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든』을 읽다 보면 늘 당연하다고 여겼던 자연의 24시간이 낯설게 다가 옵니다. 소로는 아침에 눈을 뜰 때 그저 사무적인 절차에 따라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버리지 않는 새벽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눈을 떠 보라고 조언해 줍니다. 새벽이 우리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 어김없이 오늘도 새벽이 와 주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하는 삶이란 얼마나 겸허하고 경이로울까요. p87

 

 정여울의 책은 늘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런 점에서 많은 위로와 위안을 받았었는데 내가 예전보다 훨씬 더 어둡고 차가운 인간이 되어버린것인지 이제는 이러한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답답하다. 내 우울증때문이겠지만 아침에 눈뜨지 않아도 상관 없다 라는 생각을 할때도 있다. 눈을 뜨는게 죽을 만큼 싫은 것도 아니지만 뜨지 못해도 상관없고. 뭐 떠졌으니 사는거다.

 

 손택은 우리가 멈춰야 할 것은 타인에 대한 연민(sympathy)이며 되찾아야 할 것은 타인을 향한 공감(empathy)임을 일깨우지요. 연민은 아픈 사람이나 배고픈 사람의 고통을 안방의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며 ARS로 3000원을 기부하는 아늑한 자기만족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공감은 당신이 지금 고통받고 있는 그 자리로 달려갈 수 있는 용기의 시작이며, 타인의 고통을 걱정의 대상이 아니라 내 삶을 바꾸는 적극적인 힘으로 단련시키는 삶의 기술입니다. 연민이 내 삶을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만 남을 걱정하는 기술이라면, 공감은 내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과 함게 하는 삶의 태도 입니다. p133

 

 연민 없이 타인에 대한 공감이 가능할까. 연민이 무조건 멈춰야 하는 감정일까? 나는 연민에서 시작한다고 본다. 지옥같은 타인에게 공감을 하려면 연민이 시작이다.

 

 하지만 뫼르소가 사람을 죽이는 이 대목에 이르면 바로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첫걸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을 분석하고 해부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인간의, 인간을 향한 폭력이 아닐까요.

 이때부터 뫼르소는 자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 사회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재판은 이상하게도 그가 왜 살인했는가보다 그가 왜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전혀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가로 초점이 맞추어지게 됩니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정도의 냉혈한'이기 때문에 살인을 했다는 식으로 '믿고 싶어 하는'군중 권력의 한가운데서 무참하게 조리돌림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뫼르소는 전혀 자신의 사정을 해명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에 머루른 채 조용히 자기만의 성벽에 갖히려 합니다. 그에게는 기댈 곳이 없습니다. 살려달라고 애원할 만한 사람도 살고 잎다고 고백할 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남들처럼 목놓아 울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과연 '살인을 저지를 만한 사람','굳이 제대로 재판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이방인』을 여러 번 읽었지만 나는 그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을 읽을 때마다 뫼르소의 고독이, 뫼르소의 어찌할 수 업음이 더욱 절절한 슴픔으로 물들어 옵니다. 안간힘을 써서 이 사회에 일부분으로 살아간다는 것, '이 세상'에 속하기 위해 때로는 온갖 상처를 감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해가 갈수록 더 깊이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p127-8

 

지난 수요일은 동생의 1주기여서 납골당에 다녀왔다. 늘 그렇듯이 엄마는 울고 나는 엄마가 다 울고 진정될때까지 어슬렁어슬렁 납골당 주변을 배회한다.

동생이 죽었을때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동생의 죽음 후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눈믈을 터뜨린적이 있기는 하지만, 망자에 대한 그리움은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죽음은 역시나 남겨진 자의 몫이다. 나는 이 두사람의 죽음에

그 어떤 몫도 가지고 싶지 않다.

 

 납골당으로 가는 길은 인도가 없다. 명절때는 차와 사람이 엉켜서 위험하고 명절이 아닐때는 차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서 위험하다.

 

 언제부터 이글이 있었던 것일까. 이런 내용의 글들이 가로수에 여러개 매달려 있었다.

아들을 보러 가는 길이 너무나 위험해서, 인도가 만들어지길 바라는 바람으로

꽃씨를 뿌리셨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만 생각하며 오갔을 저길을

저분은 그 슬픔을 안고 타인을 위해 꽃씨를 뿌리셨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로 힘겹게 유지되는 것이겠지. 나는 그저 내가 그 꽃길을 망치지나 않기를 바랄뿐이다.

 

 

정여울의 신간은 도서관에 신청하는걸로.

하긴 유명 작가라 내가 신청안해도 조금 기다리면

비치가 되겠지.

 

주말에는 애인과 도서관에 갈까 한다.

김밥을 또 싸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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