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끄 라깡과 정신분석의 이면 SIC 시리즈 6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김종주 외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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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담화의 현대적 변화

 2022.9.23

 

   이번 발제를 끝으로 SiC 6 『자끄라깡과 정신분석의 이면』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라깡세미나17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채 읽어나가면서, 나의 한계와 욕심이 쟁투하는 시간이였지만, 다른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번역의 난해함으로 영어공부에 불을 지피게 만들었던 책이기도 하다. 발제까지 채 17시간도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더듬거려보자면, 저자 마리-엘렌 부르스는 이번 논문에서 현 시대에서 주인담론이 상상적, 상징적, 실재적 변화를 겪고 있다고 보고, 이에 따라 새로운 실재가 도입된다고 보았다. 임상치료 역시 구조적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현대사회는 ‘아버지의 이름’의 증발로 보편주의라는 주인이 들어섰다. 자끄 알랭밀레는 보편적인 주인이 나타남에 따라 분리(차별)된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보았으며, 한 가지 요소는 자폐적이고 격리된 주체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은 쓰레기로 분류되는 대상들이다. 부르스는 이와 같은 상황이 현대의 임상진료의 구조적 좌표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럼 부르스의 주장을 따라가 보자. 

라깡은 1953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난해한 번역으로 영어 원서를 참조하여 다시 써보았다.

  “자기가 사는 시대의 주체성을 그 지평에서 대면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분석실천을 포기하게 내버려둬도 됩니다. 상징계의 운동 속에서 자신을 그토록 많은 삶과 연결해주는 변증법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그의 존재를 다른 삶들의 축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바벨의 활동이 끊임없는 시대이고, 그는 그 혼란상을 잘 알아야 합니다. 언어들의 투쟁 속에서 그의 임무가 해석자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 역시 명확하게 다가 오지 않지만, 대략 라깡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분석가)가 사는 시대의 주체성의 지평과 대면하지 않고, 분석실천을 할 수 없다고 보는 것 같다. 라깡이 분석가를 위한 프로그램이 필수적이라고 보는데는 정신분석이 다른 사회적 관계들과 다를 지라도 우리시대의 모든 좌표들을 작동시키는 것이 분석가담화를 통해서라고 보기 때문인 듯 하다.

   새로운 세기에 들어와서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독해를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사회의 변화 속에서 정신분석의 좌표들은 상상적, 상징적, 실재적”이기 때문에 분석가담화를 통해 한시대의 모든 좌표를 작동시키는 것이 사실이라고 본것이다. 시대에 대한 해석의 임무가 있다고 본 것이다. 기술, 경제, 정치적 변화들의 양적이고 질적인 결과들은 새로운 실재적인 것을 가지고 오는데, 이에 따라 임상진료는 구조적으로 변경되고 있으며, 만일 이러한 변화의 방향으로 정신분석이 계속 발전되어 간다면 주체의 원인은 그 변화의 기제들과 성패에 대한 하나의 분명한 시각이 필요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수정된 실재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2차대전 이후 인간에 대한 새로운 치료가 등장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고취된 정치체제는 몰락했고, 경제체제의 전체주의적 지배는 신성시 되었다. 테러리즘으로 전쟁 개념의 수정과 종교적 원리주의 부상으로 정치적 영역이 수정되었다. 한편 기술분야는 과학담론의 헤게모니의 결과이다. 

실재는 명확하게 수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학주의는 권력의 한 형태가 되었고, 과학이 그 자체의 영역밖에서는 신앙체계가 되었다.

경제, 정치, 기술적 변화들의 공통방향은 보편성이며, 그것은 자본주의와   단일시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기술적 혁명 역시 보편성의 전파를 목표로 한다. 특히 과학에서 그러하다. 현재는 더 이상 지역주의를 위하는 시기도 아니고 작은 집단을 위한 시기도 아니며 전제정치를 위한 시기도 아니다. 이 세계는 실재적인 것으로서 모두에게 동일한 진실을 강요하는 경향을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7년에 라깡은 「영국의 정신의학과 전쟁」이란 글에서 그 시대에 대해 기술했다.

첫째로 그는 정신분석가가 자신의 학문영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정치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라깡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신분을 지지해주고 있던 영국에 경의를 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미래에 있어서 인간성에 대한 위험들이 개인들의 지나친 방종때문에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이 전쟁이 충분히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최소한의 인정이란 원인 때문에 받아들이게 되는 죽음으로 인간들을 몰아가는 양심의 가장 무기력한 포기와 초자아의 어두운 힘이 합쳐진다는 것은 분명해지고, 또한 희생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이 반드시 영웅적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

전쟁이 인간의 방종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최소한의 인정 때문에 받아들인 죽음은 양심의 포기와 초자아의 어두운 힘이 합쳐진 결과라는 것이다. 희생은 개인의 영웅심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라고 본것이다. 테러리스트의 희생에는 그 어떤 영웅주의도 포함되지 않고 오히려 하늘에서 향락에 대한 내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깡은 동일한 텍스트에서  “금세기 정신에 작용하는 수단의 점진적인 발달로서 우리 자신의 판단과 우리의 해결책 및 우리의 도덕적 통일성에 반대하여 이미 성공적으로 작용해왔던 이미지들과 열정들의 합의된 조작은 권력의 새로운 남용을 초래하게 될 것” 이라고 썼다.  

권력남용의 새로운 형태란 무엇인가?

모든 보편자들의 부상은 윤리의 영역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정신분석영역에서 새로운 권력의 남용이란 자끄알랭 밀레르와 에릭로랑이 분석했던 과학의 진보에 연결된 윤리위원회의 급작스런 출현과, 법에 대한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의 의존은 그 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신분석의 특이성은 윤리와 판단의 영역에 위치해 있지 법과 제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윤리에 대한 포기를 암시의 포기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정신분석가는 모든 사회적 판단과 도덕의 판단을 포기했다. 또한 주체의 증상이 자신의 말에 의한 치료 중에 구성된다는 사실에 의해 그것을 스스로 증상을 규정한다면, 분석가는 환자의 삶의 선택이 아닌 치료를 지시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깡이 보여줬던 것처럼 정신분석 그 자체는 과학담론의 결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다시말해, 생물학에 의해 히스테리 환자들에게 날조자란 딱지를 붙였던 과학적 의학의 발전 없이는 프로이트는 무의식적인 현상들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신분석은 과학의 발전에 의해 태어났지만, 과학이 포기했던 것을 치료한다. 정신분석은 보편에서 제외된 사람들을 윤리를 통해 합리적인 방식으로 치료하고 있고, 무의식적 욕망을 통해 초자아의 어두운 힘과 양심의 포기를 전복시키는 일을 한다.

 치료적인 것, 현대의 보편자The Therapeutic, a Contemporary Universal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임상적인 실재를 결정하는 보편자로부터 무엇이 제외되고 있을까? 그 이름을 붙여 보면 그것은 치료적인 것이다. 사실상 가장 예외적인 것으로부터 가장 보편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인간적인 현상들도 치료적인 돌봄의 잠재적 목표가 되어왔다. 프로이트는 『문명과 그 불만』에서 이렇게 썼다. “ [윤리는] 사실상 모든 문명에서 가장 아픈 곳으로 쉽게 인식될 수 있는 그런 주제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윤리는 치료적인 시도로 간주되는 것이고 그 어떤 다른 문화 활동들에 의해서도 성취된 적이 없다. .”

 

   법적이고 국가적 수준의 발전은 서양사회에서 치료적인 시각이 프로이트가 말했던 “가장 아픈 곳(트라우마)”의 관리에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시각을 대체해버린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으로부터 정신질환의 범주가 붕괴되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만일 주체가 언제나 자신의 욕망에 내기를 걸고, 만일 주체의 충족방식이 언제나 흔들린다면, 그녀는 치료가 필요할 텐데, 그렇다면 사람들은 질환의 영역, 특히 정신질환의 영역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잘-클로드 말발은 『정신질환의 진단과 통계편람 DSM』 의 여러 판본에서 정신적인 문제들의 범주가 급증하는 것을 지적했다.

 두가지를 주목해야한다.

 첫째, 과학적인 의학의 성공은 치료와 돌봄과 치유를 보편적 가치의 수준으로까지 진척시켜주었다. 우리는 알약과 외과수술을 통해 행복을 믿기 시작했다.

 둘째로 의학이 과학적일 때 그 개입 영역의 윤곽을 정확히 그려내게 된다. 따라서 꽤나 많은 인간의 행위들이 엄격한 과학적 개입영역으로부터 제외되었다. 그러나 치료적인 것을 보편적 가치로 변형시키면, 치료적 행위들이 전통적으로 그것들을 관리하고 통제했던 영역들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된다.  이런 이중적인 움직임의 결과는 치료적인 것이 의학과 질환의 영역으로부터 스스로 분리되어 버린 것이다.

자끄 알렝밀레는 우리 사회가 안전을 위해 의존하고 있는 동정심의 쿠션을 정신치료들이 만들어 준다고 지적했다. 달리 말해서 치료적인 시각은 현대적인 주임담론을 제공한다.

 담론 수학소의 저주 The Fulcrum of the Matheme of Discourses

  주인담론은 행위자의 위치에서 명령하는 시니피앙을 내놓는다. 주인기표는 S1로 쓴다. 그것이 시간에 따라 변하고 사회적 구성의 형태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사회의 경제적인 모델로서 자본주의 헤게모니가 출현한 이래로 우리의 가설은 이 S1이 “시장”, 더욱 정확히 “공동시장”이라고 생각했다. 세계는 미래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시장, 세계화라는 현실이 되었다. 생산물의 이윤과 순환을 중단시킬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인 시니피앙에 상응하는 것으로 라깡이 S2라고 썼던 지식은 무엇인가? 하나의 가설로서 그것이 전문적인 문헌에서 “절차”나 “프로토콜”이라 부르는 것이란 사실을 들어보자. 석기시대 도구가 정밀기기에 비교되는 것처럼, 그 기법은 절차와 프로토콜에 비유된다. 질적인 조사 프로토콜과 양적인 조사 프로토콜을 통하여 예상된 기능방식은 그 행위자로부터 분리되고 보편적 절차의 형태로 재투입되어 무료로 획득한 지식을 생성하게 된다. 이런 보편적 절차는 시장관리, 즉 이 세계의 관리를 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모든 인간 활동은 최소비용과 최대수익에 의해 조정되고 있다. 그에 따라 S2는 시장관리에 상응하는 지식이 된다.

 S1과 S2는 현대적인 주인의 구조 전체를 구성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현대적인 주인은 보편적으로 됨으로써 위계를 버렸다. 그는 과학 지식의 보편성을 믿게 되는데, 그는 실재계와 맺는 관계와는 다르다.

전체주의적 주인은 최고의 아버지 모델 된다. 즉 그는 권력의 수직구조에 기초하고 제재에 기초하는 가부장적 주인이 된다. 현대의 주인은 세계화된 시장의 논리와 절차로부터 나오고 따라서 그 구조는 수평적이다. 그 결과 초래된 통제는 공산사회적이거나 협동조합적인 상호간의 기능에서 나온다

현대적인 주인은 이런 조건하에서 어떻게 권력을 행사할까? 현대적 주인의 통제는 '공산사회적이거나 협동조합적인 상호간의 기능'에서 나온다. 이라크에서의 전쟁이 시대에 뒤져 있음을 보여줬던 기록과 사찰을 대신하여, 자끄알랭밀레가 최근에 언급했던 것처럼, 협동조합과 같은 주인이라는 평가는 그 어떤 상위의 위계질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것은 마치 진단이 이상적으로 DSM을 사용하여 내려질 수 있었던 것처럼 이상적으로 기계에 의해 행해질 수있었다. 평가를 위한 적절한 편람의 도움으로 개인들은 동료들의 지도 아래 그들 자신의 진단을 내릴 수 있다.

밀레가 지적했듯이 이런 상황은 현대적인 임상진료를 완전히 바꿔 놓는다.

  한 시대의 임상은 그 시대의 주인담론에 상응한다. 주인 담론의 변화는 부명이 시장으로 옮겨가는 통로를 거쳐 말하는 존재들의 향락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으로 변화하는데 , 그 변화는 전이의 양상을 변경 시킬 뿐만 아니라 주체의 증상도 변경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S1로서 부명에 상응하는 감시와 처벌의 기능은 이제 평가와 절차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며, 이젠 더 이상 금지와 분류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 수학소의 가로줄 아래에 무엇이 위차하게 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주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의 가설은 현대성의 주체에게 모델이 되는 것은 어떤 유통형태들에 의해 위치가 배정되는 어떤 시스템 속의 주체라는 것이다. 다만 그는 모든 사람과 각각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 기술적인 것 외에는 한계가 없다. 따라서 그는 쓸데없는 잡담과 지식의 즉각적으로 접근 가능한 특수한 상징적 위치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더욱 적어진다. 이렇게 해서 빗금친 주체는 향락의 새로운 방식에 상응한다.

라깡은 1968년 파리프로이트학파 학술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시대에서 아버지의 증발로 남겨진 흔적, 상흔은 우리가 분리라는 일반적인 표지 아래 둘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보편주의라는 우리 문명의 그 소통이 인간들 간의 관계를 균질화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반대로 나는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것이 모든 수준에서 교차점을 만들어내고 장벽들을 크게 증가시키는 분파되고 강화되니 분할이 있다고 믿습니다. "
그의 충족 체제가 되는 분할은 어떤 체계 내의 주체와 상응한다.
한편으로 <연결된> 주체가 있고, 다른 한편으론 생산물로 환원된 말하는 존재가 있다.
  라깡은 1967년 10월 9일 동일한 생각을 또 표명한다.   “우리가 경악스럽게도 출현함을 봤던 것은 과학에 의해 사회집단의 재구성의 결과 출현함을 봤던 것은 과학에 의해 사회집단의 재구성의 결과로서 또한 그것이 소개하는 보편성의 결과로서 발전해가고 있는 것에 대한 선도자의 반응을 나타낸다는 말로서 요약하려고 합니다.
공동시장으로서 우리의 미래는 분리과정들의 더욱 가혹한 확장에서 그것의 평형상태를 찾으려고 합니다. ”

이제 더 이상 S1이 부명과 관련되지 않는 주인담론의 새로운 양상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향락은 분리와 관련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포스트모던의 주인에게 공식의 적용을 우리가 제안하는 가설은 다음과 같다. 위에는 과학에 의해 인간적인 현상들의 재구성에 틀림없이 관련되기 마련인 두가지 요소들이 있다.

 아래에는 분리에 틀림없이 관련되는 두 가지 요소들이 있다. 다시 말해서, 밀레르의 공식 가운데 하나를 취하는 자폐적 주체, 또한 가상적이고 격리된 주체와 그에게 향락의 존재를 부여해주는 대상들인데, 그 대상이란 쓰레기가 될 것으로 예정된 대상들이다. 그 결과는 공동체들의 증식으로서, 게이와 레즈비언, 흑인,라틴계 사람들, 와스프, AA, NA 기타 등등인데, 그들 각자는 그 나름의 대상들과 함께 한다. 그와 같은 것들이 현대의 임상진료의 구조적 좌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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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성과 타자성 - 철학적으로 읽은 자크 라캉
로렌초 키에자 지음, 이성민 옮김 / 난장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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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자들에게 9-10P 

2.

 주체성과 타자성은 여전히 내가 라깡과 그 너머에 대해 행하고 있는 연구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따. 돌이켜 보면 애초 해석적 차원에서 전개한 이 책의 세 가지 상호연관된 쟁점이 내게는 특히 주목할만한 것으로 다가온다. 욕망의 변즈업을 통한 초월론적인 것의 사후 발생, 기표의 물질성, 빗금쳐진 실재로서의 죽지는-않은 것. 

 당연히  이책은 이 모든 물음이 수렴되는 교차점인 듯한 욕망과 충동의 분리불가능성을 주장한다. 라깡, 그리고 라깡에게 고무된 사유로부터 '초월론적 유물론'을 끌어내려한 용감한 시도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틀거렸다. 이른바 욕망에 대한 충동이 그 어떤 우선성도 유물론적인 의제를 손상시킬 수 밖에 없다. 셸링에 대한 반-관념론적 독해에 기반한 이론으로는 라깡의 진정한 유물론을 정당하게 대우할 수 없다. 언젠가 본인 스스로도 언급했듯이 라깡만이 철학에 공헌한 혁신이 있다면,

 

"기표, 그것은 언어안에서 스스로를 초월하는 물질이다. "

라는 언어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이다. 달리 말해서 이른바 죽지는-않은 자연 자체( 그 불균형한 무근거성에서 실재의 원초적 근거를 구성할 셸링 식의 절대자)의 잠재성에서 곧바로 충동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이런 입장은 후자가 인간의 로고스가 지닌 잠재성의 사후 효과를 통해서만 하나의 잠재성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욕망과 (궁극적으로 언제나 죽음충동인) 충동은 서로 관계하는가?

 이 책은 욕망이란 상징적 질서 속의 실재적 결여인 "무에 대한 욕망"이라는 관념, 즉 욕망이란 상징적 가능성과 그 외연이 똑같은 무에 대한 욕망이라는 관념에 자주 기댄다. 죽음충동도 이와 똑같은 실재적 결여를 마주한다. 스스로 되돌아가려고 열망 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죽지는- 않은 실재의 잔여물로서 말이다. 이런 조건은 환상 속에서 욕망을 지탱하는 끈질긴 반복과 등가적이다. 

세미나5권에서 라깡이 말했듯이 충동은 욕망에 주어지는 전문용어이다.... 말이 욕망을 고립, 파편화시키며, 욕망으로 하여금 그 목적과 비절합적 문제적 관계를 맺도록 하는 한 말이다. 
  이 책에는 이질적이만 그 이론적 틀을 충실히 보존한는 용어법을 채택해 본다면 욕망과 충동의 정확한 중첩은 다음과 같은 또 다른 방법으로도 정식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욕망이 일관적인 '상징의 세계'(인간의 유사-환경으로서의 언어)에 내속적인 존재론적 비일관성의  둘레를 선회한다면, 충동은 선-상징적 실재(즉, 죽지는 -않은 자연)의 선-존재론적인 순수 비일관성과 연계된다고 말이다. 그것도 단, 존재론적 비일관성을 통해서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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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지같이 아무것도 쓸 것이 없는 것 같은 막막함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한때는 나의 배설물이였던 글들, 그리고 cartel에 참여하면서 쓰게된 발제문들, 많은 메일, 짧은 리뷰들, 그리고 수많은 업무페이퍼.. 

사실 머리속에는 끊임없이 생각이 환유한다. 그 생각들을 지면에 옮기는 작업을 하게되면 아무것도 쓸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머리 속의 쓰레기를 받아 적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무도 그 쓰레기 더미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발화하거나 글을 쓰지 않는 이상. 

그 오물을 정화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글쓰기 행위를 통해서이다. 내 손은 오물을 거른다.  생각이 말이 되기 전에 글을 쓰면,  내가 생각지도 못한 생각들이 지면에 놓이게 된다. 그 글들은 무의식적으로 발화 속에 섞인다. 나는 내 글을 모방하여 말하는 것 같다. 생각이 먼저 있고, 글이 나중이 아니라 글을 쓰면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발화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 말보다 글이 우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맴도는 생각을 쓰면 앞으로 전진하게 되는 것을 느낀다.  그렇다면 글을 많이 쓰면 쓸수록 진전된 생각들을 발화하게 되니, 이것 역시 무의식을 바꾸는 좋은 방도가 되지 않을까. 말은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다. 먼저 머리 속으로 정리하고 글을 쓰는지.. 나는 그냥 쓰면서 생각을 한다. 생각이 난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쓰다보면 써지는데, 이렇게 스크린을 마주하기 까지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것이다. 

글쓰기에 대해서는 한 가지 또 떠오른 생각은 나의 글과 말투의 갭차이가 너무 크다는 사실이다. 현실의 말투를 그대로 글로 옮길 수가 없고, 글의 투를 현실로 옮기기도 어렵다. 평소 농담반 진담반의 어법을 사용하지만 글은 제법 진지하다. 여기서 분열의 상황이 드러난다고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그런데 정신분석은 어쩌면 글이 말이 되는 경험과 비슷한 듯 하다. 내 개인적 경험으로는 '하나의 무의식'만 그 공간에 존재하는 듯 했다. 말을 하면서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아의 분열를 하나로 수렴하는 일이기도 하다. 글을 쓰면 다른 생각은 하기 어려워지는 것과 같이 글이 아니라 말을 하는데도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아, 마치 자신이 한덩어리와 같이 느껴졌었다. 

지금은 그때의 덩어리가 흩어졌지만, 글쓰기라는 임상이 나에게 남아있다. 다시 쓰기와 읽기에 집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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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 개정판 프로이트 전집 (개정판) 11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윤희기.박찬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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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히즘의 경제적 문제 (1924년) 

 프로이트는 인간은 긴장, 흥분량을 감소시켜 안정을 추구하는 쾌락원칙을 따르고 있지만, 고통 그 자체가 목표인 것 경우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조히즘이라는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정신생활 감시하는 파수꾼이 마약을 먹고 행동 불능이 된 상태, 즉 쾌락원칙이 마비된 상태를 본 논문에서 탐구한다.  쾌락원칙에 반하는 비경제적 심리가 있다는 얘기다. 

  프로이트는 마조히즘에 대해 죽음본능과 생명본능인 쾌락원칙과의 관계를 밝혀야 한다고 보았다. 페이너는 '열반원칙'을 들어 흥분의 상태를 무로 돌리는 것, 다시 말하면 유기체의 생물성이 무기체로 돌아가는 것이 안정성을 유도하는 것을 보았다. 이는 곧 죽음본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본능이 어떠한 변형을 일으키는데, 이 변형의 원천은 리비도이다. 프로이트는 열반원칙이 변형된 것이 쾌락원칙이며, 이 변형의 요소는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이 요소의 투입으로 보았다. 프로이트가 말한 질적 요소란 '리듬', '시간의 변화', '자극량의 부침'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이전에는 쾌락원칙을 양적요소만 고려했다면 이제는 질적 요소들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요소들을 리비도의 요구를 반영하여 쾌락원칙이 되고, 외부세계의 영향을 표현하기 위해 현실원칙이 도입된다고 보았다. 

 열반원칙, 쾌락원칙, 현실원칙은 각각의 목적에 따라서 작용할 뿐이고, 열반원칙은 자극의 양을 감소시키려는 노력을, 쾌락원칙은 질적인 특성을 고려하고, 현실원칙은 자극의 방출을 지연시키고 긴장으로 인한 불쾌감을 잠정적으로 묵인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마조히즘의 세 가지 형태 

프로이트는 마조히즘이 세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먼저 <성감 발생적 > 마조히즘이다. 

이는 보다 생물학적이고, 체질적인 측면의 마조히즘으로 고통과 불쾌로 인한 긴장이 있을 때 리비도의 공감적 흥분이 발생한다. 프로이트는 유기체 속에서 리비도가 죽음이나 파괴본능을 만나 무기체적 안정상태로 만들고자 리비도가 파괴 본능을 해롭지 않은 것으로 변형시키려고 그러한 본능을 외부의 대상으로 돌리고자 한다고 보았다. 그 본능이 정통 사디즘이고, 그 본능의 다른 일정량은 내부에 남아 성적 흥분의 도움으로 리비도적으로 묶이게 되면 그것이 최초의 성감 발생적 마조히즘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가 말한 '성감발생적' 마조히즘은 성적취향의 유래를 생물학적 차원에서 설명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 여성적 마조히즘 > 의 형태는 주체의 위치와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프로이트는  성감발생적 마조히즘의 발전 단계에 따라 정신적으로 변한 다는 것을 연구했는데, 그는 그 기원을 토템(아버지)에게 잡혀먹힐 것 같은 공포에 기원하고,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싶은 욕망은 그 공포 뒤에 오는 사디즘적 단계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거세공포 후에 '성기기 조직의 침전물'로 마조히즘적 환상이 형성되는 것이다. 여성적 마조히즘은 자신을 여성으로 위치시킨다. 남성의 경우 자신을 작고 무력한 어린아이와 같이 취급받기 원하는 환상이 작용한다. 또한 그들은 거세당했고, 성교를 당했으며, 어린 아기를 낳았다는 의미로 여성적 자리에 위치시킨다. 

 세 번째 형태는 <도덕적 마조히즘>이다. 

도덕적 마조히즘은 성감발생과 여성적 마조히즘이 대상을 있는 것과 달리 '고통'그 자체가 문제시 된다. 프로이트는 죽음본능이 내부로 투사된 것이라고 말하고 끝내고 싶지만, 연구를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에게 <무의식적 죄의식>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무의식적 죄의식이란 우리가 '병' 속에 머무려는 고집, 즉 신경증의 고통은 마조히즘적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 “ 한 형태의 고통이 다른 형태의 고통에 의해 대치”되고 있으며, “고통은 일정량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라깡의 '증상은 다른 증상'에 의해 대체될 뿐이라는 언명은 프로이트의 위 와 같은 언급에 기반하는 것 같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적 죄의식'을 '처벌에 대한 욕구'라고 환자에게 말한다면 저항이 클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경향은 무의식적이기 때문이다. 신경증자에게 고통은 그냥 고통이 아니라 주이상스이다. 라깡은 이러한 측면을 환자의 삶을 새롭게 만드는 힘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프로이트는 이 무의식적 죄의식을 '양심의 기능'을 하는 초자아의 속성과 연결시킨다. 초자아는 외부세계와 이드의 대변자이지만, 탈성화되면서 직접적인 성적 목표는 벗어나 양심의 기관으로 활동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극복된다고 보았다. 초자아는 감시, 힘, 엄격함, 벌주는 태도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분열로 인해 그 가혹함이 증대된다. 초자아는 마치 외부세계의 인물들 처럼 강력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외부세계의 대변체라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개인적 윤리의식, 도덕의 원천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의 배후에는 부모가 있다. 부모의 개인적 의미는 사라지지만 부모의 남겨놓은 이마고는 선생님, 권위자 등의 인물들과 결부되고, 이러한 과정 끝에 내투사가 아닌 외부의 마지막 인물이 세워진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신'과 결부되는 것과 연결지어 생각 본다면 인간은 '신'을 부모의 이마고로 간주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본다. 

 한편, 도덕적 마조히즘은 강력한 억압 속에서 오히려 <죄가 되는 행동을 하고 싶은 유혹>을 만들어 낸다고 보았다. 죄를 지어 속죄를 받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도덕적 마조히즘은 초자아의 사디즘과 자아의 마조히즘의 결합하여 자신에게 해가되는 일을 수행한다. 탈성화된 초자아는 도덕적 마조히즘의 귀환으로 성애적 요소가 도입되는 것이다. 도덕적 마조히즘의 위험성은 그것이 죽음 본능에서 나온 것이며, 파괴본능이 외부로 향하지 않고 내부에 있는 죽음 본능의 일부와 일치하기 때문에, 주체의 자기파괴 행동 역시 리비도의 만족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마조히즘의 청산 

도덕적 마조히즘은 증상인가? 내 증상의 중심은 마조히즘과 새디즘이 교차 발생이다. 마조히즘의 목표는 결국 리비도의 만족, 주이상스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의 의식은 고통스럽다는 것이 문제이다. 만약 주체가 자신의 고통을 즐긴다고 한다면 그것은 도착과 신경증의 경계에 선 인간일 것일까? 잉여향유의 노예인 것일까? 

마조히즘적 경향은 언제나 자신을 사지로 내몰았다.  하지만, 요즘은 다른 생각이 든다. 내 무의식이 목적하는 바가 자기 파괴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 뒤에는 자기파괴를 통과해 살아남은 일상의 영웅 같은 인물이 되는 것이였을지도 모르겠다. 

  언제인가,,, 꽤오래전 <무의식적 죄의식> 에 대해서 생각을 종종했었고, 결론은 원죄가 없다는 것이였다. 나는 이때 부터 초자아와 즉, 양심과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양심이라는 것이 터무니 없게 느껴질 때도 많았고, '내부검열자를 위반하기', 벌은 타자가 줄 수 없다.. 등등의 논리를 만들어 내전이 일어나곤 했다... 생각해보면 그것 역시 결국 자아의 탈을 쓴 초자아가 아니였을까. 자아이상과도 같을 수도 있겠다.  

이제 이 매저키스트 생활도 청산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리비도의 흐름을 바꾸겠다는 얘기다. 인생이 많이 남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얼마나 건강하게 살지도 모르는 일인데 언제까지 내상을 입히면서 나홀로 전쟁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종전을 선언한다. 어쩌면 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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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의 사랑에 관한 정의 중 "사랑은 자기가 가지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다" 의 의미를 비로서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해석이 완전히 들어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의한다. 

사랑받는 자에서 사랑하는 자로의 전환이 라깡의 이 문장에 숨겨져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때 왜 그를 사랑하는지 알지못한다. 그 사랑은 자신의 결여 때문이고, 그 결여를 사랑받는 자가 채워줄 것 같은 것 때문에 욕망하게 된다. 그것은 상대방의 결여를 자신의 결여로 포개는 경우도 마찬가지 일 듯하다. 왜 사랑받는지 영문을 알지 못하는 자는 마침내, 사랑을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이 곤궁을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그는 상대방이 생각한 그 불일치의 결여, 즉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준다. 그것은 환상의 응답이기도 할 것 이다. 

라캉에게 있어서 사랑의 가장 숭고한 순간은 사랑받는 자가 사랑의 은유를 실연할 때, 즉 그가 사랑받는 대상의 자리를 사랑하는 자의 자리로 대체하고 지금까지 사랑하는 자가 행했던 거과 동일한 방식으로 행위하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요켠대 그 순간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함으로써 사랑을 되돌려줄 때 발생한다. 사랑하는 것은, 즉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자는 누구이며 사랑받는 자는 누구인가? - P55

사랑하는 자는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 그는 결여의 주체이며, 욕망하는 주체이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반면에 사랑받는 자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가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타자의 눈에 그를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가 가진 그 무엇, 그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다. 사랑받는 자가 가진 그 무엇은 여하간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그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라캉의 말처럼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사랑받는 자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불일치에서 사랑의 드라마가 생겨나는 것이다. - P56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 안에서 무언가를 보며, 그 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원한다. 반면에 사랑받는 자는 자기 안에서 타자가 보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못한다. 그는 자신을 타자의 눈에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사랑받는자가 이러한 곤궁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길은 사랑을 되돌려 주는 것이다. 즉, 사랑하는 자의 위치를 떠맡고, 그리하여 욕망하는 주체, 결여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결여를 기증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가지지 않은 그 무엇을 제공하는 것이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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