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 이즈 섹스? - 성과 충동의 존재론, 그리고 무의식 여이연이론 36
알렌카 주판치치 지음, 김남이 옮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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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란 무엇인가?

 

알렌카 주판치치는 지젝과 함께 슬라보니아 정신분석이론자이다

그녀는 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 섹슈얼리티를 정신분석의 고유한 철학적 문제로 고려하고자 한다.


라캉은 나는 지금 섹스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섹스와 같은 만족을 얻는다고 말한다. 성충동을 승화하기 위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것이 섹스와 같은 만족을 준다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기와 섹스의 만족이 어떻게 같은 것이며, 성적만족에서 도대체 이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성개념이 도발한 추문 혹은 오해에 대해 그 개념이 너무 지성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말하기의 만족 (혹은 모든 종류의 지적행위에서의 만족)성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지적 행위들의 굴욕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최소한 섹슈얼리티를 놀랍게도 지적인 행위로 승격시키는 것에 대한 것이다”(10)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인간의 성충동에 대해 대응하는 방식을 승화가 아닌 다른 것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단 이 성충동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살펴보자.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해보자면 유아기의 성충동이라는 것은 섹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가 태어나 언어프로그램이 심어지기 이전의 쾌락(주이상스)가 다형적인 충동으로 남아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에서 이란 무엇인가. 알렌카 주판치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정신분석에서 성은 무엇보다도 개념이다. 이 개념으로 현실의 끈질긴 모순을 정식화한다.

둘째, 이 모순은 부차적 차원에 제한되거나 환원될 수 없고, 이 존재자들의 바로 그 구조화 속에 바로 그 존재 속에 모순으로서 연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성은 존재론적 문제인 것이다.

이어가는 논의에서 성과 존재론에 관해 다시 물을 것을 그녀는 제안한다. 이 책이 제안하고 있는 바는 성적인 것이 정신분석에서는 어떤 위치이자 관점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성은 우리를 끊임없이 씨름하게 만드는 모순의 독특한 형식이라는 점 때문에 위치가 중요한 것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떠한 모순일까

오늘날 치료사들은 섹슈얼리티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여전하다. 말하지만 섹슈얼리티를 일반적인 인상 특히 유아 섹슈얼리티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섹슈얼리티는 성교’, ‘성적실천들로 환원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게도 섹슈얼리티가 바로 다양한 성적 실천들, 암시들, 의미들의 배후의 심오하고 아주 까다로운 문제들이였다는 점은 아이러니 하다.

프로이트 역시 성적 행위는 섹슈얼리티 자체의 내재적 곤경과 어려움으로 재 이중화 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또한 그 자체가 중요한 존재론적인 물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프로이트 역시 섹스는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것이라고 답한 적도 없다. 오히려 그는 당신이 말하는 그 섹스라는 존재가 도대체 뭐란 말이오?”라고 되물었다. (19)

알렌카 주판치치는 프로이트 이론에서 성적인 것(탈구된 부분충동들이란 의미에서) 인간이라고 불리는 동물의 궁극적 지평이자, 일종의 환원불가능한 인간성의 정박이라고 간주할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성적인 인 것은 비인간의 작동자, 탈인간화의 작동자라고 말한다.

무슨 뜻인가?

성적인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이 인간의 본능적 차원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체의 출현과 동연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주체의 출현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주체는 상징계 내에서 주인기표의 삽입에 있에 발생한다고 보았을 때,  주인기표(언어적세계)와 함께 성이 주체를 출현하는데 그 역할을 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주인기표는 성충동을 억압하면서 주체의 출현을 도모하게 된다. 주인기표란 우리를 언어적 세계로 포획하기 위해 우리에게 강제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아버지의 이름즉 부성적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심리치료에서는 섹슈얼리티는 특정 경험과 기술로 축소시키거나, 부수현상으로 만든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성에 관한 문제이거나, 성을 과장된 것으로 일축해 버리는 관점으로 본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는 완전한 성적 만족의 불가능성을 무의식적 섹슈얼리티 그 자체의 구성적이고 통합적인 부분으로 간주한다. 성적인 것에 대한 의미를 생산하기 보다 성을 실재의 차원으로 복귀시키는 것. , 성을 인간적으로 생산된 모든 의미의 궁극적 지평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본래적인 무의미로 생산하는 것. 다시 말해 실재의 차원에서 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정신분석의 과제가 될 것이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유아 섹슈얼리티란 유아는 성적존재이며, 그것은 존재하지만 생물한 적이자 상징적인 프레임의 결여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실제적인 성교와 같은 성적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러나 유아기의 성적충동은 복합적인 성적충동(보기, 만지가, 빨기 등과 같은 서로 다른 충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통일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성적충동은 성기라는 기관적 통일성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아닌 탈자연화된 충동들의 역설적이며 인공적인 자연화인 셈이다.

말하자면 빨기, 구강충동이 어떻게 섹슈얼리티와 만나는가? 이것에 왜 성적인가에 대해 논의가 누락되어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라플랑슈는 이것은 연습했던/ 실천했던어떤 만족이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식 완전히 생략하는 설명이며, 쾌락을 성적으로 만드는 것은 쾌락 혹은 만족 그 자체가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타자속에서 있지만 오직 잃어버린 것으로서만 아이들에게 최초로 들어오는 어떤 것, 즉 마이너스와의 조우인 것이다. 유아의 충동들과 관련된 향유를 만드는 것은 바로 그 향유의 무의식(그것의 존재론적 부정성)과의 관계인 것이지, 좁은 의미에서 성교와 관련된 의미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무의식은 억압에서 시작된다고 보았을 때, 사실상 억압은 오직 억압되는 것으로만 나타난다고 볼수 있다. 억압의 형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성적인 것이라고 볼수 있다는 것이다. , “섹슈얼리티는 그 자신의 존재론적 불확실성 속에 있는, 무의식의 바로 그 거기-있음과 관계하는 것이다.” (30) 그리고 이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데, 무의식은 섹슈얼리티에 있는 존재론적 부정성이라는 존재의 바로 그 형식, 섹슈얼리티와 지식의 독특한 방식/분열의 연결 때문에 이 형식은 현실적으로 인식론적이라고 설명한다.

이와 관련하여 존재론적 부정성이란 무엇인가?  사라진 어떤 것. 금지된 것은 성적인 것에 대한 대문자 기표가 아니라 그런 대문자 기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의식적 지식과 성은 연결되어 있다.

고로, 섹슈얼리티는 방탕함 때문에 규제되는 것이 아니라 대문자 기표, 대타자의 대타자가 없다는 지식 때문에 규제를 받는다는 것이다

 겨우 1장의 내용을 정리했는데도 부족하다. 처음 정신분석을 공부하면서 '성', '쾌락' 이런 기표들은 기의와 너무나 달라붙어 있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성은 성관계, 쾌락은 오르가즘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라깡은 오히려 성관계는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제는 이러한 기표들은 자유로워 졌기는 하나, 아직도 알듯 모를듯 명확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루하루 쌓이는 것 같다가 도대체 내가 뭘 알고 있는것이지? 답답하고 또 답답하다. 그러나 여기 나의 주이상스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결코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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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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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멀리왔지만 아무것도 변한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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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교수의 세계철학사와 함께 읽는다
예전에는 지루했는데
지금보니 이정우교수님의 책은 뛰어난 맥락설명과 철학사를 관통하는 개념의 시원을 놓치지않고 설명한 뛰어난 저서 이다 이번에는 완독을 목표로 열심히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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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덮은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주인공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자네'라는 호칭이 기억이 날뿐. 

교수가 그를 부를때 언제나 '자네' 였는데, 그는 그런 교수를 사랑했다. 

그의 고양된 지식에 경탄하고, 그의 한마디 사소한 행동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그린 감정의 파노라마이다. 그가 교수의 집에 기거하면서 그의 지적세계에 몰두하면서 그는 고립된다. 

그가 교수를 사랑한다고 그의 사랑을 목말라 한다는 것을 소설의 중간쯤 갔을때, 

나는 이 사랑이 이성간의 사랑을 넘는 다른 종류의 사랑. 그렇다고 동성애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떤 종류의 사랑인지 나도 모르게 분절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펼쳐지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한줄기의 빛으로 모으고 싶었는지 모른다. 

결국 교수 역시 감정의 혼란을 겪고 있는 이였으며, 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충동과 억압의 반복된 삶의 궤도였을 뿐이였다. 


'자네'의 사랑이 어떤 종류의 사랑이였는지 뭐가 중요하겠는가? 

나는 나와 다른 타자의 혼란스러운 감정에 휘말린 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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