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의 묘
전민식 지음 / 예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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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식 작가의 신작 『9일의 묘』는 풍수로 먹고 사는 지관들과 이와 맞물린 군인들의 권력을 향한 욕망을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다.

 

때는 1979년 10월 26일을 앞둔 시점이다. 최고의 지관, 아니 전설적 지관인 황창오에게 전수받은 실력을 가진 지관임에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 살기 위해 도굴을 감행하는 중범과 도학, 그리고 해명은 그만 현장에서 발각되고 만다. 중범과 해명은 무사히 도망치게 되었지만, 도학은 붙잡혀, 광에 갇히고, 도학을 붙잡은 자들인 김선각 중령, 김중각 소령 형제는 권력을 도모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묏자리를 잘 씀으로 인해, 권력의 중심에 서길 원하는 자들이다. 마침 10 ․ 26사태가 일어난 혼란의 시기에 선각, 중각 형제가 줄 댄 사령관이 권력을 잡게 된다. 그리고 이 일에 도학이 지관으로서 참여하게 된다.

 

한편, 도망쳤던 중범과 해명은 또 다른 권력을 쫓는 장대승 참모총장 라인의 호출에 의해 왕을 내는 명당자리에 암장을 하게 되는데. 바로 그곳에 도학을 대동한 김선각 중령이 군사들을 이끌고 오는데. 과연 누가 권력을 잡을 것이며, 전설적인 지관인 황창오의 친아들 중범과 양아들 도학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누구나 명당에 대한 관심이 있을 것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풍수지리는 미신에 불과한 것이라 무시하지만, 그럼에도 정작 명당에 무관심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은 과연 동기감응이 진짜 효력이 있을까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동기감응론이란 같은 유전자에서는 같은 에너지 파장이 발출되기에 기(氣)가 같은 동종의 기(氣)끼리는 서로 감응을 일으킨다는 이론이다. 이런 논리로 부모 자식 간에는 유전자가 같아 그 에너지 파장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기에 죽은 시신이 어떤 장소에 어떤 모습으로 묻히느냐에 따라 후손에게 그 기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론이다.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공명’과 유사한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쉬울 것 같다).

 

소설의 관심은 이런 동기감응을 통한 발복(發福)이 실재 존재하느냐 않느냐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이 발복(發福)을 쫓으며, 이것을 통해 권력을 붙잡으려는 자들의 더러운 욕망에 관심을 기울인다. 지관들도 믿지 않는 혈에 목숨을 걸며, 사람을 죽여 가며 그 혈을 차지하려는 욕망의 더러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건 실재하지 않는 존재를 믿어 마음의 위로를 얻는 것과 다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부과 부조리와 삶의 아이러니를 외면하려는 얄팍한 욕망에 지나지 않았다. 가지지 못한 걸 가지려는 욕심으로 사람들은 혈을 찾는다고 믿었다.”(54쪽)

 

 

아울러서 이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붙잡기 위해 애먼 사람들을 빨갱이로 둔갑시키고, 방해되는 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제거하는 몰 인간성에 작가는 관심을 기울이고 고발한다.

 

“그들은 진실을 들을 준비보다 진실을 만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 광에서는 진실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광 속엔 주거만 존재할 뿐인데 그 존재가 살아날 수도 있다고 말하라고 한다. 거짓을 진실로 만들어 버리는 곳이다.”(123쪽)

“중범이 빨갱이라면 세상엔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을 터였다. 군인과 빨갱이.”(155쪽)

 

소설은 9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지는 사건답게 박진감 넘치게 진행된다. 아울러 우리의 현대사의 어두운 부분을 건드리며, 권력의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뿐 아니라 이런 모든 일들이 벌어진 후에 또 다시 밝아오는 아침을 맞으며, 도학의 부끄러워함을 통해, 어두운 역사의 현장을 겪어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 침묵의 당사자들을 향한 에두른 질책도 잊지 않는다.

 

“도학은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아무렇지도 않게 새날이 밝은 게, 아무렇지도 않게 눈뜨고 아침을 맞이한 일이 부끄러웠다.”(217쪽)

 

하지만,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새날이 밝았으랴. 새날을 기다리며 흘렸을 그 통곡의 세월, 눈물이 왜 없었겠나. 외치고 싶어도 커다란 격류 앞에 무능함만을 드러내며 움츠러들었을 부끄러움과 그 이면의 아픔은 왜 없겠나. 도학 역시 그랬지 않았나. 모두 역사의 희생자들 아니었을까? 단지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이런 아픈 역사,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을 잊지 말자.

 

아무튼 이 소설은 최고의 명당, 혈을 찾아 숨 가쁘게 펼쳐지는 전개가 돋보이는 소설이다. 마지막 오봉쟁주의 실체는 왠지 온전한 조화와 안녕을 누리는 명당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그 동안의 아픔과 눈물, 충격을 어느 정도는 상쇄해 주는 느낌이어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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