이 마음을 만져준다. 시집 속의 시를 자그맣게 읊조릴 때, 그 소리는 그저 소멸되어 버리지 않고 내 가슴과 정신을 살며시 만져준다.

 

시인들이 직접 선별한 시뿐 아니라, 이 시집의 또 하나의 장점은 시인이 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를 쓰게 된 동기나 배경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자신의 손을 떠났던 시가 독자들을 통해 어떻게 재탄생되었는지를 말하기도 한다. 또는 시 내용과 연관되는 짧은 에세이 글이 함께 하기도 한다.

 

이처럼 시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은 이 시집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시를 만나는 시간 마음이 맑아지고, 말랑말랑해지며, 뜨거워진다. 때론 결단의 시간을 갖게도 되고. 언제나 곁에 두고 싶은 좋은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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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복음 현대시 기획선 5
김은상 지음 / 한국문연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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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의 제목이 유다복음이다. 기독교인의 눈으로 본다면 다소 불경스럽다. 과연 어떤 노래를 들려줄까?

 

시집은 어렵다. 아니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나에게 어려웠다. 어느 시집처럼 시인의 암호문으로 가득하여 어렵다기보다는 시인의 정서를 오롯이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시집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어둡다. 암울함, 우울, 슬픔, 막막함, 염세적, 그리고 불온(? 기독교인의 입장에선 이 단어가 가장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등의 단어로 시집의 분위기를 표현할 수 있겠다. 이는 시인의 삶의 자리가 그랬기 때문이다. 가난이 그의 첫 번째 신이었다는 해설을 읽고, 그랬구나 싶다.

 

삶의 버거움이 오롯이 시들에 가득하다. 단지, 버거움이 전부인 듯 느껴져 개인적으로는 힘겨웠다. 그래서 어려웠다. 물론, “구석에서 꽃처럼 앉아 울어본 사람은 안다.// 희망이나 행복, 사랑 같은 말들이 얼마나 연약하게 화들짝 지는지를.//”(<추문> 일부) 라는 시인의 시구처럼, 희망, 행복, 사랑 이란 단어들이 어떻게 거짓 사용되어지고 악용되어져 왔는지를 우린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실한 희망, 행복, 사랑 이란 단어의 접근 역시 필요함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조금은 시인의 시들이 가슴을 무겁게만 하여 힘겨웠다.

 

시인의 시를 접하며, 시인은 성경에 상당한 조예가 있음을 느꼈다. 혹시?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아니나 다를까, 해설을 읽으며, 시인이 신학을 공부했음을 알게 되었다. 신학을 공부한 만큼 시인은 성경에 능통하다. 이런 능통함은 성경의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 냈다. 이는 후반부에 실린 긴 분량의 <유다복음>에서 두드러진다.

 

물론, 이 부분이야말로 어쩌면 독실한 기독교인들에게는 불편한 부분이며, 불온한 세력으로 느껴질 게다. 나 역시 조금은 불편함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유다에 대한 희생적 접근은 상당히 고개가 끄덕여진다. 단순히 예수의 십자가 완성을 위해 유다가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접근에 그치지 않기에 더욱 그랬다. 이런 접근의 맹점은 유다의 탐욕적 배신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십자가 완성을 위해 누군가 유다가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탐욕에 넘어져 스스로 그 역할을 감당한 유다에게 돌아갈 돌팔매는 정당하기에.

 

하지만, 시인은 단순히 십자가 완성을 위한 유다의 역할이 아닌, 예수의 십자가 완성을 위해 스스로를 배신자의 낙인에 기꺼이 내어놓은 희생이라 해석한 점은 상당히 흥미로운 해석이었다(물론, 이 역시 누군가에겐 불온함의 극치일 수 있겠지만.).

 

아무튼 불경스럽다는 접근만 하진 말자. 복음이 변주의 대상, 풍자와 해학의 대상이 되고 있다면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먼저 생각하자. 이미 힘을 잃어버린 종교, 아니 힘은 더 많이 가졌지만, 본질을 상실한 종교의 모습, 알맹이는 사라지고 겉껍질만 화려한 종교의 모습, 정권과 자본주의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종교를 발견하고, 반성하는 것이 먼저 되어야 할 테니 말이다.

 

아무튼 시인의 다음 시집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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