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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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J. M. 쿳시의 소설에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흥미진진한 사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로맨스도 없다. 게다가 가끔은 비참하고 약간은 더럽기까지 하다. 때때로 쿳시는 생리적인 현상을 비롯한 삶의 이면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읽고서 기분을 전환할 수 있는 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나는 쿳시를 좋아한다. 감히 말하건대 쿳시는 살면서 꼭 한 번은 읽어봐야 하는 작가다. 쿳시에게는 여타 탈식민 문학 작가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첫 번째 문장을 빌어 표현하자면, ‘나는 그런 걸 본 적이 없다.’

쿳시는 지치지도 않고 파고든다. 쿳시가 묻는 질문은 ‘우리(us)'와 '그들(them)'에 대한 것들이다. 그리고 진실과 거짓에 대한 문제이다. 쉽게 분리가 가능한 개념들처럼 보이는 것들을 붙들고 쿳시는 섞고 흔들어보고 계속 묻는다. 그들은 누구고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그리고 당신은 그들을 이해하고 있는가? 그들은 탄압하는 압제자들과 우리는 다른가? 이런 질문을 묻는 나는 얼마나 정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철저하다 못해 자학적이기까지 한 탐색은 쿳시의 소설을 특별하게 만든다. 자학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왜냐하면 쿳시는 자신의 소설에서 독자들에게 일방적으로 강론하는 게 아니고, 소설 쓰기를 통하여 스스로도 탐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쿳시는 한때 식민지였던 국가의 백인, 특히 지배층이었던 아프리카너 계층인 자신의 출신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윤리적, 철학적 문제들을 끊임없이 점검한다. 이러한 태도는 쿳시를 가끔 소설가라기보다 구도자처럼 보이게끔 한다.

비교적 초기작에 해당하는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도 쿳시는 열렬하게 파헤친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의 화자인 치안판사는 야만인 여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야만인 여자를 마사지 해주고 오일을 발라준다. 제대로 된 집을 제공하고 편한 일자리를 찾아준다.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듣고서 알고 싶어하고 동조하길 원한다. 그는 여자를 고문하고 여자의 아버지를 죽인 졸 대령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안판사는 여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여자의 몸 안에도 들어갈 수 없으며 여자의 이야기도 좀처럼 듣지 못한다. 치안판사는 여자가 꽉 닫혀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여자가 답답하다. 그에게 여자는 이해가 불가한 타자다. 그는 여자를 만지고 기호를 연구하듯, 그가 모은 야만인 문자 점토판을 보듯, 여자의 흉터를 연구한다. 핵심에는 닿지 못하고 변두리만을 두드린다. 마치 여자가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하고 비껴볼 수만 있는 것처럼 말이다.

치안판사의 태도는 과연 졸 대령과 그렇게 다를까? 고문 도구라는 열쇠로 야만인의 표면을 비집어 열어 자신이 원하는 ‘진실’을 듣고 싶어하는 졸 대령. 아몬드 오일을 야만인의 표면-살갗-에 발라 자신이 원하는 ‘진실’을 듣고 싶어하는 치안판사. 둘의 모습은 놀랍게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 치안 판사는 이것을 부정하려고 노력하지만 뒤로 갈수록 흔들린다. 여자를 야만인들에게 데려다주고, 야만인들을 위해 나선 뒤에도 이 믿음은 계속 흔들리고 균열이 생기다 붕괴한다. 치안판사는 소설의 후반부에 졸 대령과 자신이 제국의 양면이라고 말한다. “나는 편안한 시절에 제국이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거짓말이고, 대령은 거친 바람이 불며 세상이 험악해질 때 제국이 얘기하는 진실이다. 제국의 통치술의 양면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p.223) 이렇게 보면 쿳시가 제시하는 비전은 매우 절망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쿳시는 단순한 비관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붕괴 그 너머에 대해서 쓴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두 부분으로 나누라고 하면, 나는 치안판사가 여자를 야만인들에게 데려다주고 나서 마을로 돌아오기 전과 후로 나눌 것이다. 치안판사는 이제 야만인과 내통한 혐의를 받는다. 그는 고문을 받고, 모욕당하며, 짐승같이 사육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모두 사라지고 오물 냄새를 맡으며 바퀴벌레들과 잔다. 그는 졸 대령이 야만인에게 망치질을 하려는 것에 격분하여 앞으로 나서고 결과적으로 손이 부러지고 얼굴에 큰 흉이 진다.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의 흔적이 남는다. 마치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이게 끝이 아니다. 치안판사는 여자 옷이 입혀진 채로 매달려 비명을 지르게 된다. 그의 남성성은 줄에 매달려 날아간다. 이제 그는 완전히 추락했다. 인망있는 치안판사로서의 지체, 행복, 안락함, 신념, 아니 어쩌면 그가 신념이라고 믿었던 것들, 남성성, 사랑하고 분노했던 감정들. 모든 게 산산조각 나 바닥으로 향한다. 치안판사는 그가 동정하던 존재들이자 탐구와 해석의 대상이었던 야만인과 같은 위치에 있다.

그리고 그 자리, 가장 밑바닥, 혹은 같은 위치에서 이해의 가능성이 엿보이기 시작한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치안판사의 꿈이다. 눈이 내리는 풍경과 여자가 나오는 꿈이다. 고문과 감금으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치안판사는 꿈을 꾼다. 그는 여자가 만들고 있는 게 예상과는 달리 성이 아니라 화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방어적이고 폐쇄적인 성과 인간적이고 따뜻한 화덕은 얼마나 다른가. 여자는 치안판사에게 빵을 건넨다. 이들은 몸동작으로 소통한다. 배를 불리는 것을 공유한다. 가장 기본적인 몸짓을 서로 이해해 본다.

쿳시는 완전한 추락과 그를 통한 전복만이 타자를 이해하기 위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단서는 단서일 뿐이라는 점이다. 쿳시는 결코 ‘우리’가 ‘그들’을 완전히 이해하는 장면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한 오만함은 절대 보이지 않는다. 확언과 자신은 제국에 속한다. 그것은 ‘우리’인 줄 미처 몰랐던 ‘우리’의 것이다. 따라서 쿳시는 가능성을 내비치기만 한다.

쿳시는 치안판사 개인의 삶을 전복시키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전복은 더 나아가 이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정착민과 야만인의 구도에서도 이어진다. 군인들은 모두 떠나고 정착민들은 야만인이 올까 불안에 떨게 된다. 이제 침략자는 야만인들이다. 성벽 밖에 떨어져 살던 원주민 어부들은 성벽 안으로 들어오고 주민들은 공포와 척박함에 쫓긴다. 여기에 더해 치안판사는 소설의 말미에서 매장된 뼈들을 찾는다. 이는 야만인들이 한 때는-마치 제국민들이 그랬던 것처럼-침략자였으며 약탈자이고 성과 문자를 만들던 제국이었을 수 있다는 단서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치안판사는 자신들도 훗날 야만인의 유적들에 겹겹이 포개지게 되리라고 믿는다. 이제 우리는 문명과 비문명을 구분할 수 없다. 야만인과 정착민, 지배자와 피지배자, 압제자와 희생자들의 경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바야흐로 완전한 추락이다. 사실 위와 아래는 더 이상 의미가 없으므로 추락이라는 단어는 걸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쿳시는 ‘우리’와 ‘그들’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얇은 선을 아예 지워버린다.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고 그들은 우리다. 혹은 우리는 그들의 미래고 그들은 우리의 미래다.

이러한 해체는 언뜻 울적하고 비정하다. 이해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해도, 여전히 차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쿳시는 냉철한 작가이긴 하다. 그는 관대함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언어로 우리가 그토록 신봉하는 문명이라는 것, 나아가 문명인으로서의 우리의 존재를 집요히 해체한다. 그렇지만 쿳시는 차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쿳시의 소설에는 언제나 일말의 희망이 존재한다. 완전하진 않아도 분명 희망이다. 흰 눈이 오기 전에 하늘에 먹구름이 끼는 것과 같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치안판사의 꿈은 현실로 나온다. 여자와 만나곤 하던, 눈이 내리는 바로 그 꿈이다. 눈이 내리는 풍경은 야만인들이 들이닥칠 계절인 겨울에 대한 전조이기도 하나 꿈속에서는 여자가 있던 공간이다. 동시에 현실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여자가 화덕을 만들듯이 아이들은 힘을 합쳐 눈사람을 만든다. 꿈과 현실이 교차한다. 팔조차도 없는 눈사람이지만 치안판사는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며 생각한다. “그다지 볼품없는 눈사람은 아니다.” (p.256)라고.

끝까지 치안판사는 완전한 이해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오래전에 길을 잃었지만 어디로 통하는지 모르는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는 사람”(p.256)으로 자신을 인식한다. 그래도 그는 눈사람을 보았다. 또는, 후대에 전할 점토판이 있다. 아니면, 야만인이 성문에 도달하면 진실을 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그래서 쿳시의 소설은 마냥 차갑지 않고 미지근한 온도를 느끼며 책을 덮게 한다. 사람의 체온과 유사한 온도다.

처음 쿳시를 접했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나의 첫 쿳시는 바로 이 [야만인을 기다리며]였다. 이전에 나는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동정했으며 그들을 차별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평균보다 이타적이고 이해심 많은 듯한 내 태도를 속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폭력의 주체와 대상 모두 나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이들에 대한 적당한 경멸과 동정을 유지하며 나는 균형을 잘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그것을 모두 부수는 내용이었다. 나는 우리이자 그들이었다. 우리 사이에 성벽은 존재하지 않았다. 벽은 내가 몸 담고 있는 사회적 제도의 산물일 뿐이며 언제든 시간과 맥락에 따라 해체될 수 있었다. 나는 어떤 위치에서는 타자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타자화하고 있었다. 하나 이 또한 언제든 뒤바뀔 수 있었다.

이어 쿳시는 [포]에서는 나의 소수자성을 해체했고 [나라의 심장부에서]에서는 욕망을 해부했다. 동시에 서술자의 진실성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서술로 내가 계속 묻고 생각하게 했다. 책을 읽는 나의 주관에 대해서도 그 진실성을 시험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 뒤로도 쿳시와 많은 탐색을 함께했지만, 치안판사가 길을 잃었듯이 나 또한 답을 조금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쿳시는 길을 보여주지는 않아도 좁은 길로 통하는 갈림길에 빛을 비춰준다는 사실이다. 그곳은 분명 갈림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락하고 단단한 확신의 성벽 안에서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타자들과 맞부딪치고 살 것인지를.

마지막으로 쿳시의 자전적 소설 [소년시절]에서의 일부를 인용하고 싶다. 쿳시의 소설가로서의 사명감이 느껴지는 문장들이다.

오직 그만이 생각하도록 남겨진다. 그는 어떻게 그 모든 책과 모든 사람과 모든 이야기를 머릿속에 간직하게 될까? 그가 그것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렇게 할까?
(J. M. 쿳시, 소년 시절, 문학동네,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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