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엘렌 식수 지음, 신해경 옮김 / 밤의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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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개서 읽고 있다. 한번 몰아쳐서 읽을 책이 아니다. 숨을 골라야만 한다. 

아직 읽는 중인데, 읽으면서 책의 내용과는 무관한 것들이 떠오른다. 

무의식을 건드리는 책인듯 싶다. 

우리에게 책은 우리를 꿈꾸고 기다리는 문, 우리에게서 달아나지 않는 타자의 꿈입니다. <<광택>>도 저를 그렇게 기다리고, 저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 책은 제게 시간을 줍니다. 이것이 글쓰기의 수수께끼 중 하나입니다. 모든 책이 우리에게 시간을 주지는 않거든요. <<광택>>은 그 자체가 시간으로 새겨진 데다, 너무도 풍부하고, 두텁고, 손때 문ㄷ은 순수한 글 물질이기 때문에 시간을 줍니다. - P104

누가(무엇이) 우리를 신경쓰지 않는가/우리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
클라리스 리스펙토르가 <사랑>이라는 글에서 얘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
....눈먼 남자는 우리가 자신을 관찰하는 걸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관찰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살고, 욕망하는 사람들이죠. 우리는 관찰되는 관찰자입니다. 하지만 관찰되는 대로, 보이는 대로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눈이 먼 채 껌을 씹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 P111

우리가 꿈의 학교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 도끼날을 다루고 받아내는 동시에 저의 얼굴과 다르지 않지만 적나라하게 보이는, 제 영혼의 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힘입니다. ‘신‘의 얼굴은 우리라는 구조물, 이 사소하고도 거대한 거짓말들, 친정 식구들을 먹일 만찬을 준비하고 자식들에게 저녁을 해주려면 끊임없이 짜내야 하는 사소한 비진실들의 정체를 밝히는, 혼비백산할 현시입니다. 놀람으로써만, 우연에서만, 그리고 산산이 깨부수는 잔인성을 동반하고서만 일어나는 폭로. 진실의 타격 밑에서 우리는 달걀 껍데기처럼 부서집니다. 삶의 경로 바로 한가운데에 나타나는 종말. 우리는 삶을 잃습니다. - P113

우리는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글쓰기의 정체입니다. 시작하기죠. 행동과 인내와 관련이 있습니다 꼭 목적지에 닿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글쓰기는 도착하기가 아니니까요. 대체로는 도착하지 않기입니다. 우리는 몸을, 걸어서 가야합니다. 우리는 자아를 버려야 합니다. 글을 쓰려면 우리는 얼마나 도착하지 않아야 할까요, 얼마나 멀리 방랑하며 신발을 닳게 하고 즐거워야 할까요? 우리는 밤만큼 멀리 걸어야 합니다. 각자의 밤만큼 멀리요. 자아를 뚫고 어둠을 향해 걸어야 합니다. - P116

작가들은 타자와 관계하는 순간 나타나는 불가항력적으로 위협적이고 또 위협받는 어떤 것, 우리가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것,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무슨짓을 하든 늘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어떤 것을 폭로합니다. 예컨대, 진정한 인도주의적 봉사를 택한 저들이 다루는 것이 이 불가피하고 끔찍한 과오의 상황, 타인을 구함으로써 자신을 구할 기회가 상실된 상황입니다. 제게 중요한 작가들은 우리가 견딜수 없는 것을 어느정도까지 견뎌야 하는지 압니다. 우리가 이미 어떤 가족 대하소설에 얽혀 부정의 수혜자이거나 희생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족하지요.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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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끄 라깡 에크리 중에서 

"나 기능의 형성자로서의 거울 단계 "  새물결 p.113


이번 라깡의 논문에서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공격성이다.

이것은 나르시시즘과 공격성과도 연관이 있다는 논의로 이어지는데,

주체가 거울을 보며 환호할 때는 언제고, 공격성을 갖게 되는 것일까?

거울단계는 19368월 마리엔바트에서 열린 제14차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발표되었다.

거울단계에 대해서는 라깡이 라는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보기 위해 이 논문을 작성했다고 보여진다.

거울단계와 정신분석의 공격성과 관련하여 라깡은 13년 전에 학회에서 도입한 거울 단계 개념에 대해 설명한다.

거울단계이론은 코기토로부터 직접 유래 하는 철학과 대면한다고 라깡은 말한다. 의식하는 존재는 즉 '자아'와 관련있다는 얘기로 생각된다. 

라깡이 소개하는 거울단계는 다음과 같다. 

침팬지는 거울을 보고 별 흥미가 없어하는데 비해, 아기들은 자신의 모습에 환호한다. 그러나, 이 덩어리가 자신임을 증명해줄 대타자 어머니가 필요하다. 어머니는 아기를 이게 너라고 말을 함으로써 비로소 자아라는 허상이 구성된다. 덩어리에 언어가 도입되면서 '자아'가 생긴다. 아기는 엄마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증받는다. 그러므로 존재는 타자에 의해 외부의 장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를 자기자신으로 간주하는 오인속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원초적 불화에 해당한다. (외부의 이미지를 자기자신으로 간주함으로써 소외됨으로 이것은 원초적 불화와 소외로 인한 질투, 공격성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언어가 도입되기 이전의 영아는 자신의 몸을 파편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자아와 타자가 구별이 되지 않는다. 거울단계를 거치면서 '자기'라는 의식이 생성되지만, 이는 거울을 통한 자기이미지에 불과하므로 실재와는 불일치 한다. 이러한 불일치는 실재의 귀환으로서 공격성을 불러일으킨다. 


동기간의 질투는 이러한 원초적 질투의 구조와 닮아있다. 거울과 실재의 나의 관계처럼 닮아있기에 동기간의 질투심이 닮아 있다. 그렇기 떄문에 질투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타자에 대해 더 많이 느끼는 것 같다. 


이것은 원초적으로 불화의 상태라고 본다. 왜냐하면 거울단계에서 조각난 신체이미지로터 육체의 총체성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고 주체를 소외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 환상은 라깡이 말했듯이 점근선적이다. 그러므로 파편적인 신체이미지는 히스테리적 증상으로 회귀한다. 


"거울에 비친 나를 사회적 나로 전환시키는 시기에서 유래하는 편집증적 소외의 전제 조건으로 위치시킨다. " 


라깡은 거울단계에서 이마고의 동일화와 원초적 질투의 드라마를 통해 이후 나를 사회적으로 정교화된 상황과 연결시키는 변증법을 개시한다. "  


거울에 비친 나를 '자기' 즉 사회적 나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것이 나라는 강력한 믿음이 필요하다. 이것을 라깡은 편집증적 소외가 전제조건이 된다고 본것이다. 이마고의 동일화는 원초적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내가 나의 이미지를 질투한다는 것인가?? ) 


거울단계에서 선취된 자아라는 이미지는 자신(실재)와 동일하지 않으며, 타자에 의해 선취된 이미지이므로 자아의 소외는 필연적이이다. 거울단계이전에는 자아와 타자의 구별이 없는 주이상스의 그 자체의 상태라면 거울단계 이후에 도입된 세계는 '나'라는 세계가 어디에나 투사되는 나르시시즘적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라깡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나오는 형제의 독기품은 눈을 사례로 들며, 나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너를 질투하는 것이다. 

한편, 정신분석의 공격성이라는 논문에서는 

공격성은 우리가 나르시시즘적이라고 부르며, 인간의 자아와 인간의 세계를 특징짓는 실체들의 영역의 형식적 구조를 규정하는 동일화 양식과 상관관계에 있는 경향성이라고 본다. 


다시 정리하자면, 거울단계는 자아의 기원이 되는데, 거울의 비친 자신의 모습을 실재라고 믿는 것으로 간단히 이해 해볼수 있다. 어머니의 호명은 상징계의 도입이 될 것이다. 자아는 통합된 자신의 이미지를 기원으로 만들어지지만, 그 통합된 이미지는 사실 주체의 머리속에 인형과 같이 박혀 있을 뿐 허상의 이미지인 것이다. 자아가 실재(신체, 존재)와의 불일치의 결과는 주체를 소외시키기 때문에 허상의 이미지에 대한 질투와 같은 공격성을 갖게 만든다. 또한 자아는 나르시시즘의 기원이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동일시 과정을 통해 나타난다. 자기와 거울이미지의 동일시를 통해서 파편화된 신체에서 전체성 이미지에 환호하게 된다. 이 역시 나르시시즘의 기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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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알랑 밀레의 분석의 끝. 

(백상현교수 강의 속에서 )

대상a - 상징화되지 않는 무엇. 서구철학은 그것에 대해 호의적임. 이것은 일종의 전복적 논점 

대상a는 모든 영역에 있다. 

언어적 사유는 공백을 출현 시킨다. 우리를 좌표화시키는 것은 고정관념. 

라깡은 변화가능성, 대상a에 내기를 걸겠다는 태도를 견지한다. 

대상a는 정치적이다. 왜냐하면 그 반대편이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상징계는 타자의 것이므로 개인의 심리학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타자로부터 이식된 것이다. 개인의 심리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공동체가 생산해 낸 것이다. 정신분석이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욕망은 이미 타자의 욕망임이므로, 빠져나가는 것 역시 정치적인 것이다. 


대상a의 역사 


초기라깡은 대상a,난포착적인 것에 대해 상상계적 소타자로 보았다. 내담자가 이미지에 사로 잡힌 것으로 본 것이다.

상상계적 a,초기부터 자아개념은 공격한다.(로마보고) 상상계적 대상a는 그것이 자아와 관련된 것으로 보았다. 상상계적a를 상징화 해야 한다고 주장


1959년 세미나7에서 상징화 될 수 없는 '큰사물'을 타나토스, 죽음충동, 다른 많은 것들을 흔든다. 상징계를 포기하고, 큰사물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함. 카드의 성(상징계)을 무너트려야 다시 성을 만들 수 있다. 언어화 될 수 없는 대상을 수용하고 용인함.  


1964년에서는 큰사물을 축소시킨다. 대상a는 큰사물의 미니버젼. 상징계에 유령처럼 출몰한다. 프로이트의 초기저작을 참조하여 일상생활에 출몰하는 언어화 될 수 없는 것과 함께 산다. 


주체의 위치 

초기 - 상징계의 언표를 통해 주체성이 있다고 봄. 죽은 아버지가 언명해 주는 방식으로 주체를 확신한다. 초기에는 분석가가 죽은아버지의 역할을 한다고 봄. 유한성

1959년~1964년 - 주체는 대상a이다. (큰사물, 주이상스). 주체는 물음표다. (당시 주체를 빠져나가는 것으로 철학자들이 규정하는 흐름 시작)  

주체는 (대)타자를 감산한 나머지이다. 대타자가 정지된 순간이 나이다. 대타자가 빗금친 순간. 상징계가 작동하지 않는 순간

나의 정체성은 권력(문화)의 구조가 결정한 것이다. 타자를 거부하고 변화가 가능해지는 순간이 주체의 가능성의 순간이다.  사건적 순간. 주체는 실체도, 자아도 아니다. 권력으로부터 빠져나가는 순간 자아는 미끄러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 자아는 다시 권력을 구성하므로 또다시 권력으로부터 빠져나가야 한다. 

언어장치가 우리에게 도입하므로서 균열이 발생 = 비존재의 도입 = 대타자의 균열 = 초과/ 주이상스를 발생 / 큰사물 /대상a

--> 사건적 주체 


정체성

정체성은 동일시의 결과물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해주는 것. 정신분석 임상의 대부분의내담자는 정체성의 혼돈을 겪는다. 

초기라깡은 상징계를 고착하려고 했음. 라깡은 '도래한 사건'으로만 간주하려고 한다. 내가 누구인지 무관심하도록.

정체성은 환유만 계속된다. 내가 누구인지 규정할려는 것은 멈춤의 상태이다. 내가 누구인지 확신하는 상태는 병적인 상태이다. 상상계적 특정 단어/의미에 사로잡히는 상태는 병적인 상태이다. 


대상a를 주체를 동일하게 간주하면 흔들리는 순간이 주체적, 사건, 균열의 순간만이 주체가 된다. 현재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은 타자의 권력이 바라보는 방식이다. 우리의 삶은 $ 빗금쳐진 주체는 첫번째 죽음과 대상a 두번째 죽음에 왕복운동을 한다. 이것을 명료하게 바라보는 여정의 정신분석의 여정이다. 


정신분석의 끝

분석의 끝에서 일어나는 일 그러나 처음부터 이러한 작업은 시작된다. 

1) 안다고 가정된 주체가 추락한다.  

- 여기서 지식은 정신분석의 지식이 아니다. 정신분석은  지식을 사용한 '요령'이므로 실천이라고 부른다. 

- 정신분석은 DSM 처럼 규정하지 않는다. 이름을 주지않음으로써 추락한다.    

- 배운대로 해석을 요구하는 내담자에게 당신이 해석하라. 

- 서사의 소진, 새로운 말하는 것과 새로운 욕망의 구조는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2) 대상a가 출현하고 분리된다. 

3) 환상의 횡단 

 


라깡 정신분석의 용어 개념정리가 어렵다. 라깡이 시기적으로 혼용하고 의미를 덧붙이는 격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주 간단한 질문에 대한 답변조차 모호하여, 정리를 미뤄왔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정리를 해야 한다.  



1.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인간의 욕망은 상징계 대타자의 정해진 욕망을 따라 욕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2.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 

-> 인간은 언어적 존재이며, 상징계를 기반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상징계는 실재를 정확하게 포획할 수 없으므로 균열이 발생하고, 그러한 균열로 인해 무의식이 출현한다. 무의식 역시 언어적 기반으로 꿈, 말실수, 재담과 같이 구조화 되어 있으며, 무의식의 언어적 구조는 의식세계의 언어와 다르게 작동한다. 


3.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란 무엇인가?

라깡은 인간을 언어의 도입으로 인하여 세개의 장으로 구분된다고 보았다. 주체에게 언어가 도입되기 이전부터 언어라는 대타자의 장인 상징계가 존재하고 있으며, 끝없는 기표연쇄만이 존재하는 장이다. 하나의 기표는 다른 하나의 기표를 대리하는 체계속에서 발생하는 의미들은 상상계적 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상상계는 거울단계에서 형성된 자아이미지의 기원이 되는 장이다. 타자의 존재로 인하여 나타나는 자아이미지는 나르시시즘과 공격성을 함께 불러일으킨다. 실재계는 충동, 주이상스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 상상계의 덧붙임 : 상상계의 이자관계란 자아 대 자아 의 관계이다. 또한 상상계는 거울관계에서 비롯된 자아의 기원을 중심으로 자아이미지는 나르시시즘의 원형이자, 공격성의 기원이 된다. 공격성은 자아이미지는 타자의 이미지를 빌린 것이므로 나는 소외됨에 따라 이러한 감정은 질투, 경쟁심 등이 생기는 공격성의 기원이 된다.  


4. 대상a 

대상a는 충동의 절편으로 모든 욕망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라깡은 세미나 11에서 대상a를 네가지 부분충동으로 보는데 구강충동, 항문충동, 호원충동, 시관충동이 있다. 대상a는 실재가 회귀하였음을 보여주는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세미나17에서는 이러한 대상a를 잉여향유로 상징계 내부에 존재하는 주이상스의 보상물으로 간주한다. 

 

5. 주체

주체는 하나의 기표가 다른 하나의 기표에게 대리하면서 나타나는 효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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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사기꾼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분석에 대한 문제제기가 항상 각 분석가의 견해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의 내밀한 삶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 그것이 사기-분석가가 갖가지 의식, 격식, 의례의 방벽으로 막아내려는 저 억눌리고 배제된, 모호한 현존과 같은 것-의 기미를 띠게 된다는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 P398

모든 믿음을 지탱하는 바탕은 우리가 실천하는 근본적 소외, 주체의 이중적 항으로 이뤄진 소외입니다. 요컨대 믿음의 의미효과가 가장 철저하게 소멸하는 듯이 보이는 바로 그 시점에, 정확히 믿음의 현실이었던 어떤 것을 통해 주체의 존재를 출현시키는 소외이지요. - P399

분석은 주체가 스스로를 욕망으로 경험(실험)하는 중심적 결여에 관여합니다. 심지어 분석은 주체와 타자의 변증법의 중심에 열린 간극 속에서 뜻밖에도 중간이라는 위상을 차지합니다. 분석속에는 아무것도 망각할 것이 없는데, 왜냐면 그것은 그것이 조작을 가한다고 예상되는 어떤 실체도 심지어 성욕의 실체조차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이 성욕을 건드리는 것은 오직 그 성욕이 시니피앙의 행렬-소외와 분리라는 이중적 계기를 통해 주체의 변증법이 구성되는 곳으로서의 시니피앙의 행렬-속에서 충동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한에서입니다. - P401

우리에게 대상a는 경험 자체 속에서, 전이에 의해 지탱되는 과정과 추이속에서 특별한 위상을 가진 것으로 부각되는 대상입니다.

전이의 청산은 무슨뜻일까요? - P402

이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 사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주체가 분석이 종결될 무렵 여러분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기 시작할 때 청산된다고 간주되는 것은.... 오로지 무의식을 닫아버리는 방향으로 전이를 작동하게 만드는 속임수를 영원히 청산한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그러한 속임수의 매커니즘... 자신을 사랑해줄 것 같은 이를 참조하면서 주체는 타자로 하여금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자신에게 확신시키게끔 그 타자를 신기루의 관계 속으로 유인합니다.
추앙하게 만드는 것....
프로이트는 그것이 동일시라 불리는 기능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됨을 지적합니다.
동일시는 거울상적인 직접적 [무매게적] 동일시가 아닙니다. 전자는 후자의 버팀목입니다. 그것은 주체가 타자의 장 속에서 선택한 조망의 지점, 즉 그곳에서 보면 거울상적인 동일시가 만족스럽게 보일 수 있는 지점을 지탱해주빈다. 자아이상의 지점은 흔히들 말하듯이 주체가 타자에게 보여지는 것처럼 자신을 보게 되는 지점입니다. - P404

이는 주체로 하여금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에게 만족감을 주는 어떤 이자적 상황속에서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게 해줍니다.
사랑이 거울에 비친 신기루인 한에서 사랑의 본질은 속임수입니다. 사랑은 이상적 지점에 근거한 조망의 지점을 도입하는데 필요한 단 하나으 시니피앙, 타자 속에서 어딘에 위치한 그 대문자 I를 통해 쾌락의 준거라는 수준에 설정된 장 속에 위치합니다. 대문자I는 내가 [타자에 의해] 그렇게 보였으면 하고 바라는 대로 타자가 나를 바라보는 지점이지요..... 이러한 과정에서 분석가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인데요. 분석가의 발견은 또 다른 차원, 즉 우리가 소외의 관계를 위치시켰던 차원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 P404

피분석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불가해하게도 내가 네안에서 사랑하는 것은 너 이상의 것, 대상a이기 때문에 나는 너를 잘라낸다." 그것이 바로 유방 콤플렉스가 뜻하는 바입니다.
"너에게 나를 준다. 하지만 나라는 증여물은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참 신기하게도 똥이라는 선물로 바뀌어버린다. " - P405

하지만 주체가 (분석가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거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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