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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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절반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 시간을 내는 일


82년생 김지영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담담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는 다른 여자의 인생을 살아본 듯 이야기했으며,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돌아보았다. 그녀가 느꼈을 울분과 분노가 담백한 문체를 너머 마음속에 하나씩 쌓였다.

 

82년생 김지영은 음미하며 읽어도 2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 나라의 2500만에 가까운 여성, 혹은 전 세계에 35억 명에 가까운 여성을 이해하기 위해 내는 시간으로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에 터무니없이 많은 이야기를 담겨 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느낀 감정을 정리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읽고, 또 읽었다. 세 번을 읽고, 829일에 조남주 작가님을 만나고 또 한 번 읽고서야 글을 쓸 수 있었다. 네 번을 읽으며 포스트잇을 붙이고, 다시 읽으면서 떼었다 붙이기를 반복했다. 결국 네 번째 김지영씨를 만났을 때 모두 떼어버렸다. 어느 장면도 덜 중요하지 않고, 어느 장면도 더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특별하지 않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특별한 이야기

82년생 김지영은 여아낙태(페미사이드)가 가장 심했던 80년대에 태어난, 그 시대의 여자아이에게 가장 많이 붙인 한자인 자를 붙인 김지영씨의 이야기이다. 82년생인 그녀는 자라면서 고등학생 즈음에 IMF의 영향으로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게 되고, 30대가 되어 아이를 낳는다면 2012년 무상보육 정책과 함께 아이 엄마를 혐오하는 용어인 맘충을 마주하게 되는 세대다. 그 질곡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삶은 여자’, 역사의 그늘에서 살아온 2등 시민이자 영원한 타자의 이야기를 잘 보여준다.

 

82년생 김지영은 특별한 주인공의 특별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모든 내용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쉽게 듣고 경험했을 만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이 소설은 20만 부가 넘게 팔리고,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으며, 모두가 읽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사회는 여성이면 누구나 알 법한이야기가 화제가 되는 여성의 이름과 이야기가 항상 지워져왔기 때문에, 여성의 평범한 일생이 기록되거나 이야기된 적이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 사회의 절반이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읽고, 바로 곁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타인의 이야기를 소설로 조금씩 이해해나가는 사회는 분명 병들어 있다.

 

곪아 터진 여성혐오의 사회

여성혐오라는 말을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쓴 지 2~3년 정도 된 거 같다. 문민정부 10년도, 광우병에 대항하던 촛불도, 2011년의 희망버스도, 그리고 세월호에서도 아무도 여성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광장이 열리고 많은 이야기가 남았지만, 여성의 이야기는 항상 닫혔다.

 

2014년 메르스 갤러리를 계기로 여성혐오 문제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했을 때 나는 놀랐다. 페미니즘을 외치고 또 외쳐도 묵묵부답이던 사회가 갑자기 큰 목소리로 대답해주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때서야 온갖 혐오와 폭력의 역사가 드러났다. 데이트 성폭력, 디지털 성폭력, 문단내 성폭력, 시선 강간, 한남() ...... 공포와 공감, 혐오와 적대, 연대와 치유가 한 시대에 엇갈렸다. 그리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나날이 밝혀지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의 이야기가 뒤늦게 시작된 사회에서 여성의 일상사를 세밀하게 기록했다. 소설이 마치 사회학 보고서나 역사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너무 안타깝게도, 다른 어떤 매체에서도 왜곡되지 않은 한국 여성을, 혐오, 멸시, 성애화, 그러니까 무수히 많은 타자화와 억압을 벗어난 여성의 맨 얼굴을 보기 힘든 것이, 이미 곪아버린 여성혐오의 사회다.


남성이, 특히 남성 페미니스트가 곱씹어야할 책

2011년은 잊지 못할 해다. 대학에 입학한 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페미니즘을 알게 되었다. 처음 만난 페미니즘은 혁명이었다. 삶을 보는 눈이 180도 뒤집혔다. 이게 맞는 건가, 이래도 되는 걸까, 싶었던 것들이 180도 눈을 돌리니 명백해 보였다. 여성으로 살아가는 어려움을 먼발치에서나마 조금씩 이해해 나갔다.

 

남성 페미니스트로 살며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고 고민에 허덕였다. 동료 여성 페미니스트이자 친구에게 신뢰를 얻으며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에 조금씩 다가갔으며 페미니즘적 관계, 공동체, 사고방식을 오래 고민했으며 내 안에 깊게 박혀 있는 여성혐오적 사고방식을 걷어내고 또 걷어내며 수 년을 보냈다. 생각을 병적으로 검열하며 말을 잘 하지 않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면서 차츰 깨달았다. 여성으로 살아온, 그리고 여성 페미니스트로 살아온 그녀들은 또 얼마나 많은 것에 부딪혀 왔을까.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나도 이런데.

 

페미니즘을 만난 지 7년 째, 솔직히 82년생 김지영씨의 이야기 속에 낯선 에피소드는 없었다. 그런데도 읽을 때마다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낯설지 않은 이야기가 전해준 것은 여성으로 일생을 산다는 것이었다.

 

모든 여성의 삶에 비하면 정말 작은 부분이고 짧디 짧은 김지영 씨의 일생으로 조금이나마 들여다 본 여성의 일생앞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눈물을 흘리고 분노했던 것이다. 거리에서, 학교에서, 일상에서 수없이 분노하고 공감해왔다고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페미니스트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한들, 나는 단 한 순간도 여성으로 살아갈 수 없다. 어떤 페미니즘 세미나에서도, 학술 서적에서도, 소설에서도 알려주지 못한 이야기. 버지니아 울프의 어떤 작품도 나에게 안겨주지 못한 강렬한 순간을 안겨준 82년생 김지영은 남성, 그 중에서도 남성 페미니스트라면 몇 번이고 곱씹어야 한다.

 

82년생 김지영의 미래를 그리며

고마네치를 위하여에서 본 마니의 미래는 어쩐지 어둡지 않았다. 실패한 삶, 성공한 삶도 아닌 마니의 삶을 조용하고 꿋꿋이 지켜나갈 거라 믿으며 책장을 덮었다. 그러나 책장을 덮으며 한 번도 김지영 씨의 환하게 웃는 얼굴을 떠올린 적이 없다.

 

김지영 씨는 주변 여성의 얼굴을 하나씩 갖고 있다. 반대로 주변 여성 역시 김지영 씨의 얼굴을 갖고 있다. 김지영 씨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가질 수 있고, 우리 역시 김지영 씨의 얼굴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무섭다.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한 성별의 절반이 하나의 직업을 가지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조남주 작가님의 말처럼, 우리가 모두 김지영 씨의 삶을 체험했다는 것 역시 어딘가 잘못되었다.

 

쉽게 그려지는 김지영 씨의 미래는 오미숙 여사님이 겪어온 삶의 현대판이다. 지금의 중년 여성이 겪고 있는 현재가 가장 쉽게 떠오르는 미래다. 지금 떠오르는 미래를 김지영 씨의 미래라고 단정지어버리는 것은 희망을 놓아버리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 씨가 오미숙 씨를 이해하고, 92년생, 2002년생의 어떤 여성이 김지영 씨를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그리는데 어색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페미니스트들이 고군분투 해왔듯이, 누군가 82년생 김지영을 쓰고 페미니즘 서적이 서점 매대에 즐비하기까지 누군가 희망을 버리지 않았듯이, 우리는 가슴아픈 김지영 씨의 기록에서 희망찬 미래를 꿈꾸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어딘가에 92년생, 2002년생 김지영 소설이 출간된다면 그 책은 눈물없이 읽을 수 있어야 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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