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끄 라깡 왜! 예수 사랑을 욕망하는가? - 정신분석학이 사랑의 존재를 답하다
윤정 지음 / 북보자기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제목이 참 독특하다. 자끄 라깡 왜! 예수 사랑을 욕망하는가?책 제목은 이런 짐작을 가능케 한다. 이 책은 라깡의 정신분석학으로 예수 사랑을 바라보는 책이라는 것을 말이다.

 

자끄 라깡, 솔직히 잘 모른다. 그저 정신분석학자라는 정도. 저자는 라깡이 정신 분석의 사상가라 불린다고 말한다. ‘사상가란 칭호에서 느낌이 온다. 어쩜 이 책, 머리가 지끈지끈한 내용일 것이라는. ‘정신 분석의 사상가라는 라깡이 예수 사랑을 욕망한단다. 정신분석학도 머리 아플 텐데, 거기에 사상가란 칭호까지 더해졌으니, 얼마나 어려운 말들이 가득할까 걱정이 든다. 혹 머리에 쥐가 나면 안 되는 데 하는 걱정이 앞서지만, 그래도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책을 읽어본다.

 

책은,,, ~ 어렵다. 물론 누군가는 쉽다 말하겠지만, 난 어렵다. 그러니, 이건 전적으로 나의 무지 탓일 게다. 라깡을 잘 모른다는 사실, 게다가 기독교에 대해 누구 못지않게 잘 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이 책을 더 힘들게 만든다. 아마도 영성의 색깔이나 신학의 색깔의 다름이 더 힘들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물론, 저자는 신학적 접근이 아니라 말하지만, 결국 그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신학이 될 수 있기에 이런 독특함은 오히려 선지식과 충돌하며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러니, 결국 책이 어려운 이유는 전적으로 독자인 내 탓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심스레 저자 탓으로 돌려본다면, 저자는 친절하지 않다. 친절한 설명보다는 때론 비약과 때론 배배 꼬인 장문으로 내용을 어렵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쩌면 저자가 시인이라는 점도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행간을 뛰어넘는 듯한 표현들이 제법 많다. 물론, 이것 역시 솔직히 말하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미천한 책읽기의 수준 때문이겠지만.

 

아무튼 저자는 서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생의 롤 모델인 예수를 인간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공감을 끌어내고 싶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예수가 왜 인성에서 신성이 되었는지를 예수의 사랑을 가지고 해답을 찾고자 했다.”고 말이다.

 

저자는 정신분석학을 통해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수많은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고. 이것을 탯줄거세, 구강거세, 항문거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거세, 성욕거세, 언어거세, 죽음거세, 이렇게 일곱 단계로 말한다. 이런 각각의 단계를 성경구절과 예수 사랑으로 투영하며 풀어나간다. 여기에 시인답게 묵상의 시 한편으로 각 단원을 마치고 있다.

 

태어나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자연스러운 장벽들, 이로 인한 거세 즉 상실들, 이러한 상실은 삶에 상처를 낳게 되고, 이런 상처를 외면하기보다는 상처를 바라보며 상처를 껴안을 때 자신을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역설을 저자는 말하고 있다. 아울러 사랑받으려는 욕망보다는 사랑하려는 욕망이 될 때, 우리의 인생이 사랑에 머물게 되고, 이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내 삶의 공간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가 된다고도 말한다.

 

솔직히 저자가 말하는 모든 내용이 다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 힘이 되는 것은 삶에 상처가 없는 인생은 가짜인 듯 말하고 있다는 점. 게다가 이런 상처를 오롯이 보듬어 안을 때, 그 안에서 자신을 사랑할 힘이 솟아난다는 점. 이런 대표적 예가 바로 예수였다는 저자의 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특히 신앙인인 나에게는 알 수 없는 힘이 됨이 사실이다.

 

우린 세상을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가. 상처 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을까? 그럼에도 상처 없는 인생인양, 쇼윈도 행복을 만들어간다면 오히려 우리 인생은 걷잡을 수 없는 파경에 이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 안의 상처를 솔직히 인정하고 직시할뿐더러 소중하게 끌어 안음으로 예수 사랑을 욕망하고, 그 예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며, 타인을 사랑하는 인생이 된다면. 그렇게 함으로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내 삶의 공간으로 끌어와 하늘나라를 살아낸다면. 이런 인생, 이런 상처, 사랑스럽지 않을까 싶다.

 

,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내 부족함 탓이다. 솔직히 여전히 잘 모르겠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 이해하지 못했으면 또 어떤가. 그 안에서 뭔가 내 삶에 힘이 될 몇 가지 얻었으면 족하지 않을까.

 

얇은 책자라고 얕봤다가 이 책 읽느라 제법 많은 시간과 정신력을 소비했다. 피곤하다. 이것 역시 또 하나의 상실, 또 하나의 상처일까?

 

마지막으로 저자의 후기 가운데 한 구절을 적어본다.

 

사랑은 사랑받고 싶은 상처 속에 머물기에, 그 상처를 사랑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을 사랑하고 사랑할 수 있다. 그 사랑은 진리를 깨닫게 하고 자유함을 준다. 그 자유는 충동적인 쾌락이 아니라 고통을 딛고 선 생명이다. 그 생명은 사랑이기에 죽음마저 생명이고 싶은 욕망이다.(1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