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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피
강희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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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피"는 "유령"으로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강희진의 세번째 소설이다. "유령"이 인격분열을 앓는 탈북자 청년과 게임 리니지를 결합했다면, "포피"는 탈북자 여성과 "키스방"을 결합했고, 이는 분단과 자본주의 최첨단의 현상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전작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유령"이 남한에서 뿌리를 잃고 방황하는 탈북자들 간의 차이를 그렸다면, "포피"는 좀 더 쉽다. 이것은 러브스토리이고, 파괴된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다.

 

  엄마와 함께 중국을 거쳐 탈북에 성공, 남한에 정착한 포피. 그녀는 문학과 인류학, 다방면에 걸쳐 박식한 지식인이면서 동시에 돈을 위해 키스방에서 키스 매니저로 일한다. 엄마는 남한에 왔지만 자본주의 체제에 전혀 적응하지 못한다. 엄마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중국에서 몸을 팔고, 재혼으로 얻은 시동생(나의 삼촌)을 잔인하게 이용할 정도로 생활력에 뛰어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령과 당과 남편만이 존재할 뿐이다. 김일성 수령의 사진이 보이지 않으면 섹스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엄마의 머릿속에서 체제는 생활과 욕망까지 완벽하게 지배한다.

 

  이야기의 서술자 '나', 포피는 다르다. 포피는 삼촌을 사랑했지만 그 삼촌은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의 힘에 의해 엄마만을 찾아헤맨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삼촌과 엄마, 그리고 포피와의 관계는 욕망과 애정, 그리고 배신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파국을 맞는다. 이 과정에서 포피는 무기력하다. 그녀는 빼어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탈북에서부터 자신의 문제에서는 방관자에 가까운 태도로 지켜만 볼 뿐이다. 기껏해야 키스방의 손님을 붙잡고 자신의 이야기를 구술하는 것이 전부다. 엄마가 지적 능력이 없는 대신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대비된다.

 

  이것은 삶의 잔인함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포피라는 존재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포피는 북한에서 대규모 아사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실수로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봤으며, 정신적 지주였던 큰아버지가 어떻게 죽어갔는지, 중국에서 엄마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모두 지켜봐야했다. 그녀는 입으로 모든 것을 떠듦으로써 자신의 삶 안에 있는 불안과 공포를 냉소로 표현한다. 소설의 말미에서 포피가 삼촌에게 구강성교를 해주며 엄마보다 자기가 이걸더 잘할 수 있다며 엄마에게 배신당한 삼촌을 붙잡는 장면은, 그래서 아주 마음 아프고 애절하다.

 

  역사적으로 한국문학은 분단이라는 상황 하에서 컸다. 50년대 전후문학에서 80년대 민중문학까지 한국 문학에서 분단이라는 모순은 그것이 표면에 드러났든, 아니든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한국문학에서 분단이 사라졌다. 대부분의 독자는 분단에 대해 관심이 없고, 통일을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서 이 문제를 무시할 수 있을까. 최소한 문학은 그럴 수 없는 게 아닐까. 이 지점에 "포피"는 자신의 가치를 분명히 하고 있다. 마치 '다른 것은 다 사소한 문제야'라고 외치는 것처럼, 분단의 모순과 탈북의 현실을 21세기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욕망, 이미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잔인한 짐승이 되어버린 바로 그 욕망과 연결해서 한 여성의 러브 스토리와 파괴된 가족사를 들려준다. 그만큼 "포피"는 뜨겁고 잔인하고 아주 세다. 왜 센지는 읽어보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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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노버트 데이비스 시리즈 Norbert Davis Series
노버트 데이비스 지음, 임재서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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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요절한 비운의 작가. 한 세대만 늦게 태어났다면 돈방석에 올랐을 노버트 데이비스의 책이 드디어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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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강희진 지음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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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틀 전에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그 봄에 수백명 넘는 국민이, 자신들을 보호해야할 군인의 손에 비참하게 죽어갔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전두환은 지금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IMF. 수많은 가정이 파괴되었고 가족 동반 자살이 줄이 이었지만 역시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누구 하나 감옥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세월호. 꽃다운 아이들이 차가운 바닷속에서 죽어갔지만 누가 책임질 것인가. 아직 모르긴 해도 선원 몇 명외 달리 처벌 받을 사람을 없을 것 같다. 최소한 정권 차원에서 책임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병자호란. 우리 역사상 가장 뼈아픈 패배였고 굴욕이었으며, 무려 50만명이 포로가 되었던 그 전쟁에서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심지어 전쟁의 책임자들은 포상까지 받았다. 고통은 오롯이 백성의 몫이었다. 강희진의 새 소설 "이신"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단죄를 사적 복수로 대행하고 있다.

 

  배경은 병자호란 직후. 이씨 왕조에 충성하라는 뜻으로 "이신"이라 이름 붙여진 주인공은 청으로 끌려간 청태종의 부하, 즉 두 임금을 섬기는 이신이 되어 조선으로 돌아온다. 사랑하던 아내를 잃고 전쟁의 트라우마 속에서 고통받던 그는 병자호란의 책임자가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에 분노를 느끼고 영의정의 아들 김흥진을 죽이러 간다. 그러나 김흥진은 이미 자객의 손에 죽어있고 그 자객마저 또다른 자객의 손에 살해당한다. 조선의 무능하면서 뻔뻔스러웠던 집권세력을 대표하는 인물 김흥진. 도대체 누가 그를 죽였다는 말인가.

 

  이 소설의 미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역사소설로서 "이신"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은유한다. 병자호란 직후 집권세력이 보여준 후안무치한 모습은 선생님의 말처럼 "400년이 지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무능하고 파렴치하며 그로 인해 수많은 백성을 고통에 빠트린 왕, 혹은 집권자가 있다면 그는 "죽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섣불리 용서나 참회, 관용을 말하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는 권력의 문제만 되면 너무나 쉽게 화해와 화합, 용서를 말해왔다. 심지어 눈앞에서 수백명의 아이들이 고스란히 죽었는데도 눈물을 내세우며 도와달라고 말하는 뻔뻔한 모습까지 봤다. 왜 서해야 하는가? 백성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늘 백성들만 도탄에 빠지는데 왜 그들에게 베푸는 용서는 그렇게 쉬운가? 왜 복수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왜? 이것은 권력자는 손댈 수 없다는, 처단할 수 없다는 학습에서 나온 우리의 비겁이 아닌가.

 

  둘째, 스릴러로서 소설은 매우 뛰어난 짜임새를 보여준다. 스포일러 때문에 말하기 힘들지만 죽이러 갔던 자가 목격자가 되고, 살인자가 피해자가 되며, 추적하던 자가 추적당하는 아이러니를 이 소설은 매우 짜임새 있게 보여준다. 이것은 가치의 전도라는 소설의 주제와도 맞물리면서 소설의 구성이 주제에 기여하는 완성도를 보여준다. 작가는 야심차게 추리소설과 러브 스토리, 통렬한 복수극을 병자호란이라는 배경 속에 잘 버무려 넣었다.  빼어난 캐릭터를 보여주는 인물들(특히 환향녀 김씨 부인과 조선시대 오렌지 걸 정이는 특히 빼어나다!)과 함께 이야기는 긴장 넘치게 진행된다. 400 페이지 가까운 분량이지만 앉은 자리에서 훌쩍 다 읽을 수 있는 몰입도 높은 이야기이다. 이만한 이야기의 재미는 근래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딱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마지막 장면이다. 왕은 죽었어야 한다. 나쁜 왕은 죽는 것이 맞다. 하지만 왕은 죽지 않는다. 역사소설이기에 작가 마음대로 왕을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마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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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나벨 최후의 자손 -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최욱 지음 / 나무옆의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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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문학상 시리즈의 마지막 책, "슈나벨 최후의 인간"은 좀비를 소재로 한 SF 소설이다. 지금은 회고의 시대가 되는 90년대 초, 대학가마다 소극장에서 고다르의 영화를 보여주던 그 시절에 (전두환 아들의 소유로 알려진) 시공 그리폰 북스에서 SF 고전들을 펴내면서 드디어 우리나라도 SF의 부흥이 오는가, 하고 잠시 설레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 시절 우리 사회는 계속 진보할 것이고, 우리는 조금씩 더 진보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착각이었던 것처럼. 듀나와 배명훈이 등장하긴 했으나 SF는 여전히 우리나라 독서계의 진정한 컬트라 할 수 있다. SF가 홀대를 받으면서 우리나라 SF 작가들에게 가장 큰 부담은 SF 소설을 SF 영화들과 비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슈나벨 최후의 자손"을 읽으며 대니 보일의 "28일 후"와 "28주 후"를 떠올렸다.


  이야기는 사실 전혀 다르다. 세겹의 액자 소설 형태를 가지고 있는 "슈나벨 최후의 자손"의 이야기는 '버려진 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좀비가 된 인류가 있고, 그들은 정부의 방제에 의해 잠시 활동을 멈춘 것처럼 보인다. 이 과정에서 좌절된 욕망의 상징과도 같은 G가 등장하고 G의 욕망과 좌절이 또다른 좀비 후손에게로 전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의 죽음을 파묻으며 그 위로 신도시가 건설된다. 현재와 과거, 삶과 죽음, 욕망과 좌절, 지배하는 자와 당하는 자라는 코드가 좀비가 출몰하는 암울한 도시의 배경으로 촘촘하게 박혀있다. 따라서 작가가  아무리 이야기만으로 읽어달라고 해도, 좀비는 탄생부터 현실에 대한 은유로 등장했고 결국 정상과 주류, 기업 대 비정상, 비주류, 소모품의 이야기로 읽을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 시체를 딛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체들 또한 길들여진다는 섬뜩한 결말이란..... 이명박 시대를 견딘 우리는 이토록 비관적이다.


  "슈나벨 최후의 인간"이 대니 보일의 영화와 만나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통렬한 비극성. 좀비의 대가라 할 수 있는 리쳐드 매드슨이나 맥스 브룩스의 소설에서 느낄 수 없는 정념과 비극성은 전혀 다른 이야기임에도 대니 보일의 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대니 보일은 "28개월 후"를 언제 만드나? ㅠㅠ) 특히 '황혼'이라 이름 붙여진 좀비 퇴치 작전 장면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반은 좀비 이야기이고 반은 프랭켄쉬타인의 이야기이다. 자신이 건설한 피라미드에서 좀비들에게 죽음을 당하는 G의 최후는 이고르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는 프랑켄쉬타인 박사와 대로 겹친다. 소설은 G의 아들 C가 죽는 것으로 끝나는데 그가 정말 죽은 것인가, 하는 의심이 있다. 죽은 체 하고 좀비의 세계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 지점에서 2부가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꼭 2부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소설이 공모용으로 쓰여짐으로 인해 200자 원고지 천 매의 제약을 너무 의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 소설은 좀 더 길었어야 한다. G의 러브 스토리나, 그 아들 C의 어린 시절도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그런 부분들이 더 자세히 나와있었다면 이 작품은 가히 압도적인 소설이 될 수 있었는데 안타깝다. 왜 공모는 꼭 천 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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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 - 제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김대현 지음 / 다산책방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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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어느 분이 맨프롬어스와 유사하다고 하셨는데 나는 보봐르의 "모든 인간은 죽는다"와 거의 같은 얘기가 아닌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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