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횡단 속에서 마주치는 공백

  우리는 주이상스를 상실했다와 함께 주이상스를 억압하기 위해 인간은 문명을 발전시켰다는 가정은 라깡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대전제로 간주된다. 그러나 억압된 주이상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다시 돌아온다. 어떻게 그것이 회귀하는가. 주이상스의 회귀는 우리 삶 속에 구멍을 통해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증상' 이 그러하다. 

정신분석과정에서 우리는 증상을 구성해내면서 그 의미를 파악하는데 골몰한다. 기존의 담화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구멍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지 새로운 의미가 분출될 때까지  내담자는 말을 해야 한다. 라깡 정신분석이 기존의 상담과 다른 지점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 구멍을 봉합하지 않는다는 것. 

내담자의 고리타분한 서사가 끝이 나면, 기존의 언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이 우리는 꼼짝없이 공백과 마주하게 된다. 공백에 마주함은 분석의 시작점이 된다. 여기서의 공백이란 앞서 말한 구멍과는 좀 다른 듯 하다. 환상을 횡단한 내담자가 마주하는 공백은 '무의미'의 지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기표연쇄들이 힘을 잃고  무의미로 추락하는 사태이다. 공백의 아가리 속에 우리는 들어간다. 내담자의 실어증은 공백을 마주한 댓가로 우울증을 가져오지만, 분석과정에서 우울증은 그리 심각하지 않다. 증상의 원인으로서 대상a에 대한 무의식의 지식을 어느정도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간주하는 주이상스를 대타자에게 빼았겼다고 믿기 때문에 모든 사단이 일어난 것이라면, 

대타자는 이미 죽은 대타자이므로 우리는 더 이상 팔루스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증상이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죽은 대타자만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대타자 역시 우리를 심대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살아있는 대타자라고 볼 수 있는 어머니대타자와 주체의 관계에서 비롯된 대상a 역시 문제가 된다. 

우리의 욕망의 문제들이 이 두 측면의 대타자와 비롯된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공백과 마주함'이라고 말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즉, 대타자의 억압이 없으면 주이상스도 없으므로 우리 설정 이전의 상태는 공백이 아닌가?

공백의 이동 

  위에서 말한 공백은 환상의 횡단 끝에 만나는 공백이고, 지금 말하는 공백은 우리 삶 속에서 마주치는 공백으로 구멍과 같다 .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개인이 대타자와의 설정된 관계 구조 속에서 반복되는데, 이러한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라깡은 말한다.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조 속에서 공백의 이동이다. 도둑맞은 편지에서 처럼 기표의 위치에 따라서 상황이 변화하듯이, 우리는 공백을 이동시킨다면 의외로 우리의 삶의 문제들은 해결 될 수 있지 않을까? 공백의 이동은 나의 구멍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증상의 이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 싶다. 

어떻게 이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될까? 

다시 기표의 힘을 빌리는 수 밖에 없다. 결여의 기표를 도입하여 대타자의 말들로 오염되지 않은 기의들을 생산하는 것이  소소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그러나 그전에 우리는  공백을 지켜야한다. 곧 증상을 사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체의 非의미는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럴려면 공백의 불안을 견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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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그 사람의 비의미를 의미로 바꾸려는 시도속에 놓여있다.  수많은 욕망의 대상들 사이에서 우리의 선택은 무의식의 논리에 따른 대상의 선택이지, 의식적 수준의 대상은 아니다. 팔루스로서 파트너는 욕망의 리스트 속에 있지만, 공백의 파트너는 무의식의 욕망의 대상이며, 그러한 욕망의 발생에 대해 의식적 주체의 설명은 빈약할 수 밖에 없기에, 우리는 왜 대상을 사랑하는지 알 수 없다.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알고자 하지만, 우리는 그 대상의 의미도 자신의 왜 그 파트너를 선택하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대상의 무의미는 곧 자신의 무의미와 맞닿아 있다.  


사랑의 매몰은 상상계적 관계 즉 대타자의 주이상스 였던 그 세계에 대한 강한 복귀의 시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증상으로서의 사랑은 양가감정 속에서 고통스럽고, 일상이 마비될 정도로 집착하기도 광기에 사로잡힌다. 그것을 멈출 방법을 모른다. 그와 같은 현실은 무의식적으로는 증상을 향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멈추지를 못하고, 그것을 해결할 어떤 언어도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고통스럽기에 그것을 봉합하기 위해 대타자의 언어(팔루스)를 끌어당긴다. 모든 것이 착각이라고, 그는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나를 배신할 것이라고, 그에게 나는 욕망이 대상이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며, 참혹할 것이라고. 그런데 이것은 누구의 대사일까? 대타자의 언어인가. 무의식의 논리인가?  이렇게 부인과 억압과 흔들림 속에서 주체의 욕망은 어디에 있는가?  주체는 파트너의 욕망이 대상이 되기만 한다면  행복할까?  우리의 그 공허가 채워질까?  주체는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상대방을 분절한다. 다시 세상의 규범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히스테리증자는 언어로서 사랑이라는 기표를 믿지 못한다. 또 다른 주체는 사랑을 할 때 자신을 마조히즘적 구조를 밀어넣는다. 도착적 사랑의 마조히즘적 구조는 자신을 제물로 바치면서 대타자의 사랑을 받으려고 한다. 이러한 사랑의 구조는 매우 고통스럽다. 의식적으로는 스스로를 고통에 몰아넣으면서 무의식은 증상으로 이를 향유하고 있기 때문에, 벗어나기가 어렵다. 누군가 매번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마조히즘과 죽음충동의  관계가 나는 밀접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에 대한 수많은 규정을 버리고, 다시 사랑이란 기표를 공백의 기표로 만들어야 한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사랑은 수많은 오염된 말들에, 대타자의 생각에 맞서서  그의 非의미를 지켜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의미에서 함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 그것은 정신분석의 사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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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타자의 부흥 

  라깡의 성도착의 구조를 한마디로 말하면 '대타자 부활 작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은 대타자를 살려내는 부흥의 가공을 통한 주이상스의 소환이 도착증자가 목적하는 바이다 . 

도착증자가 부흥 시키려는 대타자는 상징계 대타자가 아니라, 거세 이전의 빗금없는 대타자A이다. 언어의 거세이전 다형적 충동의 세계에서 유아의 신체는 쾌락이 전부인 신체이다. 아이는 어머니의 주이상스의 대상이고, 이 팔루스와 아이는 자신을 동일시 한다. 이들 사이에 아버지의  개입으로 아이는 더 이상 어머니와 아기는 서로를 쾌락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어머니는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야 하고, 아이는 법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 어머니 대타자도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면서 거세된다. 죽은 대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주체는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머니대타자를 주이상스의 화신으로 만든다. 

신경증자의 상실한 주이상스는 유령과 같은 대상a가 된다. 대상a는 알 수 없는 증상으로 돌출될 뿐, 상실한 것의 보상에 관해서는 언제나 실패할 뿐이다.  그러나 성도착자는 상실한 주이상스를 불러내는데 성공하여, 쾌락한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적극적으로 대체하려고 일종의 '설정'을 마련한다. 페티쉬는 대타자주이상스의 절편을 소유함으로써 살아있는 대타자를 소환하기 위한 미끼다. 빼앗긴 주이상스를 소환하려면 죽은 신을 살려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그가 설치하는 무대의 소품은  '스타킹'과 같은 어머니의 일부인 경우가 많다. 그들의 무한쾌락은 어쩌면 대타자의 장난감이 되고자 하는 협소한 쾌락일 뿐이다. 신경증자에게 대타자는 죽은 신이지만, 도착증자에게 대타자는 존재하는 신이 된다.  

신경증자와 도착증자 사이 

   신경증자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지 못한채 욕망 속에 던져진다. 도착증자는 욕망의 환유를 차단하는 기예를 발휘하여 대타자의 주이상스의 자리에 가고자 한다. 

신경증자에게 관음은 수치심을 불러일으키지만 도착증자에게 관음증은 수치심을 초과하는 쾌락이다. 신경증자는 '응시'의 충동은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으로 승화 될 수 도 있고, 불안을 야기하는 공포일 수도 있지만, 도착증자는 관음을 관음하거나, 노출증을 통해서 대타자의 응시를 적극적으로 불러낸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살아있는 '응시' 즉, '여고생들의 눈들' 인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 신체의 생물성(신체사물의 존재감)'이다. 

  신경증자들도  흔히 '관종'이라 불리는 형태로 응시의 쾌락을 즐기고 있기는 하나, 그것은 아버지에 법에 위반되지 않기에 도착증자의 쾌락을 모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경증자에게 "도착적이다"라는 말은 수치심을 초과하여 적극적으로 '물신'을 향유하려고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도착증자는 '법'을 초과해야만 그들의 쾌락이 보장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거세되지 않은 대타자가 살아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주이상스는 누구의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살아있는 대타자에 의해 그들 역시 소외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쾌락은 그들의 것이 아닌 대타자의 주이상스이기 때문이다. 라깡적 윤리에 비추어 보면 도착증자의 역시 대타자에 종속되어 있는 비주체적인 존재일 뿐이다. 신경증자도 도착증자도 모두 대타자의 주이상스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대타자라고 해서 그들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대타자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라깡은 우리 모두는 '도착증자'라고 말했을 때, 그가 의미한 바는 우리가 '문명'을 물신처럼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경증자들은 대타자의 팔루스를 물신으로 삼는다. " 신경증자는 문명(아버지판본)을 통해 성적인 욕망을 실현하므로 우리 모두가 도착증자(백상현 강의)"라는 의미이다.  팔루스의 차단으로 보자면 성도착자가 월등할 것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성도착자가 세운 물신이 전례없는 새로운 팔루스라면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보는 입장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끊임없이 죽은 대타자의 망령과 살아있는 대타자를 왔다갔다하는 불안속에서 가끔 정박하여 정신을 차려보면 세상이 멈춘듯 적막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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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엑스쿨투라 5
알랭 바디우 &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지음, 현성환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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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과 정치

 

무능에서 불가능으로

 

바디우는 정신분석에서 치료란 하나의 형식을 전제하는 동시에 그것을 가로지르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그 하나의 형식은 무의식의 객관적인 구조이며, ‘치료란 그 구조들의 연관되면서 그것을 재단하고 조각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무의식의 객관적인 구조란 무의식이 언어로 구조되어있다는 전제 아래 분석주체의 구조를 시니피앙의 분석과정으로 생각된다. 무의식의 분석은 일반적인 치료의 목표인 회복은 아니다. 바디우는 분석의 목표가 주체가 다시 스스로를 일으켜서 새로이 살 수 있는 실재의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분석과정을 통해 상징계와 상상계의 직조된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했던 것 역시 대타자의 욕망의 산물임을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가로 지르는 행위에 해당이 될 것이다.

 

라깡은 치료의 목적이 무능을 불가능한 것으로까지 들어올리는 일 이라고 말한다. 바디우는 정신분석은 분석수행자의 무기력을 실재(불가능)로 들어올리는 일이며, 이것을 통해 무능이 타개 될 수 있다고 보았다.

, 상상계의 함정에 빠진 주체가 스스로 상징화의 능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정신분석이 실재의 지점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바디우는 철학적 측면에서도 이점은 주목할 만하다고 보았다. 치료행위는 무의식의 구조(형식)을 가로지르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이 형식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실재와의 만남을 이론화 하려면 그 형식적 문맥에 연결시켜야 한다. 바디우가 형식적 문맥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를 내담자의 구성한 자신의 무의식의 논리구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라깡은 과학주의, 몽매주의라는 두 가지 암초를 피해가며 치료에서 하나의 단절을 상정한다. 이 단절은 무의식의 합리적 형식들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바디우는 있는 것의 형식과 이 형식과 결별하는 것이 병존하는 지점(‘실재와의 접점’), 즉 형식들의 문맥 속에서 실질적 단절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데 알맞은 형식주의에 대한 연구를 한다. 그것은 결정론이나 새로운 종교적 지평이 아닌 예측할 수 없는 실재- 사건-을 인정하는 하나의 철저한 유물론이다.

 

있는 것의 형식과 결별이란 무엇인가. 이 것은 비존재, 우리가 대상으로 현시화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상징화할 수 없는 실재를 조우하는 지점이 바디우가 이 형식과 결별이 병존하는 지점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지점, 형식들의 포함될 수 없는 지점을 사유할 수 있는 형식주의를 그는 연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점에서 자신을 철저한 유물론자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정신분석을 받을 필요는 없다.

 

바디우는 치료를 받은 적이 없다. 그는 정치적 행동과 사랑을 통한 발견, 연극적이고 소설적인 글쓰기, 수학적 형식주의 취향의 경유가 결국 철학 안으로 모아져, 분석으로 이 경험들을 중복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분석이 바디우가 말한 과정을 포함하고 있을까? 전이를 통한 자신의 반복적 사랑의 패턴 발견, 그리고 연극적 글쓰기, 시니피앙의 발견 속에서 형식(구조)에 대한 사유 그리고 개인분석이 정치적임을 깨닫게 되는 과정 등은 바디우가 언명한 실천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바디우는 어쨌든 일관된 정치적 논리에 참여하고, 다양한 철학적 상징화를 활성화하며, 실존 속에서 특히 행복했던 저는 치료없이 온전히 지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반면 루디네스코는 교육분석으로서 정신분석을 받았으며, ‘자기 횡단을 통한 정치적 참여의 명석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정신분석을 경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고통을 견디는 방법을 스스로 창안할 수 있다면 정신분석이 굳이 필요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아니에르노의 소설을 몇 권을 읽었다. 최근 노벨상으로 더욱 유명한 작품 단순한 열정을 보고 그녀는 정신분석이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스테리의 극단이 그녀를 독창적 글쓰기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고통이라 쓰고 주이상스라 읽혀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두가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신분석적 담화, 즉 상징계의 노후성을 각자가 깨닫는다면, 어쩌면 언어의 의한 우리사회의 많은 문제점들이 해결되지 않겠는가?

 

 

불가능성의 가능성

 

라깡은 정치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않는 것으로 정치활동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실제 라깡은 자신의 가르침이 어떤 형태로든 이데올로기적으로 또는 당파적으로 재활용되는 일을 금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디우에 따르면 라깡의 사유는 정치적으로 큰 파급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바디우는 라깡의 정신분석이 의미심장한 정치적 문맥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주체의 애초의 무능력한 상태와 관련하여 주체의 어떤 확충을 겨냥하는 치료의 깊은 의미를 재발견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바디우는 이것을 집단적 차원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정치의 장이란 어떤 결정된 상황이 불가능하게 막고 있는 삶의 가능성들을 해방시키는 일에 상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라깡의 치료는 그 본래의 실행에서는 탈정치적이지만, 사유에 있어서는 일종의 정치적 모태를 제안하는 것이다. 바디우는 라깡의 사유와 혁명적 유형의 행동방식 사이에서 어떤 연속성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는 혁명적 유형의 행동방식이란 국가적 억압에 의해 봉쇄된 집단의 개방성을 다시 가동시키는 것이라 본 것이다. 정신분석이 억압에 의한 개인의 유한성을 무의식에 개방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맞이하게 되는 것처럼..

 

라깡은 프로이트를 마르크스에 견주고, 자신은 레닌에 견주었다. 라깡은 정신분석학의 레닌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한다. 레닌은 어떤 인물인가? 프로이트는 의학의 치유논리, 마르크스는 코뮌주의를 약속하는 입장에 있으나, 레닌은 코뮌주의에 대한 약속이 아닌 결단하고, 행동하고, 조직하는 입장에 있다.

라깡은 정신분석을 사회적응의 시각으로 보는 것에 완강히 반대한다. 라깡에게 정신분석의 관건은 더욱 근원적인데, 그것은 정치와 상관없이 보이지만, 실은 해방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라깡의 사유는 68혁명과 1980년대 사이에 젊은이들을 총궐기하게 만들었던 추동적 요인들 중 하나였다.

바디우는 68혁명에서 급진좌파가 나타나는데 라깡의 사유가 주요하였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루디네스코는 라깡에게 68혁명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운동이였다고 보았다. 그녀는 그것은 일반화된 해방 의지가 아니라, 반대로 좀 더 잔인한 노예상태에 대한 저항자들의 무의식적 욕망을 표현한 것이었죠.” 말한다.

라깡혁명은 항상 자기가 제거한 지배자보다 더 포악한 지배자를 낳는다고 주장하였다. 루디네스코는 이는 학생들의 시위가 대학에서 과거의 스승(주인)의 기능을 제거하고 이를 의사소통과 교육관계라는 이상에 기초한 폭군적 체계로 대체되는 것과 같이, 폭력적 혁명이 대학에서 테크노크라트들이 지식인들을 대체하게 된 핵심적인 단계 중 하나 였다는 것이 오늘 날에 더욱 분명해 보인다고 말한다.

 

 

라깡의 정치적 입장

 

1969년 파리8대학에서 라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혁명가로서 여러분들의 갈망하는 것은 바로 주인입니다.”

 

라깡의 이같은 선언은 바디우에게도 삼키기 힘든 쓴잔 이였다.

혁명가로서 여러분들이 열망하는 것은 스승(주인)입니다. 여러분은 스승(주인)을 얻게 될 것입니다. ... 나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반진보주의자인 한에서만 자유주의자입니다. 다소 예외적인 것은 내가 진보적이라 불리운 운동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라깡은 정신분석적 담론이 무엇에 대해 저항하는지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도록 한다고 보았으며, 정신분석의 과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진보적인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라깡은 태도는 정신분석담론이야 말로 현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담론을 제공한다고 본 것이다. 비록 라깡이 투쟁적 사회참여를 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시사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였다. 라깡의 행보는 프랑스의 문화적 삶에 나타난 본질적 움직임을 포착하려고 했다. 라깡은 극단주의로 빠져드는 것을 막았으며, 그는 테러리즘의 진정한 방어막이자, 상징적 울타리가 되었다. “그는 오로지 정신분석 실천에만 투신함으로써, 또 실제로 그것이 정치적으로 재활용되는 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함으로써, 그러한 열망을 무화시켰다.” 그러나 일부 마오주의자들이 라깡을 내세우기도 했다. 1960년대 라깡주의에 경도되었던 젊은 지식인들이 왜 1970년대 마오주의자가 되었는가? 바디우는 라깡의 주체개념 때문이라고 보았다.

자기의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라고 말하는 라깡으로부터 반항하는 것이 옳다라고 말하는 마오로의 이행은 당연한 일이였던 것이다.

 

루디네스코는 라깡이 혁명적 지도자가 아니라 영국의 정치모델과 비슷한 입헌 군주와 같다고 보았다. 라깡은 학생들에게 어떤 전이적 지배를 행사하였으나, 라깡은 그의 추종자보다 자신에게 매혹되지 않는 이들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녀는 라깡이 급진적인 점은 인간들 사이의 교환에 대해 어두운 전망을 가졌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라깡의 치료라는 토대 위에 어떻게 혁명적 정치를 세울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그녀는 말한다. 라깡은 전통적 의미의 진보주의자가 아니며, 그렇다고 반동적인 사상가도 아니다.

 

라깡은 정치적 활동에 투신한 것은 아니며, 자신의 사유의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것도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담론은 혁명의 추동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라깡은 혁명에 숨어있는 새로운 주인을 거부함으로써 전통적 진보주의자에 속하지 않으나, 그 누구보다 급진적이라 생각된다. 정치적 활동이 상상계적 관계라면, 라깡은 대타자와 우리사이의 정치적 관계에 보다 관심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라깡은 진보주의자 인가, 보수주의자 인가?

 

몇몇 정신분석가들은 라깡에 기대면서 동성애들의 결혼과 그들의 아이 입양에 반대했다. 그러한 조치들이 아버지의 상징적 기능을 뒤흔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라깡은 동성애자 성향을 바꾸려 하지 않았고, 또 동성애자가 정신분석가가 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그들을 정신분석계에 받아들였다. 라깡은 성적차이를 생물학적 결정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를 늘 거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라깡이 1938년에 쓴 글인 가족 콤플렉스에서 라깡은 정신분석의 탄생을 아버지의 권위의 쇠퇴와 연결시킨다. 여기서 그는 아버지의 추락한 형상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가부장적 전능의 복원을 호소한 것은 아니다. 루디네스코는 정치적 측면에서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라깡을 계몽적 보수주의로 보았다.

바디우는 라깡의 타고난 재능 중 하나는 그 사유의 구성적 모호함에 있다고 보았다. 그 모호함이란 보수적인 측면과 극단적 급진성들의 요소들의 공존이기도 하다. 바디우는 인간동물의 변하지 않는 토양인 언어라는 토대는 태고의 법처럼 시니피앙이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조직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은 이러한 토대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새로운 것을 창안할 수 있다고 보았다.


라깡에게서 법은 항상 언어와 욕망의 관계 안에서 이해된다. 인간의 욕망은 무제한적일 수 없는데, 항상 타자의 욕망과 부딪히기 때문이다. 법이 이 충돌에서 생겨난다면 그것은 성서의 십계처럼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 언어적 분절이 규정하는 금지에 따라 우리의 욕망이 조직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언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관통한다고 볼 수 있다. 정신분석에서 상징계 진입 이전 유아의 욕망은 어머니의 욕망에 함입되어 있다가 아버지가 상징하는 타자의 욕망에 진입함으로써 어머니의 욕망을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조직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이렇듯 주체는 시작도 끝도 모를, 언어와 욕망의 태곳적 부터의 얽힘에 내던져짐으로써 탄생한다. 라깡은 아버지가 영속적으로 법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죽음을 통해서뿐이라고 생각했다. 법에 시니피앙을 부여하는 것은 살아있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바디우는 우리가 법과 아버지의 상징적 규정만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라깡을 반동주의자로 만드는 셈이라고 보았다. 반면에 우리가 무의식의 구조들에 사로잡혀 있긴 해도 자신의 욕망에서 물러서지 않는 지점을 도달한 주체의 경험에 방점을 찍는다며, 라깡은 해방의 사상가로서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디우는 이어 말한다. “ 사회 전체의 느닷없는 혁명이라는 관념은 의미가 없어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라깡이 총체적 혁명이나 위대한 저녁(기존 권력이 전복되고 새로운 사회질서가 수립되는 혁명의 날을 가리킨다) 을 믿지 않는 보수주의자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옳은 일이죠. 그렇지만 그는 주체의 실천적 해방을 독단적으로 폐기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비판합니다. 우리는 라깡이 'Le nom-du-pere'’les non-dupes errent(속지 않는 자들은 헤맨다)‘라는 경구로 다시 표현했다는 것을 압니다. 속지 않는 자들이란 사태의 부정적 핵심을 안다고 주장하면서 해방의 가능성을 냉소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들이죠.”

 

바디우에게 속지 않는 자들은 해방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자들 이다. 이에 대한 속지 않은 자들에 대한 맹정현의 해석은 정신분석의 목표는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극복은 단순히 욕망에 불과했던 아버지의 죽음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욕망이 이미 죽어 있는 아버지에게 계속해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있다. 이러한 작업은 아버지를 경유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며 따라서 오이디푸스를 넘어서는 것은 오이디푸스를 비켜가는 문제가 아니라 거쳐가는 문제라 할 수있다. 속지 않는 자들은 방황한다는 라깡의 말은 속아주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역설을 담고 있다.

 

백상현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말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의 마음의 방황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했다고 보았다. 개인의 차원에서건 공동체의 차원에서건 상실의 사건이 벌어졌을 때 주체는 고정관념에 의존하여 상처의 봉합을 시도한다. 이때 봉합에 참여하는 고정관념의 권위는 애도작업의 핵심이다. 라깡 정신분석에서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말하는 상징계의 권력은 말의 세계에 속한 인간을 굴복시키고, 말의 질서에 동의 하도록 만들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힘이다. 만일 이 같은 아버지의 이름에 속지 않는자들이 출현한다면 그들에게 방황은 필연적이다.

 

무엇에 속지 않는 자들인가? 아버지의 이름인가? 혁명인가? 에 따라 다른 해석으로 볼 수 있는 것 같다. ‘아버지의 이름에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해방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자 만이 헤맨다둘 중에 어떤 해석이 맞는지는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듯 하다. 아니면 번역의 문제인지.. 같이 논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듯 싶다.

 

 

루디네스코는 라깡이 이성과 현대성의 이면을 끊임없이 폭로하는 음울한 계몽의 사상가라고 표현한다. “그는 무한한 진보와 모두를 위한 행복이라는 이념을 믿지 않아요...그 변형인 공동체주의, 광적 개인주의, 그리고 특히 선동에 좌우되는 대중의 어리석음, 여론의 지배 말입니다.”

 라깡은 현재에 좌파와 우파 이 진영 간의 싸움속에 숨겨진 우리의 마음 속에 또 다른 주인을 열망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예견한 것이다. 루디네스코는 라깡의 토크빌적 측면에 대해 간단히 말하면 노쇠한 유럽, 빈의 유대인인 프로이트와 달리 라깡은 그의 전거들은 18세기 프랑스와 바로크적 가톨릭 문화, 독일철학, 20세기의 문학적 현대성, 형식 논리, 구조주의와 말라르메의 시에서 가져오고 있다고 말한다. 열거한 부분에 대한 분위기를 이해하기 위해 말라르메의 시를 옮겨 본다.

 

바디우 역시 그가 예언자임을 오늘 날의 이 일그러진 세계 이전의 인물이라고 평한다. 현재의 자본주의와 야만적 세계화, 한계를 모르는 금융화, 보편화된 신보수주의의 세계로 변화하는 시점인 1980년대 초에 사망하였다는 것은 상징적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라깡의 사유가 가장 긴요한 영역과 주제는 무엇일까?

 

루디네스코는 21세기는 이제부터 라깡의 세기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에서 보이는 일탈들은 이미 라깡이 예견한 것들이고, 우리는 라깡의 사유를 통해 그것들과 투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라깡은 물론 자신의 쾌락을 쫓는 사람이였지만, 욕망의 진리에 대한 추구를 환상으로 대체하는 맹목적 쾌락주의를 권하지는 않았으며, 타자성을 부인하면서 자기정체성을 추구하는 정신적 퇴행의 모든 형태에 맞섰다. 또한 그는 인간을 자연성으로, 생물학적 존재로, 신체와 뇌로 환원하는 행동주의와 인지주의에도 반대했다. ‘주체와 시니피앙(언어, )이론을 통해서 라깡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있는 필연적 간극을 유지했다고 보았다. 루디네스코는 인간에게서 언어와 심리적 주체성이라는 특성을 은폐한다면, 우리가 언제든 파시즘적 과학주의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녀는 신경세포(뉴런)를 면밀히 조사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약을 처방하여 고통을 다룰 수 있다는 믿는 세계에서 주체는 어디있는지 묻는다. 주체는 조롱당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뿐이라는 것이다.

 

바디우 역시 라깡이 인지행동요법을 비난했을 것이라 말한다. 증상을 의학으로 해결하고 주체를 심리학으로 다루는 현재에 대해 라깡은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소통에 전능 역시 비난 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바디우는 우리시대의 의미의 평준화, 겉치레의 만연, 물신화우리를 엄습하는 비통한 어리석음에 대해 라깡이 중요한 치유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코뮌주의의 가동

 

바디우는 코뮌주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속지 않는 자들의 전형이라고 말한다. “코뮌주의는 유토피아의 정반대이고,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실재가 갖는 진정한 이름입니다. 코뮌주의를 또는 해방적 예외들이 지닐 수 있는 다른 모든 이름을 양보하는 일은 진정한 정치적 욕망의 모든 형태를 양보하는 겁니다.” 바디우는 실제로 계몽적 보수주의자 였던 라깡은 양보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거라 말하지만, 그렇더라도 라깡은 현 세계의 비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으로 보았다. 바디우는 알다시피 공산주의자이다. 공산주의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코뮌주의가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이고 실재라면, 또한 진정한 해방이라면 도대체 어떤 세계를 말하는 것일까.

바디우와 루디네스코의 대담을 통해 라깡의 정치적 입장과 그의 사유가 미친영향과 21세기에 왜 라깡이 필요한가에 대한 의견들을 살펴보았다. 라깡 자신이 정치적 입장은 진보나 보수가 아니였고, 어떤 정치활동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루디네스코는 라깡이 계몽적 보수주의의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바디우는 그는 진보와 혁명이라는 운동 속에 숨어있는 대중의 바람인 새로운 주인에 대한 열망을 읽어낸 측면에서 그의 급진성이 보았다고 생각한다. 라깡이 우리시대에 다시 프로이트가 부활한 것 처럼 다시 부활한다면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 일까. 우리사회의 실재라는 불가능성을 접접에서 가능성을 보게되는 사회적 담론의 발명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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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엑스쿨투라 5
알랭 바디우 &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지음, 현성환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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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바디우와 엘리자베스 루네데스코의 라깡과 정치에 관한 대담을 읽었다. 일반적으로 정신분석을 개인적 영역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신분석의 사유는 지극히 정치적이다. 우리세계의 담화는 대타자의 담화로 이루어진 세계이기 때문이다. 대타자는 언어의 장소로서 우리는 언어의 토양에서 태어나 상징계(언어시스템) 속에 철저히 지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정신분석에서 치료란 하나의 형식을 전제하는 동시에 그것을 가로지르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바디우는 그 하나의 형식은 무의식의 객관적인 구조이며, ‘치료란 그 구조들의 연관되면서 그것을 재단하고 조각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무의식에는 객관적인 구조가 전제되어 있으며, 이 구조들을 분석하고, 해체하는 작업, 즉 시니피앙과 주체사이의 관계 분석을 통하여 환상의 횡단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것 같다. 분석이 전혀 일반적인 치료의 목표인 회복은 아닌 것이다. 바디우는 분석은 주체가 다시 스스로를 일으켜서 새로이 살 수 있는 실재의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가 될 수 있으며, 이는 우리의 굴복했었던 운명을 격파하여 새로운 운명, 인생을 살 수 있는 주체의 능력의 회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상징계와 상상계의 직조된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했던 것 역시 언어의 산물임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자신의 한계를 또 무한한 가능성으로 언어로 표현한다고 해서 그것이 현실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적어도 자신의 유한성에 구멍을 내는 일, 그리하여 자신을 한계지었던 언어의 둑을 유실시키면, 새로운 유류가 흐르게 될 것이다.

바디우는 말한다. “ 그것은 운명으로 보이는 것을 굴절시키고, 주체의 능력을 다시 열어젖히는 행위라고 말이다.

라깡은 치료의 목적이 무능을 불가능한 것으로까지 들어올리는 일이라는 말에서 무능, 분석수행자의 무기력을 실재로 들어올리는 일이다. 바디우는 상상계라는 함정 속에서 질척대는 주체를 자신의 상징화 능력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는 실재의 지점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그 무능이 타개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철학적 측면에서도 이점은 주목할 만하다. 바디우는 치료행위는 무의식의 구조(형식)을 가로지르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이 형식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재와의 조우를 이론화 하려면 그 형식적 문맥에 연결시켜야 한다. 바디우가 형식적 문맥이라고 일컫는 것은 정신분석이 언어를 기반으로 한 무의식의 구조를 파악하는 일이므로 이를 이론화하기 위한 문맥은 내담자의 구성한 자신의 무의식의 논리구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라깡은 과학주의, 몽매주의라는 두 가지 암초를 피해가며 치료에서 하나의 단절을 상정한다. 이 단절은 무의식의 합리적 형식들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바디우는 있는 것의 형식과 이 형식과 결별하는 것이 병존하는 지점, 즉 형식들의 문맥 속에서 실질적 단절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데 알맞은 형식주의에 대한 연구를 한다. 그것은 결정론이나 새로운 종교적 지평이 아닌 예측할 수 없는 실재- 사건-을 인정하는 하나의 철저한 유물론이다.

 

있는 것의 형식과 결별이란 무엇인가. 이 것은 비존재, 우리가 대상으로 현시화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상징화할 수 없는 실재를 조우하는 지점이 바디우가 이 형식과 결별이 병존하는 지점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지점, 형식들의 포함될 수 없는 지점을 사유할 수 있는 형식주의를 그는 연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점에서 자신을 철저한 유물론자라고 하는 것이다.

바디우는 치료를 받은 적이 없다. 모든 사람이 정신분석을 받을 필요는 없다.

 

바디우는 치료를 받은 적이 없다. 그는 정치적 행동과 사랑을 통한 발견, 연극적이고 소설적인 글쓰기, 수학적 형식주의 취향을 경유가 결국 철학 안으로 모아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분석으로 이 경험들을 중복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분석이 바디우가 말한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가? 전이를 통한 자신의 반복적인 사랑의 발견, 그리고 연극적 글쓰기, 시니피앙의 발견 속에서 형식(구조)에 대한 사유 그리고 개인분석이 정치적임을 깨닫게 되는 과정 등은 바디우가 언명한 실천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바디우는 어쨌든 일관된 정치적 논리에 참여하고, 다양한 철학적 상징화를 활성화하며, 실존 속에서 특히 행복했던 저는 치료없이 온전히 지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반면 루디네스코는 교육분석으써 정신분석을 받았으며, ‘자기 횡단을 통한 정치적 참여의 명석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정신분석을 경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각자의 고통을 견디는 방법을 스스로 창안할 수 있다면 정신분석이 굳이 필요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아니에르노의 소설을 몇 권을 읽었다. 최근 노벨상으로 더욱 유명한 작품 단순한 열정을 보고 그녀는 정신분석이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스테리의 극단이 그녀를 독창적 글쓰기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고통이라 쓰고 주이상스라 읽혀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두가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신분석적 담화, 즉 상징계의 노후성을 각자가 깨닫는다면, 어쩌면 언어의 의한 우리사회의 많은 문제점들이 해결되지 않겠는가?

 

 

라깡과 정치

 

라깡은 정치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않는 것으로 정치활동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실제 라깡은 자신의 가르침이 어떤 형태로든 이데올로기적으로 또는 당파적으로 재활용되는 일을 금했다고 한다. 그러나 텍스트에 따르면 라깡의 사유는 정치적으로 큰 파급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바디우는 라깡의 정신분석은 의미심장한 정치적 문맥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주체의 애초의 무능력한 상태와 관련하여 주체의 어떤 확충을 겨냥하는 치료의 깊은 의미를 재발견 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것은 집단적 차원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바디우는 보았다. 바디우는 정치의 장이란 어떤 결정된 상황이 불가능하게 막고 있는 삶은 가능성들을 해방시키는 일에 상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라깡의 치료는 그 본래의 실행에서는 탈정치적이지만, 사유에 있어서는 일종의 정치적 모태를 제안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바디우는 라깡의 사유와 혁명적 유형의 행동방식 사이에서 어떤 연속성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는 혁명적 유형의 행동방식이란 국가적 억압에 의해 봉쇄된 집단의 개방성을 다시 가동시키는 것이라 본 것이다. 정신분석이 억압에 의한 개인의 유한성을 무의식에 개방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맞이하게 되는 것처럼..

 

라깡은 프로이트를 마르크스에 견주고, 자신은 레닌에 견주었다. 라깡을 정신분석학의 레닌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한다. 레닌은 어떤 인물인가? 프로이트는 의학의 치유논리, 마르크스는 코뮌주의를 약속하는 입장에 있으나, 레닌은 코뮌주의에 대한 약속이 아닌 결단하고, 행동하고, 조직하는 입장에 있다.

라깡은 정신분석을 사회적응의 시각으로 보는 것에 완강히 반대한다. 라깡에게 정신분석의 관건은 더욱 근원적인데, 그것은 정치와 상관없이 주장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해방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라깡의 사유는 68혁명과 1980년대 사이에 젊은이들을 총궐기하게 만들었던 추동적 요인들 중 하나였다.

바디우는 68혁명에서 급진좌파가 나타나는데 라깡의 사유가 주요하였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루디네스코는 라깡에게 68혁명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운동이였다고 보았다. 그녀는 그것은 일반화된 해방 의지가 아니라, 반대로 좀 더 잔인한 노예상태에 대한 저항자들의 무의식적 욕망을 표현한 것이었죠.” 말한다.

라깡은 혁명은 항상 자기가 제거한 지배자보다 더 포악한 지배자를 낳는다고 주장하였다. 루디네스코는 이는 학생들의 시위가 대학에서 과거의 스승(주인)의 기능을 제거하고 이를 의사소통과 교육관계라는 이상에 기초한 폭군적 체계로 대체되는 것과 같이, 폭력적 혁명이 대학에서 테크노크라트들이 지식인들을 대체하게 된 핵심적인 단계 중 하나 였다는 것이 오늘 날에 더욱 분명해 보인다고 말한다.

 

 

라깡의 정치적 입장

 

1969년 파리8대학에서 라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혁명가로서 여러분들의 갈망하는 것은 바로 주인입니다.”

 

라깡의 이같은 선언은 바디우에게도 삼키기 힘든 쓴잔 이였다.

혁명가로서 여러분들이 열망하는 것은 스승(주인)입니다. 여러분은 스승(주인)을 얻게 될 것입니다. ... 나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반진보주의자인 한에서만 자유주의자입니다. 다소 예외적인 것은 내가 진보적이라 불리운 운동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라깡은 정신분석적 담론이 무엇에 대해 저항하는지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도록 한다고 보았으며, 정신분석의 과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진보적인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라깡은 태도는 정신분석담론이야 말로 현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담론을 제공한다고 본 것이다. 비록 라깡이 투쟁적 사회참여를 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시사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였다. 라깡의 행보는 프랑스의 문화적 삶에 나타난 본질적 움직임을 포착하려고 했다. “그는 오로지 정신분석 실천에만 투신함으로써, 또 실제로 그것이 정치적으로 재활용되는 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함으로써, 그러한 열망을 무화시켰다.” 라깡은 극단주의로 빠져드는 것을 막았으며, 그는 테러리즘의 진정한 방어막이자, 상징적 울타리가 되었다. 그러나 일부 마오주의자들이 라깡을 내세우기도 했다. 1960년대 라깡주의에 경도되었던 젊은 지식인들이 왜 1970년대 마오주의자가 되었는가? 바디우는 라깡의 주체개념 때문이라고 보았다.

자기의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라고 말하는 라깡으로부터 반항하는 것이 옳다라고 말하는 마오로의 이행은 당연한 일이였던 것이다.

 

루디네스코는 라깡이 혁명적 지도자가 아니라 영국의 정치모델과 비슷한 입헌 군주와 같다고 보았다. 라깡은 학생들에게 어떤 전이적 지배를 행사하였으나, 라깡은 그의 추종자보다 자신에게 매혹되지 않는 이들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녀는 라깡이 급진적인 점은 인간들 사이의 교환에 대해 어두운 전망을 가졌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라깡의 치료라는 토대 위에 어떻게 혁명적 정치를 세울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그녀는 말한다. 라깡은 전통적 의미의 진보주의자가 아니며, 그렇다고 반동적인 사상가도 아니다.

 

라깡은 정치적활동에 투신한 것은 아니만, 정신분석의 담론이 정치적으로 재활용되기를 거부하였으나, 많은 이들은 라깡의 담론을 혁명의 추동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신분석가들의 오해

 

루디네스코는 라깡은 오해한 사례를 들면서, 라깡의 입장을 설명한다. 몇몇 정신분석가들은 라깡에 기대면서 동성애들의 결혼과 그들의 아이 입양에 반대했다. 그러한 조치들이 아버지의 상징적 기능을 뒤흔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라깡은 동성애자 성향을 바꾸려 하지 않았고, 또 동성애자가 정신분석가가 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그들을 정신분석계에 받아들였다. 라깡은 성적차이를 생물학적 결정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를 늘 거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라깡이 1938년에 쓴 글인 가족 콤플렉스에서 라깡은 정신분석의 탄생을 아버지의 권위의 쇠퇴와 연결시킨다. 여기서 그는 아버지의 추락한 형상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가부장적 전능의 복원을 호소한 것은 아니다. 루디네스코는 정치적 측면에서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라깡을 계몽적 보수주의로 보았다.

 

라깡은 진보주의자 인가, 보수주의자 인가? ; 아버지의 기능

 

바디우는 라깡의 타고난 재능 중 하나는 그 사유의 구성적 모호함에 있다고 보았다. 그 모호함이란 보수적인 측명과 극단적 급진성들의 요소들의 공존이기도 하다. 바디우는 인간동물의 변하지 않는 토양인 언어라는 토대는 태고의 법처럼 시니피앙이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조직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은 이러한 토대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새로운 것을 창안할 수 있다고 보았다.

라깡에게서 법은 항상 언어와 욕망의 관계 안에서 이해된다. 인간의 욕망은 무제한적일 수 없는데, 항상 타자의 욕망과 부딪히기 때문이다. 법이 이 충돌에서 생겨난다면 그것은 성서의 십계처럼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 언어적 분절이 규정하는 금지에 따라 우리의 욕망이 조직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언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관통한다고 볼 수 있다. 정신분석에서 상징계 진입 이전 유아의 욕망은 어머니의 욕망에 함입되어 있다가 아버지가 상징하는 타자의 욕망에 진입함으로써 어머니의 욕망을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조직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이렇듯 주체는 시작도 끝도 모를, 언어와 욕망의 태곳적 부터의 얽힘에 내던져짐으로써 탄생한다. 라깡은 아버지가 영속적으로 법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죽음을 통해서뿐이라고 생각했다. 법에 시니피앙을 부여하는 것은 살아있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바디우는 우리가 법과 아버지의 상징적 규정만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라깡을 반동주의자로 만드는 셈이라고 보았다. 반면에 우리가 무의식의 구조들에 사로잡혀 있긴 해도 자신의 욕망에서 물러서지 않는 지점을 도달한 주체의 경험에 방점을 찍는다며, 라깡은 해방의 사상가로서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디우는 이어 말한다. “ 사회 전체의 느닷없는 혁명이라는 관념은 의미가 없어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라깡이 총체적 혁명이나 위대한 저녁(기존 권력이 전복되고 새로운 사회질서가 수립되는 혁명의 날을 가리킨다) 을 믿지 않는 보수주의자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옳은 일이죠. 그렇지만 그는 주체의 실천적 해방을 독단적으로 폐기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비판합니다. 우리는 라깡이 'Le nom-du-pere'’les non-dupes errent(속지 않는 자들은 헤맨다)‘라는 경구로 다시 표현했다는 것을 압니다. 속지 않는 자들이란 사태의 부정적 핵심을 안다고 주장하면서 해방의 가능성을 냉소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들이죠.”

 

바디우의 속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해석은 백상현 선샌님의 속지않은 자들과 다른 해석으로 보인다.

바디우에게 속지 않는 자들 해방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이에 대한 속지 않은 자들에 대한 맹정현의 해석은 정신분석의 목표는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극복은 단순히 욕망에 불과했던 아버지의 죽음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욕망이 이미 죽어 있는 아버지에게 계속해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있다. 이러한 작업은 아버지를 경유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며 따라서 오이디푸스를 넘어서는 것은 오이디푸스를 비켜가는 문제가 아니라 거쳐가는 문제라 할 수있다. 속지 않는 자들은 방황한다는 라깡의 말은 속아주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역설을 담고 있다.

 

백상현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말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의 마음의 방황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했다고 보았다. 개인의 차원에서건 공동체의 차원에서건 상실의 사건이 벌어졌을 때 주체는 고정관념에 의존하여 상처의 봉합을 시도한다. 이때 봉합에 참여하는 고정관념의 권위는 애도작업의 핵심이다. 라깡 정신분석에서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말하는 상징계의 권력은 말의 세계에 속한 인간을 굴복시키고, 말의 질서에 동의 하도록 만들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힘이다. 만일 이 같은 아버지의 이름에 속지 않는자들이 출현한다면 그들에게 방황은 필연적이다.

 

아버지의 이름에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혁명에 속는자 만이 헤맨다둘 중에 어떤 해석이 맞는지는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듯 하다. 아니면 번역의 문제인지.. 같이 논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듯 싶다.

 

 

루디네스코는 라깡이 이성과 현대성의 이면을 끊임없이 폭로하는 음울한 계몽의 사상가라고 표현한다. “그는 무한한 진보와 모두를 위한 행복이라는 이념을 믿지 않아요...그 변형인 공동체주의, 광적 개인주의, 그리고 특히 선동에 좌우되는 대중의 어리석음, 여론의 지배 말입니다.”

라깡은 현재에 좌파와 우파 이 진영 간의 싸움속에 숨겨진 우리의 마음 속에 또 다른 주인을 열망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예견한 것이다. 루디네스코는 라깡의 토크빌적 측면에 대해 간단히 말하면 노쇠한 유럽, 빈의 유대인인 프로이트와 달리 라깡은 그의 전거들은 18세기 프랑스와 바로크적 가톨릭 문화, 독일철학, 20세기의 문학적 현대성, 형식 논리, 구조주의와 말라르메의 시에서 가져오고 있다고 말한다 


바디우 역시 그가 예언자임을 오늘 날의 이 일그러진 세계 이전의 인물이라고 평한다. 현재의 자본주의와 야만적 세계화, 한계를 모르는 금융화, 보편화된 신보수주의의 세계로 변화하는 시점인 1980년대 초에 사망하였다는 것은 상징적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라깡의 사유가 가장 긴요한 영역과 주제는 무엇일까?

 

루디네스코는 21세기는 이제부터 라깡의 세기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에서 보이는 일탈들은 이미 라깡이 예견한 것들이고, 우리는 라깡의 사유를 통해 그것들과 투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라깡은 물론 자신의 쾌락을 쫓는 사람이였지만, 욕망의 진리에 대한 추구를 환상으로 대체하는 맹목적 쾌락주의를 권하지는 않았으며, 타자성을 부인하면서 자기정체성을 추구하는 정신적 퇴행의 모든 형태에 맞섰다고 보았다. 또한 인간을 자연성으로, 생물학적 존재로, 신체와 뇌로 환원하는 행동주의와 인지주의에도 반대했다고 한다. ‘주체와 시니피앙(언어, )이론을 통해서 라깡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있는 필연적 간극을 유지했다고 보았다. 그녀는 인간에게서 언어와 심리적 주체성이라는 특성을 은폐한다면, 우리가 언제든 파시즘적 과학주의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본다. 신경세포(뉴런)를 면밀히 조사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약을 처방하여 고통을 다룰 수 있다는 믿는 세계에서 주체는 어디있는지 묻는다. 주체는 조롱당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뿐이라는 것이다.

 

바디우 역시 라깡이 인지행동요법을 비난했을 것이라 말한다. 증상을 의학으로 해결하고 주체를 심리학으로 다루는 현재에 대해 라깡은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소통에 전능 역시 비난 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바디우는 우리시대의 의미의 평준화, 겉치레의 만연, 물신화우리를 엄습하는 비통한 어리석음에 대해 라깡이 중요한 치유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코뮌주의의 가동에 대해

 

바디우는 코뮌주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속지 않는 자들의 전형이라고 말한다. “코뮌주의는 유토피아의 정반대이고,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실재가 갖는 진정한 이름입니다. 코뮌주의를 또는 해방적 예외들이 지닐 수 있는 다른 모든 이름을 양보하는 일은 진정한 정치적 욕망의 모든 형태를 양보하는 겁니다.” 바디우는 실제로 계몽적 보수주의자 였던 라깡은 양보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거라 말하지만, 그렇더라도 라깡은 현 세계의 비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으로 보았다.

 

바디우와 루디네스코의 대담을 통해 라깡의 정치적 입장과 그의 사유가 미친영향과 21세기에 왜 라깡이 필요한가에 대한 의견들을 살펴보았다. 라깡 자신이 정치적 입장은 진보나 보수가 아니였고, 어떤 정치활동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루디네스코는 라깡이 아버지의 쇠퇴라는 입장에서 그가 계몽적 보수주의의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바디우는 그는 진보와 혁명이라는 운동 속에 숨어있는 대중의 바람인 새로운 주인에 대한 열망을 읽어낸 측면에서 그의 급진성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한다. 라깡이 우리시대에 다시 프로이트가 부활한 것 처럼 다시 부활한다면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 일까. 그것은 우리가 철저히, 여전히 타자성 안에 머무르고 있다는 그의 담론이 사회적 담론으로서 작용함으로써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의 발명이 모든 이들에게 담지되어 주어진 유한성에 벗어나게 되는 것이 아닐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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