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 (완전판)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처음 <쥐덫>을 읽고 나서 두근두근하던 기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열 두어살에 만난 루팡은 핸섬하고 '괴도'라는 별명에 걸맞게 금지된 욕망의 실현인 듯 내 속에 꾹꾹 눌러 감추고 싶은 인물이었고, 그보다 후에 만난 홈즈는 뭉툭하고 단단하고 차가운, 흡사 지포 라이터처럼 정확하고 명료했다. 에드가 앨런 포의 음울함에는 마력이 있었다.

그러나 애거서 크리스티는 그 모두와 달랐다. 무엇보다 그녀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또렷한 눈동자를 뜨고 있었다. '범인은 이 중 하나야!' 라는 말은 <소년탐정 김전일> 류에서 너무 많이 리바이벌되어 이제는 되려 신물이 날 정도로 익숙한 플롯이지만, 애거서 크리스티는 그 폐쇄성과 밀폐된 공간에서의 심리적 긴장을 오히려 즐기는 듯 보인다. 확실히 그녀는 즐기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만들어내는 공간과 시간들은, 단지 하나의 사건을 위해 필요한 '요소'가 아니라 '주체'로서 작용한다. 그래, 아무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다. 살인은 들러리일 뿐, 사건 자체가 피해자와 가해자를 심사숙고하여 선택하는 듯한 섬뜩함, 그녀의 이야기에서는 아무도 자유로운 의지로 행동할 수 없다. 다만 모든 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되기로 약속된 듯 정확하게 톱니바퀴를 맞추며 시간을 진행시킨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는 한 명씩 한 명씩 죽어나가다 종국에는 아무도 남지 않는다.(김전일이 죽는다니, 상상해 본 적 있는가?) 그리고 '통상적이고 평범한' 추리소설의 틀을 훌쩍 넘어 그녀는 단 한 편의 에필로그로 이 모든 사건을 깔끔히 정리한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오른쪽에 남은 종이의 분량은 거의 바닥을 향해 가는데 도저히 범인은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난다. 뭐든 범인이 밝혀지면 사건이 끝나는 숱한 이야기들에 너무 익숙해진 터라, <쥐덫>의 새파랗게 젊은 경사처럼, 품위있고 교양있는 베라를 끝까지 주시하던 나는 그녀가 목을 매달아 버리는 순간 허탈한 한숨을 쉬어야 했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의 진정성은 물론 정교하고 잘 짜맞춰진 구성에 있지만 그 속에서 나타나는 심리 묘사는 여지껏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 독특하고 섬세한 것이다. 나는 그것이 그가 여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영국 여왕에게 Dame 작위를 받은 이 깐깐하고 꼿꼿한 여인은(-그런데 막상 그녀의 얼굴을 책날개에서 본 나는 약간 견해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깐깐하기보다는, 무척 푸근한 인상이었다.) 인물들 하나하나의 아주 작은 움직임조차 놓치지 않고 독자에게 전해주며 어느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게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질식할 듯한 압박을 느끼다가도 다시 처음부터 책을 읽어보면 그녀가 곳곳에 심어놓은 씨앗들이 어떻게 싹을 틔워올리고 거대한 그늘을 드리운 아름드리 나무와 같이 성장하는지에 다시 한 번 탄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끔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을 들고 탈탈탈 아무리 털어보았자 불필요한 단어 하나 삐져나올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슬프게도 흥미 위주와 깊이 위주의 소설이 난립하여 섞여드는 요즘, 제대로 된 추리소설은 읽기가 힘들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인화가 <영원한 제국>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와 같이 날카로운 필치로 인간 내부 깊숙한 곳의 욕망과 죄의식을 건드린 작가는 단연코, 없다. 그것은 물론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 혹은 스타일의 문제겠지만, 아무튼 애거서 크리스티 이후로는-그리고 이전에도, 감히 그녀와 같은 영역에 손을 대본 이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름으로,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히 고전이 갖는 의미 이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체 이 이야기에 별 다섯 개를 주지 않으면 세상 어떤 추리소설에 별을 준단 말일까. 아니, 과연 별 다섯 개로 충분한 것인지, 보이지 않는 독자를 완벽하게 농락하는 이 탁월한 작가에게 오히려 별은 거추장스러운 것이나 아닐까, 하는 걱정 반 존경 반으로 어쨌든 최고의 별점을 매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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