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쓰카 에이지 - 순문학의 죽음, 오타쿠, 스토리텔링을 말하다
오쓰카 에이지.선정우 지음 / 북바이북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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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 문화

오타쿠는 *마니아의 단계에서 더욱 발전하여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극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말한다. 한편으로는 ‘이상한 것에 몰두하는 사람, 혹은 연구하는 사람’이란 뜻이기도 하다. 이들은 일본 만화의 발전을 이끈 원동력이기도 하다. 프로에 준하는 지식을 갖추고 자신이 원하는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서 동인지부터 시작해 누구나 인정하는 새로운 창작자로 등장한 것이다. 만화 오타쿠 외에도 일본에는 컴퓨터, 게임, 전쟁, 자동차 마니아 등 여러 종류의 오타쿠가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이들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않다. 1989년 만화 오타쿠 중 한 명인 미야자키 쓰토무 벌인 연속살인 사건이 밝혀진 것이 큰 역할을 했다고 일컬어진다. 그는 자신의 성적 만족을 위해 유아 4명을 연속 살해했다. 오쓰카 에이지는 그의 변호인단으로서 그가 불완전한 이야기를 적은 것을 보았다. 다른 범죄자들에게서도 나타나는 이러한 사항을 미루어 보아 표현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지 않았을 때 범죄가 일어난다는 추론을 하기도 한다. 이 사건은 무척 슬프고 앞으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다고 ‘오타쿠’의 긍정적인 면까지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신들이 원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탐구, 개발한 그들의 노력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에 반해 현재 오타쿠들은 기업이 만들어 준 것을 그대로 받아쓰는 ‘유저’에 머물고 있다.

오쓰카 에이지도 염려하고 있듯 ‘라이트노벨이라는 한 장르만 반복해서 소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도 작품의 양이 방대하고 매우 세분화 되어 있어 자신이 좋아하는 라이트노벨 속 하위 장르나 선호하는 작가의 작품만을 읽는 경향도 많다고 한다. 나는 이 부분이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작은 관심 분야 안에서만 지내는 것은 언젠가는 파탄이 날 수밖에 없으므로 결국 받아들이는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장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기업이 계속 새로운 장르의 라이트노벨을 만들어 내어 독자들을 현혹한다면 독자를 기다리는 시간이 계속해서 길어질 수도 있다. 그 긴 기간 동안 오타쿠들도 ‘크리에이터’로서의 면모를 잃고 오로지 ‘유저’로서만 활동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전자회사에 의해 오늘날의 백색가전이 점차 개인용 전자기기로 그 영역을 확장해왔듯이 말이다.

출판기업이 조지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와 같은 역할을 한다면 어떨까. 다른 문화는 철저히 통제된 채 ‘라이트노벨’이라는 장르 하나만 남는다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쟁에서 도태된 것은 없어져도 되는 것이 당연할지 모르나, 이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스스로 생산하지 못하고 받기만 하는 수동성에는 주는 사람에 따라 좌지우지 될 수 있다는 보이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라이트노벨’ 12국 전기나 영미권의 ‘영어덜트소설’ 중 많은 사랑을 받은 『헝거게임』시리즈나 『다이버전트』 시리즈,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등은 시대를 비판하고 현실인식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앞의 작품들 보다 랜덤하우스를 돈방석에 앉힌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나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보다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수용자의 수준이 올라가지 않을 수 있다는 가설도 씁쓸하지만 세워봐야 할 것이다.

 

 

 

 

 

 

순문학의 죽음

오쓰카 에이지는 순문학에 대해 ‘불량채권’이며 ‘이미 내구연한이 끝난 문학’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무척 당황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오쓰카 에이지가 ‘불량채권’이라고 말한 순문학은 ‘기득권’으로서의 순문학이다. 상업주의와 연결해 코믹에서 벌어들인 수입으로 문학을 먹여 살리고 있는 모순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이다. ‘매상을 문학의 유일한 기준’으로 놓고 한 말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다. 이 밖에도 문학이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많다.

예를 들어 전문지는 다수의 사람이 보지 않지만 존재의 이유는 분명 있다. 각 분야의 전문지식을 나누고 발전시켜 나가기에 틀림없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문학도 이와 다르지 않다. 현재 소위 순문학이라 불리는 문학이 예전의 기능을 잃고 문학을 위한 문학이라는 틀에 갇혀있는 점은 안타깝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지 않는 문화라는 이유만으로 사라져야 하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판소리와 사물놀이 등은 우리의 전통문화이지만 향유 계층은 많지 않다. 그렇다고 그 문화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민족문화를 연결해주는 문화가 사라진다면 나라와 민족의 역사성도 유지하기 힘들지 모른다. 생물종의 다양성을 보장하고, 언어의 다양성을 유지하려는 것도 이와 같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 타결된 WTO로 세계는 글로벌 경제로 묶였다. 그 덕분에 각 나라의 경제상황이 어려워지면 다른 나라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인터넷이 발달되어 대중문화가 세계적으로 비슷해지고, 군사적‧경제적인 이유로 한 나라의 문화가 정체성을 잃고 다른 문화로 편입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세계 언어도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현재 7천여 언어가 21세기 말에 이르러 그 절반, 최악의 경우 90%가 사라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고 한다. ‘한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곧 그 언어에 반영된 문화, 즉 인류의 소중한 자산이 없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현대문화를 저급문화라고 폄하하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저급문화라고 불리는 많은 것들은 신나고, 가볍고, 빠르게 소비된다. 무거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고민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상품이라 해도 크게 다른 말은 아닐 것이다. 예전에 ‘문화’라고 칭송받으며 지식인들이 향유하던 고급문화와 현대문화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철학을 논하고 세계에 대해 고민했던 살롱문화도 아니고, 절차와 예법이 중시되는 다도문화도 아니다. 즐기는 법을 배울 필요 없이 스스로 느낀 그대로 향유하는 문화가 현대문화의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느낀 대로 보는, 편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문화다. 읽어주는 그림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문학 작품에 녹아든 시대적 의미와 사상을 모르는 채로 작품 그대로를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흔히 말하길 책이 써진 후에 텍스트는 철저히 수용자에 의해 판단된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학교에서부터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방법을 익힌다. 문화적 지식이 계속해서 쌓여왔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들여 노력하지 않으면 그 맥락을 이해하기가 예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문화를 접한 그룹으로 향유 계층 또한 한정된다. 이렇게 문화는 양분화 되어 격차가 분명해지고 골이 깊어졌다.

나는 라이트노벨의 인기는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괴로운 현실을 잊기 위해서 한동안 사람들은 가볍게, 고민 없이, 때로 일상생활에 소소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에 빠져들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다보면 깊이를 추구하는 시기도 올 것이다. 그때 문학 자체를 다시 찾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언제나 파도처럼 물결모양을 이루었다. 생명력이 있는 문화인 한 변곡점은 언제나 찾아온다. 순문학이라 불리는 현대소설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소수의 문화라고 버리기보다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브리의 사상

‘지브리는 비평으로 맞서야만 한다’는 오쓰카 에이지의 말을 몇 번씩 곱씹었다. 공교롭게도 작년에 나는 지브리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내가 지브리 작품의 사상을 원작과 비원작으로 나눈 반면, 오쓰카 에이지는 각각의 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사상으로 나누었다. 나와는 다른 판단 기준이었지만 내가 고민하던 지점을 전문가의 식견으로 들을 수 있어 뜻 깊었다. 원주민을 내쫓는 설정이라 아이누족을 내쫓은 일본인들이 보기에 괴로운 <마루 밑의 아리에티>나 <마녀 배달부 키키>에 대한 그의 평가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세계의 유수 영화제의 상을 안겨주었고, 흥행 면에서도 최고의 성적을 보였다. 나는 그 영화 덕분에 1권의 아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원작을 3권까지 읽게 된 사람으로서 원작과 영화의 내용은 상당부분 다르다고 생각했다. 원작에서는 영화에서처럼 전쟁의 폐해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애석하다’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다. 그보다는 하울이 자신을 잡으려는 마녀를 피해 다니는 마법 세계의 힘겨루기와 소피의 자아 찾기에 더 많은 부분이 할애되어 있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린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고통스러워하는 하울의 모습이 여러 번 등장한다. 관객들은 하울의 눈을 통해 전쟁의 참상에 대해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전쟁을 다루고 있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붉은 돼지>,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느낀 감정은 프로파간다 문제로 몸살을 앓았던 <바람이 분다>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다.

나는 다른 영화에서는 적용 가능한 ‘보편성’이 <바람이 분다>에서는 ‘유일성’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호리코시 지로라는 인물이 전쟁에 대해 고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기를 만들고 싶은 욕망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마법이나 다른 나라에 속한 인물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나라에 속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얼마 전에 이 영화를 본 나로서는 전쟁의 한 가운데서 고민하는 인물을 보았지만, 다른 면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란 생각한다. 더불어 3인칭으로 화자를 설정했다면 논란의 소지는 줄었겠지만 이야기성은 부족해 재미가 떨어졌으리라 생각했다. 논란에 휩싸여 흥행에 실패한 점이 아쉬운 대목이긴 하지만 지브리답기에 좋았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지브리 사상의 문제가 오쓰카 에이지가 말한 ‘현재를 꼬집는’ 문제보다 ‘빌려오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브리 작품은 앞에서 말 한 대로 원작이 지브리인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으로도 나눌 수 있다. 2000년 이후의 작품들은 유독 원작을 가져와서 만든 작품들이 많다. ***10작품 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벼랑 위의 포뇨>, <바람이 분다> 3작품을 제외하고 모두 원작이 있는 작품이다. 1986년에 설립되어 1999년도까지의 장편 애니메이션 11편 중 원작이 있었던 작품이 <바다가 들린다>, <귀를 기울이면> 단 두 편인데 반해 대조적인 모습이다. 나는 이것이 이야기성의 부족에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 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았다. 남에게 빌려온 이야기는 패러디라는 새로운 창작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결국 남에게 의존한다는 점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일 수도 있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나 잘 하지 못 하겠다’일 수도 있으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나 혼자서는 말 못 하겠다’일 수도 혹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가 될 수도 있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했더라’에 기대기보다 스스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지브리에게 더 좋은 일 아닐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한 번 더 읊는 것은 비평가가 할 일이지, 사상가가 할 일은 아니다.

 

 

 

 

 

>> 순문학 이야기의 내막을 모르고 인터뷰집만 봤을 때는 오쓰카 에이지를 잠시 오해하기도 했으나, 그의 사상에 감동 받았기에 오랜만에 좀 긴 글을 써 보았다. 지브리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나도 사상적 유려함에 감복하고 있던 터라 깊게 다루어 주어서 정말 좋았다. 지브리의 다른 축임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을 대등하게 조명해 그의 작품을 보고 싶은 마음이 샘솟고 있다. 그러나 순문학 논란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서도 말했듯 다소 부족한 것 같아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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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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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상반기. 내가 만난 작가 중 한 사람은 김숨이라 할 만하다. 로 처음 만난 작가. 그녀는 내게 현실에 발 딛고 사는 괴로움을 처절히 되새겼다. 혹자는 철저히라 할지 모르지만, 내겐 역시 처절하게 읽혔다.


작가는 두 가지 소재를 숨 막히게 그려낸다. 침과 콜센터 상담원. 여자와 그녀, 시어머니와 며느리. 일상 속에서 엉겨 붙는 그들의 감정은 독자를 잘 짜인 거미줄처럼 소설의 구조 속으로 밀어 넣는다. 작가가 절대 서두르는 일은 없다. 장은 익어야 맛이 나고 상처는 곪아 터지고야 아물 듯이 서서히 그럴 수밖에 없는 종착지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마을 단위의 사회적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여자의 사회생활은 기생 관계에 묶이게 된다. 대개의 경우,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라는 다른 여자를 희생시켜야만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의 경우 시어머니인 여자가 그 역할에 낙점받는다. 혼자 살겠다는 여자를 굳이 데리고 와 함께 살며, 가사도우미며 아이 돌보미 역할을 맡기곤 며느리인 그녀는 당연하다 되뇐다.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서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때문에 고통받으니 며느리를 욕하면 될 일인데 이게 또 쉽지 않다. 콜센터 상담원으로 근무하는 며느리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정신적 노동을 감내하면서도 직장에서는 언제 잘릴  지 알 수 없는 파리 목숨이다. 스트레스를 풀 장소라곤 집밖에 없는데, 묵묵히 일해줄 뿐 다정한 말 한마디 오가는 법 없는 고부간이다. 그렇다면 누가 잘못한 걸까. 아니, 어떤 해결 방법이 옳은 걸까.


내게는 '각자 답을 생각해 보시오'로 읽혔다. 여자와 그녀의 아픈 대결은, 다 읽고 나서도 쉽사리 손에서 놓지 못할 만큼 묵직한 물음이었다. 이 책을 나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정말 힘들게 읽은 것도 사실이다. 어느 가정에 들어가 보고 적은 것 같은 장면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일이 마치 칼날에 베이는 일 같았다. 책의 3분의 2까지 절정인지도 모르게 완만하게 오르는 능선 또한 한 몫 했다.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3분의 2 지점까지 도달해서 묵직한 질문을 들을 수 있을까' 이것은 내가 들은 또 다른 묵직한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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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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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푸르스름한 거품으로 뒤덮여 있다. 팩을 하고 15분 후에 미온수로 씻어내세요. 세수하고 본 욕실 거울 속 얼굴은 절대 미인이 아니지만, 다행히 혐오감을 일으킬만한 얼굴도 아니다. 절세미인이라 불린 일도 없었지만, 절세추녀라 불린 일도 없었다는 거다. 가끔 거울을 보며 생각은 한다. '좀 더 예쁘게 생겼으면 좋았을 텐데'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옛날부터 끝이 없었다. 얼굴이 썩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희고 고운 피부를 연출하기 위해 수은을 발랐던 유럽의 여성들이나,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머리카락을 길렀던 일본의 귀족 여성들은 일 년에 단 몇 번만 머리를 감을 수 있었다. 지금 목숨을 걸고 양악 수술이나 전신 성형을 하는 것에 비하면, 가벼운 시술이나 화장은 애교에 불과할 지 모른다. <향수>의 주인공 그르누이는 아름다운 소녀의 향기를 빼앗기 위해 그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도대체 인간의 욕망은 왜 아름다움으로만 향해있을까.


추함을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일까. 추녀와 미남의 결합은 내 기억에 별로없지만, 미녀와 추남의 결합은 종종 보게 된다. 작가는 말한다. '추녀는 비통하고 우습게 보이지만 추남은 음산하고 서글퍼 보인다' 우스운 것보다 서글픈 것이 감정을 움직이기 쉽다. 성공한 추녀를 사람들은 '독한 년'이라 부르지만, 성공한 추남은 그저 '성공한 남자'에 불과하다. 남자는 성공하는 순간, 누군가에게는 '갖고 싶은'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아름다움만을 강요하는 세태와 여성에게 강요되는 추함에 대한 수용 압력은 어떤가. 작가는 이 문제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미녀는 야수일 때부터 그의 마음에 감동해야 하며, 개구리 왕자의 겉모습을 혐오하거나 콰지모도의 아름다운 마음 대신 외관에 집착했다가는 도덕적 질타를 받는다. 인어공주가 목소리를 잃고 아름다운 다리를 얻는 것은 괜찮지만, 피오나 공주가 슈렉처럼 변하는 것은 퍽 곤란한 일이다.


등장인물의 죽음으로 끝나는 소설은 대부분 시시하지만 이 책은 결말을 위한 책이 아니다. 작가의 대표작인 <살인자의 건강법>에서 처럼 독자는 결말을 어느정도 예상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가운데 토막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엄중하게 묻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당신의 기준은 무엇인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것이 틀리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가.



+여전한 의문은 남는다. 왜 인간은 아름다움에 그토록 집착하게 되었는가. 어떤 기준이 인간에게 아름답게 보이는가. 아마 이 질문에 대한 대답들은 설문조사 내용에 의해서나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리라. 게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점과 동떨어져 있는 질문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관련 자료 같은 것을 얻었을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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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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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이 사람은 나와 대화를 하고 있는 걸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풀어내고 있는 걸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럴 경우 대부분이 후자에 속한다. 대개의 경우 화자는 자신이 들려주고픈 이야기를 청자에게 전달한다. 청자는 화자가 선택한 이야기를 자신이라는 여과지를 통해 걸러듣는다. ‘거의’라고 해도 좋을 만큼 뉴스도 이런 방법을 거쳐 우리에게 전달된다.


이런 방식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리 없다. 어느 것이 중요한지 중요하지 않은지 우리는 알 수 없고, 생각 없이 읽은 책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듯 생각 없이 읽은 기사도 어떤 감흥이나 전망도 제시해주지 않는다. 기사 읽기에만 주력하기에 우리 인생은 짧고 할 일도 많다. 예전에야 읽을거리가 얼마 없었다지만, 정보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세상에 발맞추려면 속독법을 배운다 해도 허전한 것은 자명하다.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뉴스를 읽는다. 그렇다고 ‘새로운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라고 작가는 말한다. 새로움과 중요함은 ‘범주가 겹치지만 궁극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란다. ‘아마존이 2.3kg 이하의 물건을 미국 전역에 30분 이내에 드론으로 배달 준비를 한다’는 뉴스를 오늘 저녁에 봤다. ‘드론이 새에 부딪히거나 돌풍과 맞닥뜨렸을 때, 해커가 해킹하여 드론을 중간에 멈춰 폭탄을 장착하거나 목표 추적 폭탄이 붙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했을까’ 뉴스를 대할 때 부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는 대로 받으면 문제가 생길수도 있다는 것이다.


뉴스를 제대로 섭취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만의 척도가 필요하다. 혼자서 심사숙고할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보다 나은 생각을 위해 작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식으로 뉴스를 분류할 것을 권한다. ‘맛집, 여행, 과학기술, 패션’에서 ‘유쾌함, 안정, 회복력, 합리성’으로. 항목이 이보다 많아도 좋고, 적어도 좋을 것이다. 다만 사회적 분류가 아니라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분류법으로 항목을 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위를 둘러싼, 딱히 달변은 아닌 종들이 내건 훨씬 낯설고 보다 경이로운 헤드라인에 주목하기 위해 가끔 뉴스를 포기하고 지내야 한다.(291쪽) 할당된 짧은 시간 속에서도 끝까지 지켜야 할 자신만의 목적이 있음을 자각하면서 말이다.(292쪽) 우리가 먼저 자신만의 생각을 잉태시킬 만한 인내심 많은 산파의 기술을 터득하지 못하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는 단단한 무엇을 하나도 갖지 못할 것이다.(289쪽) 불완전한 욕망보다 진정한 욕구에 중점을 둔다면, 우리는 소비재, 즉 제조하고 구매 비용을 지불하느라 우리 자신과 우리 행성을 소진시키는 상품들에 의해 만들어진 근원적인 열망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265쪽) 관용적인 태도의 성숙과 희망의 척도는 역설 적이게도 극도의 슬픔을 다룬 뉴스를 통해 만들어진다.(232쪽)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들은 이 점을 절대 잊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얼마나 사악하고 어리석고 육욕에 불타고 화를 잘 내며 맹목적일 수 있는지 알려주기를 즐겼지만, 그러면서도 복잡한 연민을 가질 여지는 남겨놓았다.(225쪽)


*마지막 문단은 책에서 발췌했다. 보통의 글은 감칠맛이 있었다.
바니타스(Vanitas): 허무, 덧없음, 헛됨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라고 책에서 밝히고 있다. 작가는 재난 뉴스를 대할 때 ‘바니타스’라는 제목을 붙여 기사를 싣는다면 우리가 훨씬 더 중요한 일을 하도록 독려할 것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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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라피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2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임미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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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3대 욕구를 흔히 식욕, 수면욕, 성욕이라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구이자, 여타 욕구에 비해 가장 강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물의 3대 욕구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다만 모두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성욕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동물의 발정기간은 무척 시끄럽고 번잡하다. 기간 안에 짝을 찾아 번식을 해야 하니 유난을 떨 수밖에 없다. 사람의 경우는 발정기간에 제한이 없다. 발정기간이라 해도 외관상으로는 확인하기 힘들다. 역시, 사람다우려면 비밀이 많아야 한다.



 

 

비톨트와 프레드릭은 참 비밀이 많은 사내들이다.(말도 많긴 하다) 헤니아와 카롤을 엮어주려고 무척 애를 쓰면서 이것을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탄다. 이들의 뻔한 계획이 들키지 않는 것은 닭털이 죄다 뽑힌 닭이 남쪽나라로 날아가는 것만큼이나 현실성 없는 이야기지만 그렇게 된다. 작가가 등장인물들을 둔하기 그지없게 설정한 덕이다. 독자는 다시 쓰거나 던져버리지 않는 이상 그대로 읽을 수밖에 없다. 여자애와 남자애를 일부러 붙여놓고, 여자애에게 남자애의 구두끈을 메어주라고 시키거나, 둘의 상황을 요상하게 꾸미고 일부러 함께 있는 모습을 약혼자에게 목격하게 하는 등의 일들을 이 두 명은 끈질기게 계획하고 성취한다. 약혼녀가 바람피우는 장면을 보여주거나 조장하는 말을 하는 것은 이 두 사람뿐인데 '명석한 변호사'로 나오는 알프레드가 왜 짐작을 못하는지 정말 의문이다. 모두 자신의 내면만 들여다 볼뿐 두 사람의 행동을 문제 삼는 사람은 없다. 당사자인 헤니아와 카롤 역시.



 

 

책장을 넘기며 ‘이 변태들’하고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이들은 그냥 변태도 아니다.‘관념적 변태 성욕자’다. 왜냐. 첫 번째로 성적 취향이 독특한 변태들은 대부분 직접 행동하길 좋아한다. 그 행위 자체가 그들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이다. 피해 대상에게 접근해 강제로 추행하거나 겁탈하기도 한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구역질나지만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가끔 보기만 하는 관음증을 앓는 변태들도 있지만 이들도 실제 피부를 보는 것을 낙으로 여긴다. 비톨트와 프레드릭을 굳이 변태 무리에 넣어 분류하자면 관음증에 가깝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위의 사례 중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이들은 헤니아에게 손을 대는 것보다 카롤이 헤니아에게 손을 대는 게 더 관능적이라고 느끼는 변태들이기 때문이다. 이로서 친애하는 우리의 두 주인공이 일반적 변태 순위에서 제외되었다. 이들의 관심은 실은 ‘어울림’에 있다. 누가 누구에게 ‘그럴듯하게’ 알맞은 상대인가다. 변호사 알프레드같이 어른입네 하는 사람은 아직 청소년기를 벗어나지 않은 헤니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의 짝으로는 동갑내기 카롤이 적합하다. 헤니아는 알프레드를 존경하고 그의 약혼녀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그들에게 이야기하지만 관념적 변태 성욕자들이 보기에 그녀가 ‘뭘 모르고’하는 얘기에 불과하다.


 

 

 

이들은 구분하기를 무척 즐긴다. 어른과 아이, 지식인과 비지식인, 법칙과 종속 따위로 등장인물들을 재단하고 인형인양 말끔하게 재단된 천 위에 올려놓는다. 이쯤 되니 이들이 말하는 관능이라는 ‘성적性的’ 감각을 자극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알레고리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들은 헤니아와 카롤이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 ‘아이’이기를 원한다. 헤니아와 카롤은 현재의 상태에서 맺어져야 하며 그것이 가장 완전한 그들의 결합 방법이다. 두 사람은 절대 어른이 되어선 안 된다.



 

 

소설의 첫 장에서 작가는 '1943년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처음 읽을 때 무슨 의미인지 몰라도 괜찮다. 친절하게도 '나치의 대량 학살로 당시에 폴란드 6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는 주석이 달려있다. 잠시 허생전을 떠올려보자. 돈 못 벌어온다고 구박받던 찌질이 허생을 지나 무인도에서 변산 도둑들과 함께 큰 농사를 지은 거상 허생이 나오는 장면이다. 거기서 3년 살며 먹고 남은 것을 팔아 허생은 백만큼을 번다. 그 중 반은 바다에 버리고 글을 아는 이를 데리고 섬을 나온다. 남은 배도 불태워 육지와 교류하지 못하도록 한다. 허생은 글을 아는 자들이 화근이 될까 염려했다. 무인도인 채로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좋은 길이라 여겼다. 친애하는 우리의 관념적 변태 성욕자 두 분이 떠오른다. 아는 것은 화근이다. 그들은 미성숙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 전쟁의 상흔 따위 알 거 없다.  모두가 무지한 채로, 순수한 채로, 누군가의 복종을 바라지 않는 상태로 세계가 온전히 존재했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작가의 말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 그렇다. 환청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원래 꿈보다 해몽이 좋은 법이고 독자에겐 오독의 권리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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