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 외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20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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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이제 《아르센 뤼팽 전집》의 마지막 책 20권이다. 이 번 책에서는 하나의 장편과 하나의 희곡을 싣고 있다. 장편은 「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이고, 희곡은 「아르센 뤼팽의 어떤 모험」이란 제목이다. 먼저, 희곡을 언급한다면, 아르센 뤼팽 전집 20권에 실린 수많은 장편과 단편들 가운데 유일한 희곡이란 점이 독특하다. 아울러, 그 내용 역시 희곡이기에 하나의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내용들이기에 소설과는 또 다른 맛을 전해 준다. 희곡으로도 이처럼 추리소설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아니, 소설보다 더 추리소설의 맛을 잘 살려내고 있다.)이 특별하며, 희곡이기에 그럴까? 더 유머러스하다.

 

실질적인 뤼팽의 마지막 이야기인 「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는 한 여인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퍼트리샤 존스턴이란 여인, 신문사 기자이자, 신문사 사장의 비서였던 퍼트리샤는 어느 날 자신의 상관인 맥 앨러미에게서 프러포즈와 함께 봉인된 서류봉투를 받게 된다. 정해진 날짜 전엔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다짐을 받은 서류.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퍼트리샤는 사장의 미행하게 되고, 사장이 어떤 모임을 하게 됨을 목격하고, 얼마 후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이 이야기는 한 마디로 뤼팽의 엄청난 재산을 탈취하려는 모임과 뤼팽 간의 대결을 그려내고 있다. 선량한 인사들과 함께 무시무시한 범죄인들이 망라해 있는 집단인 마피아와 뤼팽 간의 대결. 그 대결에서 계속 밀리는 느낌을 갖게 하는 뤼팽으로 인해 조마조마하게 한다. 특히, 이 대결에서 ‘냉혈한’으로 불리는 마피아노란 인물과 뤼팽의 대결이 주를 이룬다. 여기에 퍼트리샤란 여인의 역할도. 마피아노는 뤼팽과 일대일로 맞서 한 번도 우위에 점하지 못한다. 철저히 뤼팽에게 농락당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럼에도 이런 마피아노는 소설 내내 뤼팽의 집에 마음대로 출현하고 활보하는 모습을 보이고, 이에 반해 뤼팽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임으로 마피아노가 우위에 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물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소설 말미에서 밝혀진다.). 이런 모습을 통해, 뤼팽은 자신의 재물을 지켜내기에도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과연 뤼팽의 엄청난 재산의 행방은 어떻게 될까?

 

또한 이번 이야기는 뤼팽의 대미를 장식해서일까? 뤼팽이 가장 신뢰하는 유모 빅투아르가 등장하기도 하고, 베슈 형사가 또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16권의 「바리바」에서 베슈 형사는 뤼팽의 절친으로 등장하는데, 이번 이야기에서는 또 다시 처음 대적관계로 등장한다. 어쩌면 이는 베슈 형사란 캐릭터가 모호하다기보다는 작가의 오류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왜냐하면 베슈 형사는 이미 반장인데, 이번 이야기에서는 반장이 되고 싶어 하고, 뤼팽이 이 일을 도움으로 베슈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가니마르 수사반장도 등장한다(1-3권에서 등장했던 가느마르 반장이다.). 특히, 가니마르의 등장은 1권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배에서 내리며 가느마르에게 잡히던 뤼팽의 모습이 이번 이야기 말미에서도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가니마르와의 대결을 통해, 뤼팽의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회복하며 이야기는 마쳐진다.

 

세련된 기품이 넘쳐흐르지만 도둑의 본성은 언제나 유지하는 뤼팽. 다른 사람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면서도, 실상은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일을 등한시 하지 않고, 기회가 될 때마다 다른 사람의 지갑을 슬쩍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뤼팽(물론 기회를 일부러 만들기도 한다.). 때론 전지전능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때론 연약하기만 한 사내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던 뤼팽. 미인을 사랑하는 일을 사명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지만, 미인을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뤼팽. 때론 뻔뻔스럽고, 때론 히스테리를 부리는 못난이지만, 대체로 여유를 부리는 신사이자 위트가 넘치는 뤼팽. 이 귀여운 악당의 이야기는 이제 끝나게 된다(개인적으로는 13권을 아직 읽지 않았지만, 책상 위에서 날 기다리는 녀석, 잠깐만 기다리길.). 아쉽지만, 뤼팽과 함께 한 긴 여정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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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의 복수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19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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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뤼팽 전집》 19번째 책은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의 복수』다. 12번째 책인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에서의 백작부인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하지만, 책 제목에서만 등장한다. 뤼팽의 첫사랑에 얽힌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이 뭔가 뤼팽을 향해 엄청난 복수극을 펼치는 내용을 상상했지만, 그런 내용은 아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백작부인은 등장하지 않지만, 12권 말미에서 벌어졌던 일이 이번 이야기에서 벌어지는 일의 한 단면의 원인제공을 하고 있기에, 백작부인의 복수라 말할 수 있다.

 

이번 이야기에서도 뤼팽은 라울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라울 다베르니란 이름이다. 이야기 속에서 라울이란 가명들을 여럿 언급하기도 한다.). 이번에 등장하는 형사는 구소 형사반장인데, 구소 반장은 실제 능력보다는 과한 명성을 받고 있다고 평가된다. 또한 예심판사 루슬랭이 이야기 속에서 얽히게 되는데, 이 루슬랭은 통찰력 있는 수사 능력을 보이는 유능한 예심판사로 등장한다. 뤼팽과는 제법 긍정적 관계를 맺으며, 뤼팽의 수사 도움을 받는다. 또한 18권에서 빅토르 형사(뤼팽)과 경쟁관계에 있던 몰레몽 과장이 잠깐 까메오로 등장하기도 한다.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의 복수』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특별한 내용을 제법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뤼팽의 아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사실, 이 부분이 ‘백작부인의 복수’의 내용이다. 뤼팽의 친 아들을 유괴하여 뤼팽을 능가할 도둑으로 키우는 것, 아니 살인자로 키워 뤼팽과 대적하게 하는 것. 과연 뤼팽의 아들은 이번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누구일지 찾아보며 읽어보자. 또한 과연 뤼팽의 아들이 뤼팽과 대적하는 관계가 될지도.

 

아들이 처음으로 등장하기에 아들을 바라보는 뤼팽의 자세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도 특별하다고 할 수 있겠다. 아들을 향한 애틋한 부성애를 보이는가 싶지만 여전히 이기적인 뤼팽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가 싶으면서도 아들을 향해 질투를 느끼기도 하는 그런 뤼팽의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이야기는 한 신사가 은행에서 많은 돈을 현금으로 찾아가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뤼팽이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하고 신사를 쫓는다. 저렇게 큰돈을 가진 사람이라면 탈세하는 악당이라는 자기 멋대로의 생각을 품고, 그런 못된 녀석의 돈을 꿀꺽하는 것은 나쁜 짓이 아니라는 자기정당화와 함께. 아니, 그런 못된 돈을 훔쳐내어 사회에 재분배를 하겠다는 자기미화까지(실제로 뤼팽이 부의 재분배를 행하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일정부분은 한다. 자신의 부하들을 세상 이곳저곳에서 평범한 모범시민으로 정착시키며 그 자금을 댄다는 측면에서.). 아무튼 이런 뤼팽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이 책이 주는 재미 가운데 하나다.

 

이렇게 뤼팽은 라울이란 이름으로 신사가 사는 마을의 별장을 구입하고, 작업에 들어가는데, 그만 일이 꼬이고 만다. 돈을 훔치기보다는 그곳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해결사 노릇을 하게 된다. 모처럼 뤼팽이 온전한 도둑으로 돌아가는가 싶었는데, 이제 또 다시 탐정 노릇을 하게 된다. 물론, 언제나 그랬듯 뤼팽은 자신의 수고비는 알아서 두둑하게 챙기지만 말이다.

 

이번 이야기에서 또 하나의 특기할 내용은 뤼팽이 그리 뛰어나게 묘사되지 않다는 점이다. 소설을 시작하며 작가는 뤼팽의 말을 빌어 적은 서문에서 말한다. 뤼팽이 다소 과장되게 묘사된 점이 없지 않다고. 그렇기에 한계를 드러내겠다고, 완벽한 인간으로 묘사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일까? 이번 이야기 속에서 뤼팽은 언제나 뭔가 한 걸음 늦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뭔가 추론을 통해 사건을 훑어나가면서도 많은 경우는 우연에 의해 해결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더 나아가 평소 뤼팽의 모습(사색과 추론)을 사건 속의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인 롤랑드 라는 여인이 감당하는 모습을 이야기 후반부에서 보여주기도 하며, 소설의 전반부에서는 예심판사 롤랑드가 뤼팽의 모습을 대신하는 느낌을 갖게도 한다. 깊은 생각과 추론, 이로 인한 결말을 도출하는 모습을 말이다. 이런 부분들이 작가가 뤼팽의 절대적 모습을 희석시키고자 하는 노력이겠다.

 

이야기는 마지막순간까지 오리무중, 안개 속을 걷는다. 사실 독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된 일인지 추리하기도 쉽지 않다. 모리스 르블랑의 작품들이 대부분 그렇듯. 단서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오리무중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아마도 작가는 이런 재미를 즐기는 것 같다.). 마지막 순간, 추론을 통한 사건의 전말을 드러내는 부분들을 들을 때에야 비로소 이렇게 된 일이구나 알게 된다는 점에서 여타 작품들과 동일하다.

 

그러니, 굳이 추리하려 애쓰지 말고, 그저 어떻게 사건이 전개되는지 따라가면 된다. 이야기 속에서 뤼팽이 하는 말처럼 말이다.

 

파란만장한 사건은 등장인물 스스로가 그 파란만장함을 풀어가게 놔두면 어둠이 걷히게 되는 법이죠.(50쪽)

 

이처럼 등장인물들이 파란만장한 사건, 오리무중의 상황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작가가 이끄는 대로 읽는 재미, 역시 뤼팽 시리즈가 주는 선물 가운데 하나임에 분명하다. 이제 마지막 20권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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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계단속반 형사 빅토르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18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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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뤼팽 전집》 18번째 책의 제목은 『사교계단속반 형사 빅토르』이다. 그렇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뤼팽이 아니라 형사 빅토르란 인물이다. 뤼팽을 너무나도 잡고 싶어 하는 형사. 그런 빅토르 형사는 어느 날 극장에서 눈이 확 떠지는 미녀를 보고 접근하려 하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도둑이야’ 외침에 한 남자와 함께 범인을 쫓게 되면서 한 가지 사건에 얽혀들게 된다. 계속하여 새로운 범인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으로 말이다.

 

처음엔 동부 중앙은행 직원이면서 채권 90만 프랑을 훔친 알퐁스 도디그, 그리고 알퐁스에게서 노란 종이봉투에 담긴 채권을 훔친 타이피스트 에르넨스틴이란 여인, 또 다시 봉투를 훔쳐간 샤생 부인, 레스코 영감 등 이처럼 채권 봉투를 서로 훔치고 또 훔치면서 새로운 범인들로 사건은 이어진다.

 

게다가 그런 과정 가운데 레스코 영감이 살해당하고, 이에 혐의가 있는 사람으로 도트레 남작이 등장하게 된다. 여기에 남작의 정부 엘리즈 마송이 또 다시 목 졸려 살해당하게 된다. 도트레 남작 뿐 아니라, 그 집주인 귀스타브 제롬도 뭔가 꺼림칙하고, 여기에 제롬의 친구인 부동산업자 펠릭스 드발이란 자 역시 뭔가 의심스럽다. 이번 이야기는 사건 혐의자가 참 많이 등장한다. 이런 점이 이번 이야기의 두드러진 특징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또 한 인물 뤼팽과 뤼팽의 연인 바실리예프 공주까지. 이 모든 인물들이 뒤섞여 있는 이야기를 빅토르 형사는 풀어나간다. 소설 속에서 사건 해결에 있어 빅토르 형사는 몰레옹 과장과 경쟁한다. 과연 누가 먼저 사건을 풀어 나가며 범인을 잡을 것인가를 살피는 것도 재미나다.

 

그런데, 이 인물 빅토르 형사의 모습은 그동안 우리가 보아왔던 뤼팽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미인을 위해서 앞뒤 가리지 않는 모습. 하지만 사건에는 막무가내로 달려들기보다는 잠시 멈춰 쉼의 시간을 통해 사건을 처음부터 검토하고 새롭게 추론하며 결론을 도출해 나가는 모습이 뤼팽과 많이 닮았다. 게다가 이처럼 추론을 통해 사건 속에 감춰진 필연적 요소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건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우연적 요소를 중시하는 모습도 뤼팽을 닮았다. 뿐 아니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향까지도. 왠지 빅토르 형사에게서 뤼팽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는 뤼팽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뤼팽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표출한다. 실제로 그를 잡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때론 뤼팽에게 뭔가 원한마저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분명 뤼팽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하면서도. 과연 빅토로 형사의 진짜 신분은 무엇일까? 분명 뤼팽의 모습이 떠오르는 캐릭터인데, 소설의 말미에서 실제로 빅토르는 뤼팽과 조우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결까지 하는데, 뤼팽일 수 없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 이면에 담겨진 진실이 무엇인지는 소설을 읽어보자. 또 하나의 멋진 반전의 재미가 기다릴 테니.

 

어쩌면 이번 이야기가 뤼팽 시리즈 가운데는 가장 많은 등장인물들과 계속하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들로 인해 혼잡하게 느껴질 수 있다. 마치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그렇기에 이처럼 엉킨 실타래가 하나하나 풀려나가는 것을 살피는 재미가 있다. 역시 뤼팽 시리즈는 버릴 게 없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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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미소를 지닌 여인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17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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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뤼팽 전집》 17번째 책은 『두 미소를 지닌 여인』이란 제목의 장편이다.

 

이번 이야기에서도 뤼팽은 라울이란 이름으로(원래 뤼팽의 이름이 라울이다. 아르센 뤼팽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이름이고,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이름은 라울 당드레지 이다. 12권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에서 언급됨. 또한 16권의 「바리바」에서도 라울 다브낙으로 등장한다.) 활약한다. 그렇다고 해서 뤼팽이란 이름을 애써 감추는 분위기는 아니다. 도리어 라울 스스로 자신을 괴도 아르센 뤼팽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이번 이야기에서 라울(뤼팽)과 대립관계이자, 사건을 풀어나가는 경쟁관계에 있는 형사는 파리 경찰청 소속 고르주레 수사반장이다.

 

라울은 장 데를르몽 후작이 사는 건물 중2층에 세를 들어 살고 있다. 물론 속셈이 있다. 그건 몰락해가고 있는 데를르몽 후작 가문에 내려오는 엄청난 유산, 잃어버린 유산을 후작이 찾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라울은 후작 곁에서 살피며 그 유산이 무엇인지를 알아내 먼저 가로채려는 속셈이다.

 

그런 라울의 집으로 어느 날 앙토닌이란 낯선 아가씨가 찾아온다. 금발의 미녀인 앙토닌은 후작의 집인 줄 알고 같은 건물의 라울 집으로 찾아왔던 것. 그리고 이 아가씨를 고르주레 반장이 뒤쫓고 있다. 이 아가씨가 바로 유명한 범죄자인 키다리 폴의 애인인 ‘금발의 클라라’라는 것. 첫눈에 앙토닌의 미모에 반한 로맨티스트 뤼팽은 고르주레 반장을 따돌리면서 여인을 돕게 된다. 그런데, 정말 이 순박한 미녀 앙토닌이 키다리 폴의 애인 금발의 클라라가 맞을까?

 

그 뒤 뤼팽은 데를르몽 후작의 집을 조사하기 위해 몰래 잠입하였다가 그곳에 몰래 잠입한 한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그 금발의 미녀 앙토닌이다. 그런데, 처음 만나는 느낌을 갖게 하는 이 여인과 뤼팽은 이런저런 모습으로 얽히게 되고, 연인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되는데, 여전히 뤼팽은 이 여인에 대해 혼란스럽다. 어느 때에는 귀엽고 순박한 시골처녀였다가, 또 어느 때에는 온갖 세파에 시달린 가련하면서도 때론 요염한 여인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어느 때에는 라울에게 마음을 주고 사근사근하게 대하다가도 또 어느 때에는 순진하고 앳된 미소를 띠지만 단호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다중인격자인 걸까?

 

이번 이야기 『두 미소를 지닌 여인』은 사실 15년 전에 발생한 ‘볼니크 성의 사건’과 관계가 있다. 이 사건에 뭔가 연관성이 있는 장 데를르몽 후작과 사건 당시의 피해자의 조카인 발텍스(키다리 폴)간의 긴장관계. 그리고 후작과 앙토닌(또는 클라라)과의 관계 등이 밝혀지는 과정이 흥미롭다.

 

아울러, 후작 가문에 내려오던 잃어버린 유산을 찾는 과정도 흥미로우며, 이야기의 처음 시작인 볼니크 성에서의 살인사건과 여기에 얽힌 진실들이 밝혀지는 과정 등이 재미나다. 물론, 이 안에는 뤼팽의 전형적 모습이기도 한 필연적 요소와 순전한 우연의 결합이 담겨 있다. 뤼팽은 언제나 사건 속으로 뛰어들기보다는 한 걸음 물러서 사건을 검토하고 새롭게 추론하는 과정을 통해 사건 속에 담겨진 필연적 요소들을 추론해 나간다. 이런 모습들을 살펴보는 재미는 솔솔하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귀여운 악당 괴도 뤼팽의 모습을 다시 회복하며, 아울러 여전히 탐정의 모습도 혼재되어 있는 뤼팽.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바람둥이 로맨티스트 뤼팽의 모습을 살펴보는 재미도 있다. 무엇보다 ‘금발의 클라라’가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재미도 있다. 역시 뤼팽 시리즈는 믿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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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화 - 1940, 세 소녀 이야기
권비영 지음 / 북폴리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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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지만, 차마 펼치지 못하는 그런 책들이 있다. 너무 읽고 싶지만, 한 편으로는 책이 전해줄 먹먹함 때문에 망설여지는 그런 책이 말이다. 권비영 작가의 신작 『몽화』 역시 그런 책 가운데 한 권이다. 읽고 싶은 마음에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지만, 며칠을 그대로 둘 수밖에 없는 책. 몇 차례 책을 손에 쥐었다 내려놓길 반복하던 망설임 끝에 결국 책장을 펼쳐 들었다. 역시, 아프다. 먹먹하다. 괜스레 죄송스럽기도 하고, 분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이 책 『몽화』에는 부제가 달려 있다. 「1940, 세 소녀 이야기」란 제목이. 그러니, 이 책은 일제치하의 깊어져가던 암울함이 가득하다. 그 어둡던 시간 속에서 조심스레 꿈을 품어보고 간직하던 세 소녀의 모습을 소설은 보여준다. 그네들의 우정과 짓밟혀 깨어진 소녀들의 꿈에 대한 이야기. 각기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아래 신음하는 모습, 그 애잔한 젊음을 보여준다.

 

옥죄어 오는 운명의 마수 앞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소녀들의 연약한 몸짓에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겁다. 창작된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우리의 슬픈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음을 알기에. 어쩌면 소설 속의 먹먹함과 눈물은 극히 일부분일 수도 있겠기에 더욱 가슴이 아려온다.

 

소설은 일제치하 우리의 아픔을 망라하여 보여준다. 영실의 아버지와 칠복이를 통해서는 강제 징용되어 탄광에서 노예처럼 일해야만 했던 아픔을 이야기한다. 이들의 노동현장은 ‘빠가야로 조센징’이라 불리던 고단한 삶이며, 통곡의 세월이었다.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어도 무덤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존재, 노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신세, 그 신음과 아픔을 소설은 보여준다.

 

뿐 인가. 세 친구 가운데 은화를 통해서는 성노예로 전락해 버린 슬픈 꽃송이들의 눈물, 그 한 맺힌 현장을 보여준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그 아픔을 말이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모른 척 하고, 덮어 버리고 싶어 하는 아픔을 말이다. 이렇게 성노예로 끌려간 우리네 할머니들의 아픔과 눈물이 소설의 가장 큰 주제다. 자신들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전쟁의 광기 속에 내던져진 여인들. 전쟁에 미친 군인들의 군홧발에 몸과 영혼이 찢겨간 여인들. 그 미친 바람 앞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신음한 여인들의 아픔을 작가는 이야기한다.

 

작가는 또한 이런 아픔, 그 통곡의 세월, 신음의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무풍지대를 살아가며 특권을 누린 자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바로 세 친구 가운데 정인과 그 가족이 그런 부류다. 일제의 앞잡이로서 동포의 희생과 눈물, 한숨을 먹고 오히려 자신들의 살을 찌운 이들. 남들과는 달리 부모의 인형이 되어 살아감을 힘겨워하는 정인의 배부른 고민의 모습. 해방 전 뿐 아니라, 해방 후에도 여전히 무풍지대를 살아가는 그 아이러니함을 작가는 정인 가족의 모습을 통해 고발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정인과 영실, 은화의 우정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작가는 친일의 모습을 모두 욕하지는 않는다. 정인의 부모처럼 친일을 통해 자신들의 성, 영지를 구축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 반면, 영실의 이모 을순처럼 생존의 몸부림으로 일본 상인에게 빌붙어 살아간 모습도 보여준다. 물론 그런 모습을 정당화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힘겨운 삶의 밑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 그 고단함과 눈물은 우리에게 또 다른 아픔으로 다가온다.

 

작가의 말처럼 소설 속의 인물들은 영웅적 모습보다는 다소 밋밋한 모습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통곡의 시간, 힘겨운 세월을 나름의 방식으로 견뎌내며 통과한 인생이기에 이미 영웅의 모습이 아닐까? 게다가 그 아픔과 눈물은 결코 밋밋할 수 없다.

 

소설은 마지막까지 아프다. 먹먹하다. 그리고 그 먹먹함은 오늘도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여전히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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