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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공부하는 SQL - 1:1 과외하듯 배우는 데이터베이스 자습서 혼자 공부하는 시리즈
우재남 지음 / 한빛미디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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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비전공자였던지라 개발을 배우는 과정은 항상 도전의 연속이었고, 그중에서 가장 막막했던 분야는 아무래도 데이터베이스(DB) 쪽이었다. 그리고 DB를 다루기 위한 필수 언어인 SQL은 가장 피하고 싶은 최종보스였지만 DB에 익숙해졌을 때는, 이제는 항상 하루에 한 번쯤은 집어들게 되는 숟가락 같은 존재가 되었다.

몇 년 전에 그토록 DB 관련에서 치를 떨었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주변 사람에게 SQL 관련 자격증에 대한 상담을 해주거나 SQL 학습을 권하곤 한다. 최근의 경우에는 금융 관련 서비스 기획자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고객 분석을 위한 데이터를 관련 부서에 요청하는 것에 지쳐서 이제는 직접 자격증을 따서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이러한 상담을 해주면서 아쉬운 점은 비전공자나 취준생 레벨의 사람들에게 추천해줄만한 SQL 책이 없다는 것이다. SQL 교육은 대충 말해 양분 되어 있다. 1) 현업 2) 정보처리기사 또는 SQLD.

현업들은 사수들이나 매뉴얼을 직접 보면서 배운다. 물론 구글 검색도 유용하다. 실은 이들에게 있어 SQL 학습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짤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절망 속에서 만들어지는 노하우의 결정체다.

한편,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가 있다. 정보처리기사와 SQLD. 둘 다 그나마 컴공 또는 데이터베이스 연관 분야에서 쓸모 있고 인정받는 자격증이다. 따는 건 좋다. 기출문제도 있고 강의도 많으니까.... 근데, 실무에선? 언제나 시험을 위한 지식은 실무라는 큰 벽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마냥 오들오들 떨 뿐이다.

온갖 야매와 꼼수로 하루하루 밥벌이 하는 현업이든, 급한 마음에 책을 달달 외워서 자격증을 딴 사람이든, 관련 분야를 착실히 준비하려는 취준생이든 결국 중요한 것은 수많은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탄탄한 기본기를 위한 서적은 많지 않다.

그래서 이번에 혼자 공부하는 SQL을 읽게 되었을 때 정말 좋았다.

1) SQL 쪽에서는 믿고 보는 '우재남' 님의 신작이라는 점.

2) 비전공자들은 쉽게 따라오고, 현업들은 다시금 개념을 다질 수 있게 학습 과목들이 잘게 잘게 모듈화되어 있다는 점.

3) 저자 직강의 강의가 유튜브로 제공된다는 점.

4) 마지막으로, PHP나 JAVA처럼 근본이지만 최근의 트렌드에는 조금 거리가 있을 수 있는 언어가 아닌 파이썬을 연동 실습 예제로 삼았다는 점.

이제는 DB나 SQL을 배워보겠다는 후배나 지인들에게 부담없이 추천할 수 있는 책이 생겨서 기쁘다. 급하게 자격증 때문에 배우거나, 문제 상황마다 구글 검색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아닌, 효율적이면서도 친절한 커리큘럼으로 구성된 혼자 공부하는 SQL이면 많은 시행착오 없이 SQL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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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김동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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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정상'이란 약간의 강박증, 약간의 편집증 그리고 약간의 히스테리가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쉽게 말해, 특정한 것에 집착도 좀 하고, 망상도 좀 하고, 정신적 아픔으로 인해 신체적으로도 고통을 앓는 것이 바로 인간 본연의 '정상적' 심리 작용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탄생시켰던, 19세기 특유의 억압적이던 시대가 무려 200여년 가량이 지났다. 아마, 21세기 현대인들에게 맞춰 '정상'의 정의를 다시 수정하다면 아마 이럴 것이다.


약간의 불안, 약간의 우울증, 약간의 공황장애.


무엇인가 되어야 한다는 주변의 기대, 하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무한경쟁사회, 그 과정 하에서 '나'는 오히려 그 무엇도 되지 못하고 달팽이마냥 두꺼운 외피 속 말랑한 실존을 보호하려 몸서리칠 뿐이다. 북유럽의 어떤 우울한 철학자는 절망이란 죽음의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던데, 이 나라는, 이 사회는 절망이라는 페스트가 돌아다니고 있는 중세 유럽의 도시마냥 생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겨내야 한다. 다행히도 인간의 나약한 실존을 보듬기 위해 '글'이라는 것이 주어졌고, 누구보다 더 격한 고독과 불안의 떨림을 이겨낸 인생 선배들이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만한 글들을 몇 줄씩 남겨놓았다.


에세이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는 누구보다 처절하게 존재의 불안과 맟서야했던 한 40줄에 들어서는 남성의 자기 고백서다. 중간중간 여행기를 담아내지만, 액자 속에 담긴 스틸 사진 마냥 철저히 배경으로 남을 뿐, 초점은 그의 성찰과 되뇌임에 맞춰져 있다.


이 책의 저자, 생선 김동영 작가는 여러 여행 에세이를 펴낸 사람이라고 한다. 독서 관련한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있다던데 솔직히 들은 적은 없다. 여러모로 배경지식이 없지만, 이 책을 통해 두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여행을 많이 다녔다는 것, 그리고 그에겐 여행이 아니고선 씻어낼 수 없는 큰 불안과 우울, 그리고 슬픔이 있다는 것.


여행 에세이를 읽다보면 그곳에 가고 싶어지거나, 저자의 여행 스타일을 닮고 싶어진다. 이 책을 평하자면 후자쪽. 그러나 그의 여행 스타일에서 느껴지는 짙은 불안과 우울의 그림자는 멀리하고 싶다. 역마살(驛馬煞)이 끼었다고 하나? 처음엔 남들 같이 사진도 찍고 랜드마크를 꼭 들러야했던 풋내기 여행자 시절을 지나, 어느새 가장 마음에 드는 카페를 하나 정해 거기서 글을 쓰며 장기투숙을 하는 글쟁이 노마드로 변해가는 과정을 동경하다가도 어딘가 정을 둘 수 없는 그의 상실감과 부유감에 가슴이 저렸다.


차라리 이 책은 에세이라기보단 철학서에 더 가깝다. 어떻게 자신이 살아왔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가 답한다. 다만, 언어가 그리 철학적이고 사변적이진 않다. 쉬운 언어, 읽히는 언어를 통해 독자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가 그만의 내밀한 여행을 통해 줏어모았던, 그만의 내밀한 상처를 통해 아로새겨질 수밖에 없었던 그의 체험과 잠언이 담긴 보따리를 한아름 선물해준다.


이 책을 통해 그의 빈 공간, 그리고 망각하고 싶은 괴로운 기억들이 오롯이 노출된다. 하지만 그의 상실은 여행을 통해 새로운 감각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되고, 그가 잊고 싶어하는 스스로의 아픔은 새로운 인연의 새겨짐 속에 어느덧 견딜만해진다. 잃는만큼 채워지고, 잊는만큼 새겨지는 삶의 전환. 아마 그의 여행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그의 글이 울림이 있는 것은 그 탓일 것이다.

비록 지금 우리는 이렇게 초라하고
앞으로도 계록 이런 식으로 대책 없이 살아갈지도 모르지만
모두 우리가 선택한 것이니까
후회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렇게 잘 살고 싶다. - p.41

언젠가부터 여행은 내게 산소통이 되었다. 그 산소통에서 산소를 조금씩 빼 마시며 나는 일상이라는 거친 바닷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여행은 중독이라고 했다. 한번 중독되면 독이 빠질 때까지 길 위를 헤매야 하는 것이다. - p.105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지도 않다. 그저 길을 갈 뿐이다. 거기서 얻은 게 있고 느낀 게 있다면 그건 대부분 여행 중이 아니라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와 어렴풋이 느낀 것이리라. 여행 중에는 정작 모른다. 여행은 온전히 받아들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 p.123

난 나름대로 당신들 없는 세계에서 잘 지내보려 분투 중이다. 아직은 견딜만 하다. 좋은 날도 있고 힘든 날도 있지만 좋은 사람들이 곁에서 날 다독여주고 있으니, 나는 당신들이 항상 대견해하고 좋아해주던 모습으로 살아갈게. 그러니 어디에 있든 편히 쉬어.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보고 싶어. - p.211

나는 제대로 된 어른이 되고 싶다.
지나온 시간만큼 넓고 깊어져
모든 강과 시내를 받아들이는 바다처럼 되고 싶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어쩔 수 없이 꼰대가 되더라도
괴물은 되고 싶지 않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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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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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


인간은 매번 상실을 겪는다. 상실을 애도하는 방법은 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엄숙한 장례식을 통해 죽은 이를 떠나보내고, 누군가는 멈추지 못하는 식욕을 통해 변심한 애인을 떠나보내기도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를 ‘떠나보내기’를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때부터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에 우리는 필사적으로 누군가의 빈자리를 메우려고 한다. 하지만 종종 극복할 수 없는 상실과 메울 수 없는 빈자리가 있기 마련이다. <파이 이야기>의 저자로 유명한 얀 마텔의 신작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너무나 큰 상처로 인해 자신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대표되는 영적-치유적 공간으로 자신도 모르게 향하는 자들의 이야기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의 등장하는 세 남자, 토마스-에우제비우-피터 토비 모두 사랑하는 이들을 죽음으로 읽은 뒤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다. 1901년 리스본 사람인 토마스는 뒤로 걷는 걸로 슬픔을 표시한다. 세상에게 반기를 들고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앗아간 신께 복수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숙부에게 자동차를 빌려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1939년 포르투갈의 높은 산 인근 브리간사에 사는 에우제비우는 병리학자로, 자신과 비슷하게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슬픔을 온몸에 새기면서 살아갔던 이의 시체를 해부하면서 비로소 안식을 얻는다. 마지막 1980년대 캐나다 상원의원을 하던 피터 토비는 아내의 죽음 이후 침팬지 ‘오도’를 입양한 뒤 포르투갈 높은 산에 있는 고향집으로 이주하는 걸로 자신들의 버틸 수 없는 슬픔에 대처한다. 80년이 넘는 시간과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얽히고설킨 그들의 슬픔의 직물은 단순히 개인의 비극을 넘어서 언제나 고통과 슬픔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와 동시에, 그 절망이라는 진창 속에서 구원을 찾기 위해 신의 그림자를 좇는 인간의 노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1부는 배경이나 소재 자체에서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떠올랐다. 일상이 낯설어진 한 남자가 우연히 발견한 일기장의 주인을 찾아 여행한다는 내용과, 자신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14세기에 있었던 신부의 일기장을 토대로 신부가 남긴 유물을 찾기 위해 여행한다는 소재에서 어떤 공통점을 보았다. 하지만 차이점도 존재한다. 전자가 타인의 시선에만 신경 쓰다가 ‘나’를 잃어버린 어느 중년의 일탈이라면, 후자는 절절한 슬픔 끝에 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의 복수극이라는 점이다. 또한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그 자체로 완결이 되지만, <포르투갈의 높은 산> 1부는 그 말대로 1부이며, 이후의 2-3부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다른 점을 찾을 수 있다.

3부에서 캐나다의 상원의원인 피터 토비가 침팬지 ‘오도’를 입양하고 공존하는 부분은 어쩔 수 없이 얀 마텔의 대표작인 <파이 이야기>를 생각나게 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교감이 묘사되며, 서로의 존재를 의지함을 통해 한계 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많이 닮았다. 그러나 확실히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침팬지 오도’는 위협과 공포 수준이 다르다. 으르렁거리면서 언제 내 목을 물어뜯을지 몰라 계속 감시해야했던 리처드 파커와 달리, 오도는 인간의 언어와 상호작용을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하도록 훈련 받은 존재다. 다만, 오도에게 남아 있는 ‘야생적 감각’은 과거-현재-미래 사이에서 계속 염려하고 후회를 반복하고 있던 피터 토비에게 지금, 현재에 집중해야한다는 깨달음을 준다.


이 책의 전체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종교적 코드는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불편하게 느껴지기 보다는 더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것 같다. 이러한 상실의 고통 앞에 ‘신’은 무슨 역할을 하며, 이 슬픔 속에 나를 방치하는 ‘신’은 과연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여러 질문이 떠올리게 하는 여러 장면들이 소설 속에서 지나가던 와중에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세상에 죽지 않는 사람은 없고, 상실은 일상으로 느껴질 정도로 잦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 슬픔에 빠져서 살아갈 순 없다. 아마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자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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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린다 작가정신 시그림책
함민복 지음, 한성옥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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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린다」는 함성복 시인의 시 ’흔들린다’에 한성옥 화가의 일러스트를 얹은 책이다. 


개인적으로 함성복 시인의 시 중에 ‘긍정적인 밥’을 좋아하여 한동안 외우고 다녔다. 문학이 찬밥 신세인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렇다고 시의 가치마저 퇴색되는 건 아니라는 그의 시를 읽으며 구절구절마다 가슴이 뛰었다. 


‘흔들린다’에서도 함성복 시인 특유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에 한성옥 화가의 일러스트가 함께 하니 그 힘은 배가 되었다. 나무의 흔들림에서 우리네 인생의 흔들림을 잡아내는 그의 관찰력과 통찰력에 무릎을 쳤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 세상의 흔들림을 보게 되었다. 밤새 불을 밝힌 환락가의 흥청거리는 흔들림, 고난 받는 자들의 절절한 흔들림, 홀로 고독을 곱씹는 ‘나’라는 존재의 미세한 흔들림… 우리는 어찌 이토록 흔들리는 것일까? 이것은 인간의 본성인가? 


이러한 물음은 여태껏 잊고 있었던 괴테의 「파우스트」 중 한 구절을 떠올리게 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 만약 함민복 시인의 언어로 이 구절을 다시 표현하자면 이러할 것이다. “인간은 흔들리려 하지 않는 한 흔들리기 마련이다.”


모든 흔들림은 치열하다. 나를 잊기 위한 몸부림에도, 나를 찾기 위한 투쟁 속에서도. 그렇게 우리는 몸서리치며, 한껏 흔들리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 게다. 나는 「흔들린다」에서 그 치열함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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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특별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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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일러스트 파이이야기) : 절망 속에서도 운명을 사랑할 힘


몇 달 전 쯤, 영어 공부 삼아 파이 이야기(Life of Pi)를 영어판으로 읽으려고 했다. 100쪽 쯤 넘겼을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 후 어쩌다보니 다시금 이 책이 내 손으로 왔다. 익숙한 한글과 생상한 일러스트와 함께 말이다. 번역에 대해서는 아주 사소한 불만사항이 있는데, ‘기니피그돼지쥐로 번역한 것이다. 전국의 수만 기니피그 주인들이 들고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기니피그에 대해 의약품 실험 등에 주로 쓰이는 쥐의 종류라고 적어놨던 주석과 비슷한 정도의 충격이다. , ‘미어캣미어고양이라고 하지 그랬나?


파이 이야기에서 기니피그보다 좀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에 대한 관점이다. ‘파이 이야기를 짧게 요약한다면, ‘태평양에 조난된 소년, 그를 구한 건 신앙이었을까?’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종교라는 모티브 아래에서 파이 이야기는 성경에서 신을 거부하다 고래 뱃속으로 들어간 요나, 신을 잘 믿다가 뜬금없는 재앙 속에도 신앙을 지키는 욥,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온갖 신화 속 존재들과 마주하는 오디세우스와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이 청년은 크리슈나(힌두교 신)과 예수, 알라 모두 섬긴다는 점이 좀 특이할 뿐이다.


동물학과 종교학을 복수전공 할 만큼 상당히 특이한 정신세계를 자랑하는 이 파이라는 인물은, 어린 시절 겪었던 그 끔찍한 사고와 조난의 경험 때문에 저렇게 된 건지, 아니면 저런 정신세계를 가졌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고민하게 될 정도의 통합적 신앙심을 자랑한다. 아마 당신이 신학이나 종교학 관련 수업을 듣고 있다면 교수님께 파이 이야기에 대해서 물어보라. 죽음과 맞닿은 그 순간마저도 신을 찾는 쪽을 강조하느냐, 여러 종교를 두루 걸친 바람둥이 기질을 언급하느냐로 그 교수님의 성향을 리트머스 종이 마냥 판별할 수 있을 테니.

p.318 절망은 빛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어둠이었다. 그것은 이루 표현 못 할 지옥이었다. 그것이 늘 지나가게 해주시니 신께 감사하다. 다시 매달라고 아우성치는 매듭이나 그물 주변에 물고기 떼가 나타났다. 내 가족 생각을 했다. 그들이 이런 무시무시한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서도. 어둠이 휘휘 젓다가 결국 물러갔고, 그때마다 신은 내 마음에 환한 빛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계속 사랑하면 됐고.

개인적으론 이 책이 소설이라기보다는 실용서적, 아니 조난 시 생존을 위한 필수 교범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포스터의 날렵하게 생긴 인도 소년과 우람한 벵골 호랑이를 보고서 알라딘같은 판타지 활극을 상상했다면, 그 대신 파이의 베어그릴스 뺨치는 처절한 생존 사투를 볼 수 있다. 영화는 생략이라는 구명보트가 있지만, 소설에는 그런 거 없다. 파이가 느꼈을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과정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당신이 고시원 보다 위 아래로 조금 더 긴 보트 안에 냉장고만 한 호랑이와 함께 출렁이는 파도를 느낀다고 상상해보라! 와우!

p.157 "내 동물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거야? 새, 야수며 파충류들은? 다 물에 빠져 죽었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죽는구나. 왜 이래야 되는지 설명도 듣지 못하고? 천국에서 오는 설명도 듣지 못하고 지옥을 겪으며 살라고? 그렇게 되면 이성이 뭐 하러 있는 거냐구, 리처드 파커? 이제 이성은 실용성보다 - 음식과 옷과 쉴 곳을 얻는 것보다 - 빛나지 않는 거야? 왜 더 위대한 대답을 주지 못하는 거야? 한데 왜 우리는 대답을 끌어낼 수 있는 이상으로 질문을 하는 거지? 잡을 고기가 없는데 왜 그렇게 큰 어망을 갖고 있냐구?"

p.358-359 "사랑한다!"

터져 나온 그 말은 순수하고, 자유롭고, 무한했다. 내 가슴에서 감정이 넘쳐났다.

"정말로 사랑해. 사랑한다, 리처드 파커. 지금 네가 없다면 난 어째야 좋을지 모를 거야.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 못 견뎠을 거야. 희망이 없어서 죽을 거야. 포기하지 마, 리처드 파커. 포기하면 안 돼. 내가 육지에 데려다줄게. 약속할게. 약속한다구!"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호랑이 리처드 파커를 사랑하고, 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운명마저 긍정하는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Amor Fati(운명애)’를 볼 수 있었다. 나도 파이처럼 배가 난파되어 온 가족과 가족과도 같았던 동물들이 모두 물속에 가라앉은 상황을 견뎌낼 수 있을까? 200여일을 태평양에서 호랑이를 돌보며 살아갈 수 있을까? 아마 신이 돕지 않고서야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신이 돕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선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치 죽음의 독가스를 앞두곤 신외엔 부르짖을 곳에 없었을 아우슈비츠 수용소 속의 유대인들처럼 말이다.

p.149 예상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일을 우리가 어쩔 수 있을까? 다가오는 삶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살 수밖에 없는 것을.

p.227-228 "난 죽지 않아. 죽음을 거부할 거야. 이 악몽을 헤쳐 나갈 거야. 아무리 큰 난관이라도 물리칠 거야. 지금까지 기적처럼 살아났어. 이제 기적을 당연한 일로 만들 테야. 매일 놀라운 일이 일어날 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필요하다면 뭐든 할 테야. 그래, 신이 나와 함께하는 한 난 죽지 않아. 아멘."

어찌 보면 우리의 일상 자체가 구명보트에 의존하는 위태로운 항해다. 존재라는 부실한 구명보트에 고난이라는 파도, 공포라는 호랑이살아가는 순간순간마다 권태와 공포 사이에서 담금질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다. 신의 은총일 수도, 노력의 보상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당신도 당신의 인생을 긍정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앞으로도 조난은 계속될 것이다. 파이가 태평양을 헤맨 200여일마냥.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파이 같이 당신에게도 구원의 빛이 언젠가는 닿을 것이라는 점이다. 살아만 남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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