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re all traveling through time together, every day of our lives. All we can do is do our best to relish this remarkable ride.




 


 워킹 타이틀답게 큰 욕심 없이 조용히 다가오는 드라마. 최근 십수년간 영국의 로맨틱 코미디, 혹은 드라마의 계보를 무리수 없이 이어가는 감독이라면 단연코 리처드 커티스. 과연 제임스 본드와 비틀즈의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싱글 몰트 위스키와 스트로베리 필즈의 나라, 올림픽 개막조차도 '이런 것을 아시나요?'가 아닌 '이런 것을 다 알고 있지?'로 꾸며도 무리가 없는 나라. 로맨틱 코미디는 부담 없는 금요일 밤의 장르이건만 리처드 커티스가 만드는 영화의 이미지는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더는 바랄 것이 없어서가 아닐까. 





 영화라는 장르를 잠시 들여다보면, 모든 감독은 자신의 특징을 문신처럼 새겨둔다. 박찬욱의 도덕적 혼돈과도 같은 기하학무늬 벽지, 웨스 크레이븐의 강박과도 같은 좌우대칭 프레임이 그런 것이라면 리처드 커티스의 지문은 배우들이 관객에게 최대한 부담없이 다가가도록 하는 연출에 있을 것이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노팅힐, 러브 액츄얼리의 계보를 잇는 영화로 어바웃 타임을 꼽는 것은 그리 무리가 아닐 것이다. 앞의 두 작품은 리처드 커티스가 각본에 참여했고 뒤의 두 작품은 감독과 각본에 모두 참여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모두 다 통제하기란 문학과는 달리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즉, 영화에는 '우연'의 요소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나타나는 점이다. 그럼에도 리처드 커티스의 연출은 배우에게서 연기를 끌어내는 방식, 카메라를 통제하는 방식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워낙 편안하게 다가오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철저한 통제가 아닌 느슨한 간섭의 결과물. 리처드 커티스 박찬욱의 영화처럼 오 분만 보아도 누군가의 영화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하지도 않는다. 웨스 크레이븐처럼 숏 하나만 보고도 알아차릴 수도 없다. 그러나 다 보고 나서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면, '이 사람 여전하군' 하는 느낌이 무척 자연스레 다가온다. 그것은 분명 리처드 커티스의 배우를 다루는 방식, 노래를 영화 속에서 활용하는 방식, 일상의 자연스러움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영화 전반을 통제한 점에 있을 것이다. 분명 어떤 감독은 단칼에 거절할 만한 그런 목표를 리처드 커티스는 자연스레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는데, 바로 이 점이 관객으로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즐거움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약간 머뭇거리는 시선, 실제로 얼굴 붉히는 수줍은 성격, 특별히 미남도 아니고 말주변이 뛰어나지도 않지만, 주변에 괴상한 특징을 몇 개 정도 지닌 인물을 주렁주렁 달고 나오는 캐릭터가 언젠가부터 영국 로맨틱 코미디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선보이는 씬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며 모든 상황이 참으로 안정적이라는 점에서, 리처드 커티스의 페르소나는 확연히 안정적인 관계, 로맨스를 바라는 여성 관객을 타겟으로 삼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거리를 두거나 스타일을 과시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의 목표가 아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또렷하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영화 속에 좀 더 참여시키는 것도 그가 원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디까지나 장르 내에서의 접점, 관객과 배우가 굳이 애쓰지 않고 억지를 부리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만나는 가상의 어느 지점. 그곳으로 가기까지 리처드 커티스가 이용하는 것은 장르의 꼬임과 일상의 재활용, 배우의 연기, 음악의 활용이었을 것이다. how long will i love you가 흘러나오면 관객이 느껴야 할 바는 더욱 자명해진다. 





 그런데 왜 하필 시간이어야 했을까. 그간 나온 시간을 다룬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던가. 시간 여행자의 아내, 생존 시간 카드, 이외의 비디오 키드가 접했던 수많은 B급 영화도 있다. 그 모든 것에 하나를 굳이 보탤 필요가 있었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바웃 타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 여행이 아니라 그 시간을 보내는 사람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모험, 모든 것을 뒤흔드는 변화, 0.5초의 차이로 숨을 거두는 사랑은 영화의 주제가 아니다. 이 간명한 영화가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자명하고 또 분명하다. 현재를 살라는 것.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리처드 커티스가 꾸준히 그의 영화를 통해 말해온 것이 아닐까. 






 촌스러울 수도 있는 나레이션, 플래시백, 크로스 컷팅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활용한다든지, 약간은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노래 가사가 전면에 등장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오히려 관객에게는 더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너무나도 안온하고 갈등이 완화되어 있는 통제된 공간이라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뤼미에르 형제는 분명 스크린에 열차를 띄울 때 '어바웃 타임'과 같은 숏케잌 같은 영화를 상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로맨틱 코미디와 시간여행의 장르와 모티브를 빌린 어바웃 타임을 보노라면 이 영화는 로맨스 영화도, 그렇다고 그저 드라마의 장르에 머문 영화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장르의 경계를 허물 생각도 없이 약간 어정쩡하게 기대어선 이 영화를 보자면, 따지고 보면 '러브 액츄얼리'도 완전한 로맨틱 코미디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콩트와 노벨레의 경계를 잡기가 어렵듯 최근 들어 로맨틱 코미디와 드라마의 경계가 은근해지는 것은 비단 장르 차용을 넘어 관객층을 넓히려는 시도를 감독들이 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리처드 커티스의 경우에는 조금 더 쉽고 편안히 다가서는 그의 드라마를 만들고자 한 것이 역력하다. 결국, 리처드 커티스의 페르소나는모두 같은 얼굴로 다른 영화 속에서 삶의 어느 따스한 순간을 이야기한다. 









 마크 로렌스의 music & lyrics에서는 떨려서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여자에게 남자가 말한다. 

"괜찮아요, 3분이면 끝나요." 

인생의 가장 소중한 순간은 길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너무나도 짧아 순식간에 지나치는 순간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리처드 커티스의 안온한 세계에서는 그 3분이 생각보다 꽤 길게 되풀이된다. 춥고 지쳤을 때, 이런 판타지 같은 따스한 장르를 기웃거린다 해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첫 인용구는 영화 속 팀의 대사에서.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4-03-22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를 코메디로 봐야할지, 아니면 진지 모드로 봐야할지, 보면서 왔다 갔다 했더랍니다.
평범한 제목에서 받은 선입견때문인지, 그닥 기대 안하고 보러갔다가, 다 보고 나올때 참 괜찮은 영화를 봤구나 뿌듯해하며 나왔었지요. 이런 여자를 아내로 선택한 남자는 참 행운이다, 그런 생각도 했었어요. 저랑 너무 다른 캐릭터를 가졌더라고요 ^^

Jeanne_Hebuterne 2014-03-23 11:33   좋아요 0 | URL
hnine님, 저만 그런 것이 아니었군요! 따지고 보면 어떤 영화든 한 장르 안에만 머무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방향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도 했으나,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리처드 커티스는 로맨스가 곧 생활인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한 듯합니다. 꼭 한가지 이야기만 할 필요 있나요? 하고 너스레를 떠는 기분이었어요. 주변 공기가 약간 차가울 때, 조금 수다스럽지만 마음은 따뜻한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기도 했고요.

메리 캐릭터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셨군요. 전 거꾸로 이 감독은 여자들이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지를 감독이 잘 알고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더랬어요. 많은 걸 기대안한다고 말하는 까다로움을 잘 파악하는 그런 짓궂음이오 :)

이진 2014-03-23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떻게 부르는지 까먹었어요.
지네... 쟌... 쟝?
어쨌든 저 이 영화 정말 좋더라구요.
저는 감독은 잘 모르고 레이첼 맥아담스가 미치게 좋아요.
저 이 배우 나온 영화는 모조리 섭렵했답니다...
노트북보다 이 영화에서 더 사랑스럽고 예쁘게 나온 거 같아요!

보다가 울었네요.
묵직한 메세지가 있는 거 같아서 좋았어요.

Jeanne_Hebuterne 2014-03-26 19:21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이 영화를, 그리고 저 여배우를 좋아하시는군요!
노트북은 전 보지 못하였는데 그 영화에서도 사랑스럽게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답니다. 아마 셜록 홈즈나 미드나잇 인 파리 등 필모그라피를 넓혀가려는 노력이 조금씩 보여요. 연기의 폭이 틸다 스윈턴이나 제니퍼 로렌스처럼 아주 넓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것만은 사실인듯 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기대가 되기도 해요. 종종 한 배우의 연기를 따라가노라면 시간이 조금씩 손가락 끝에 와닿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재미있지요.

소이진님을 기분좋은 의미로 울린 이러한 영화가 앞으로도 많이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
 
미셸 오클레르 - 필립스 협주곡 녹음 [3CD]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외 작곡, 쿠로 (Marcel Co / Decca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지나간 시간.

 사라진 공간.

 묻는다. 기억을. 

 답한다. 들림을.

 쉼표와, 마침표.

 진동과 흔들림.




 레코딩 음질이 더 좋아지고 연주자들의 기법이 향상되는 요즘 문득 한 시대를 생각한다. 

개성이 더 또렷하고 국경이 높았던 때. 서방 연주자들이 러시아 연주자들을 눈이 휘둥그레 쳐다보며 경청하던 때. 

 어떤 연주자의 기법은 더 섬세하고 가녀렸던 때. 

 음질은 지금보다 열악하고 종종 마이너 레이블에서 녹음하여 지금은 찾기 어려운 음반의 소리가 무지개처럼 펼쳐지던 때.



  지금은 희미해졌으나 듣는 순간 귀를 섬세하게 잡아채는 가느다란 우아함의 미셸 오클레르.

 1960년대와 1950년대의 오래된 음악 소리에 귀를 빼앗긴다.

 멀리 갈 것 없이 이 공간의 연주자 소개를 들추어 본다.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1924년 11월 16일 파리에서 태어나 롤라 보베스코, 미쉘 슈발베, 앙리 테미앙카, 크리스티앙 페라스 등의 명인을 길러낸 쥘 부셰리를 사사하고 1943년 롱-티보 콩쿠르와 1946년 제네바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탄탄한 기교를 바탕으로 정열적이면서도 아름답게 연주해 "바이올린의 가수"로 불렸으나, 전성기에 접어든 1960년대 중반 불의의 교통사고로 왼손을 다치면서 독주자 활동을 접고 후학양성에 힘써 많은 녹음을 남기지 않고, 2005년 6월 세상을 떠났다.



 
 음악이나 책이나, 무언가를 접하는 우리는 진공 속에서 숨 쉬지 않는다. 즉, 진공 상태에서 무언가를 듣지 않는 이상 이러한 연결고리가 조금씩 생겨나는 것이 이제는 유쾌해지는 순간이 있다. 아마도 듣는 이에 따라 이런 고리는 조금씩 헐겁거나 조밀하게 들어차서 어느 순간 거대한 지도를 머릿속에 접었다 펼쳤다 하게 되리라. 나에게는 크리스티앙 페라스의 이름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카라얀 60 박스, 그 오십 번째 음반을 오늘 다시 집어들고 듣노라면 뭐랄까, 그 섬세한 감성과 낭만적인 표정의 고리, 쥘 부셰리. 그리하여 연결하는 미셀 오클레르.



 쥘 부셰리는 미셸 오클레르의 파리 음악원 시절의 스승. 자크 티보 보베스코, 슈발베, 페라스 등의 연주자를 길러냈는데 미셸 오클레르의 연주를 듣노라면 내게는 우아하고 선이 가느다란, 지금은 점차 멀어져 가는 지나간 시간의 어떤 페이지를 돌아보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활이 지배할 수 있을 만큼의 가녀림, 감상에 빠지지 않는 우아함, 때로 들려오는 예상 밖의 직설적인 활 놀림을 이번 에디션의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에서 들을 수 있다. 이 곡에 관한 하인츠 베커의 설명을 옮겨본다.



초기에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솔로 부분이 유독 연주하기 어려워 쉽게 공연되지 못했다. 제네바 호수 근처 클라랑에서 협주곡을 쓰던 중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코텍의 제안을 수용해 제 1악장을 다시 썼으며 완전히 새로운 안단테 악장으로 교체해서 나중에 따로 출판했다. 하지만 에밀 소레처럼 요제프 코텍 역시 이 작품을 연주하기를 거부했다. 레오폴드 본 아우어 역시 기술적인 부담을 느끼고 동료 연주자들에게도 이 곡의 "무시무시함"을 경고했다. 결국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산더 브로드스키가 1879년 빈에서 초연을 하는데 동의했다. 이 협주곡에서 차이코프스키는 기존 형식에 메이지 않고 고전적인 협주곡 양식에 많은 자유를 부여했다. 따라서 제1주제의 도입부 모티프는 튜티에서 전개되어 솔로의 등장으로 완전한 모습으로 이어진다. 보통 제1악장의 끝부분에 등장하는 카덴차는 주축이 되어 말 그대로 작품의 중심에서 생동감의 요소가 된다. 제2악장에서 마지막 악장으로 바로 넘어가는 부분은 차이코프스키의 서로 다른 성격의 악장을 한데 엮는 뛰어난 즉흥성을 보여준다. 피날레의 주요 주제의 도입부 모티프는 오케스트라에 의해 이어지며 베토벤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전개부 느낌의 진행은 마지막 악장의 완전한 주제가 등장하기에 최상의 기초가 된다. 
-하인츠 베커
 


 능숙하고 객관적이며 정서적으로 숭고한 브람스의 흐름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감정의 폭발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듯한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듣는 이로 하여금 작곡가의 다양한 개성이 느껴지는 비등점을 느끼게 하는데, 이번 미셸 오클레르의 필립스 레코딩의 첫 장은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콘체르토가, 세 번째 장은 브람스의 바이올린 콘체르토가 사이좋게 함께 하고 있다. 차이코프스키에서는 악단과의 긴장이 팽팽한 직설적인 연주를, 브람스에 가서는 단아하고 조용한 울림을 들려준다. 



 연주자가 활용하는 악기가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다양한 음색과 깊이를 개성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속도의 지점이 지적하는 비등점을 그 개성에 덧붙이고 싶다. 곡에는 메이저, 혹은 마이너로 표기한 조성이 있다. 흔히들 처음 클래식을 접하는 이들이 어려워하는 긴 제목에 곧장 나타난 이정표. 또한, 곡 앞에는 알레그로 몰토, 안단테, 알레그레토 논 트로포 등의 작품 성격을 설명하는 단어가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속도란 무엇인가? 명랑한 알레그로와 느린 아다지오의 성격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느리고 빠른, 명랑하고 슬픈 것에는 정답이 없다. 그러므로 연주자는 작곡가가 뜻했던 정확한 속도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곡 자체에서 자신이 알아낸 자신의 해석을 연주를 통해 드러내야 한다. 연주자의 음악성을, 개성을 알아낸다는 것은 이 정답 없는 흐름을 어떻게 펼쳐나가는지를 들으려 노력한다는 것이 아닐까.


 
 미셸 오클레르는 큰 낙차를 지니지도, 거대한 스케일을 품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만들어내는 무지개의 노랑에서 초록으로 흐르는 연두와 노랑의 얇은 끝처리는 흡사 지금 다가오는 봄처럼 가늘지만 분명하게 맥박한다. 음표를 자신의 머릿속에서 읽었던 그대로 명쾌하게 만드는 단정함이, 긴장과 완급을 나직하게 조율하는 그녀의 바이올린. 듣고 있으면 고전음악 애호가들이 종종 그리워하는 '그 시대'가 궁금해진다. 지네트 느뵈, 아르튀르 그뤼미오, 크리스티앙 페라스, 피에르 아모얄, 오귀스탱 뒤메이로 이어지는 프랑스-벨기에 악파의 그 시대. 지금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지만 지난 세기에는 더욱 또렷했을 당시의 국경의 밤들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채기와 상처, 혹은 흉터. 

나도 몰랐던 나의.

살아남은 흔적에 대한 찬사로는 으레 조금 놀랐다는 예의 바른 메아리, 

문득 남겨지는 안타까움.없는 줄 알았던 피부 생채기가 눈에 보이는 날이 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이후로 나아갈 때마다 발에 걸리는 어떤 무엇. 

상처와 피는 늘 흉터로 자리 잡는데, 왜 몰랐을까.




아마도 그것은 문득.




곱게 펼쳤던 트레이싱지를 자르다가, 혹은 무언가를 잘못 밟아서, 발을 헛디뎌서, 손끝을 잘못 놀려서.

순간의 '어느 날'. 

펼친 종이 칼끝으로 스윽 긋던 오후. 

발끝 유리 빠득 소리 낼 것 같던 한밤. 

살짝 튀던 비명. 스윽 혀끝 감촉, 파닥 뛰던 심장. 




울음 끝난 후가 아닌 울음 시작하는 생채기 비밀.

두연, 문득, 홀연. 




암흑이 순백으로 보일 때가 있지. 그럴 땐 흰 바탕에 흰 글씨를 쓰는 하얀 사람이 밤의 모서리에 석고를 바를 때. 우주의 처음과 끝이 약봉지 속에서 떨어져 내린 알록달록한 알약처럼 친밀하게 느껴질 때.









 앤드루 포터의 단편 모음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책장을 펼치면, 헤더의 시선이 조용히 닿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바스러지고 홀연홀몰하고 만다. 갑자기 문득 나타났다가 갑자기 문득 사라진다. 어느 순간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왈칵 거리고 파닥거린다. 아무 자국이 없고 매끈하다 생각하였건만 어느 순간 눈물이 나타나는 순간이 온다. 




 그것이 어떻게 파닥거렸던가. 물리학 기말고사의 방정식의 제출과정을 유일하게 제출한 헤더를 로버트가 자기 집으로 초대해 차를 대접하며 두근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쩌다 왈칵 쏟아졌나. 두 사람이 술집에서 손잡고 술을 마시다 헤더의 애인 콜린에게 들키면서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그것은 어떻게 돌이킬 수 없었던가. 문득, 뜻하지 아니하게 갑자기. 십이월의 어느 날부터 줄곧 로버트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헤더의 고백체 문장은 종이 위 잉크자국과 눈 위의 발자국, 어느 것이었을까. 




 남자친구가 있다는 헤더의 말에 로버트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답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말에 로버트는 기쁘다고 말한다. 이러한 대화에서 보듯, 앤드루 포터의 문장은 쉽게 스민다. 삶이 베일 때 손끝에서 피가 솟아나듯 흥건하게 일어나는 반응을 만든다. 스미는 빛과 정지하거나 움직이는 물체를 떠올리면 우리가 간과하는 진실, 늘 스쳐 지나가는 진심으로부터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도망치는 그물이 보인다. 표제작의 침착하고 조용한 나이 많은 남자친구와 같이 꾸미지 않은 단정한 문장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곧, 단편 소설의 상처와 비밀. 




아파도 절반만이 아프고 누워도 절반쯤 잠을 자는 그런 밤이 올 때가 있지. 그럴 땐 추위도 모르는 때. 북극의 지평선 저만치에 놓인 냉장고가 되는 때. 그땐 소리가 없지. 방 한 칸이 줄 없는 비파처럼 통째로 공명통이 되지. 그럴 땐 울음에 홀리지. 홀린 채로 헐리지.





 헤더는 콜린을 만나기를 기대하지 않는 만큼 로버트를 만나기를 기대한다. 박수소리가 무대를 밝히듯 약속이 서로의 마음을 밝힌다. 서로 만나지 말아 달라는 콜린의 부탁은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외부의 충격이 아닌 내부의 실금. 보통 우리의 삶은 이렇게 무너져 내린다. 변명할까, 하지 말까. 이 남자를 사랑할까, 저 남자를 사랑할까. 이런 문제가 이 짧은 이야기의 맨 앞으로 나왔다면 이것은 오셀로의 재탕이 되었을 것이지만 앤드루 포터는 죄의식과 소유, 진실과 우리가 모르고 지나가는 어떤 것의 상실을 생채기와 함께 보여준다. 아파도 절반만 아픈 날, 누워도 절반쯤 자는 밤. 추위를 모르고 홀로 소리 없이 헐리는 밤. 장편의 진실은 팔짱을 끼고 옆에서 걷는데 단편의 진실은 늘 반걸음 뒤에서 홀연히 나타난다. 없던 것을 잃어버리는 순간, 북극의 지평선 저만치 놓인 냉장고가 소리도 없이 우는 때.





암흑이 비단처럼 보일 때가 있지. 그럴 땐 흑장미와 흑장미 가시와 흑장미에 앉은 벌 한 마리와 흑장미 그림자조차 비단이 되는 때. 가장 시린 한 구석만이라도 잠시만이라도 그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싶어지는 때. 지금은 시린 발을 담그지. 바닷물처럼 그 속에 정강이를 담그고 조금씩 조금씩만 앞으로 나가보는 때. 할 말은 혼자서만 하는 때.





 어떤 순간은 어떤 순간 자체로 남는다. 보면 보이는 것, 읽으면 읽히는 것. 그래야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원하는 일이라는 착각. 고집과 거부가 아닌 자기보다 더 자기를 잘 이해하는 이에게 펼치는 비단. 이해한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 말은 혼자서만 하는 때가 뒤따른다. 죄책감은 고백의 뿌리라고 헤더는 말한다. 헤더가 하는 결정과 늦은 밤 울리는 흔적 없는 전화, 애써 믿고 싶은 무엇과 떠오르는 진실. 헤더는 필수 사항과 불필수 사항 사이에서 훌륭한 균형을 잡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어느날 가끔, 서랍 속 어떤 구석이 헤더의 눈에만 보인다. 일말의 죄의식은 자초하여 있는 모든 상처 처럼 영원하며, 행동 자체만큼이나 생생해진다는 그녀의 생각처럼 홀연히.





파르락, 스윽, 빠득, 토독, 파닥.

종이가 펼쳐지고 칼끝은 스윽 갈 길을 간다. 

빠득 소리 없이 파고들고 둔탁한 발끝으로.

결국, 빨리 뛰는 심장이 위험 신호를 보내는 내일의 기억. 





 우리는 저마다 비슷하게 다치지만 남의 행복에 자신의 행복을 꺾으면서도 남의 불행에 자신의 슬픔을 내려놓지는 못한다. 상실, 상처, 고통, 회한. 기억이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남기지만 그것으로 어쩌면 어제의 예언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기억의 주름은 종종 죄의식과 고백,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누구나 그것을 마음속 서재의 세 번째 서가 다섯 번째 칸 같은 곳에 담아두고 혼자 걸음할 때가 있다. 굳이 애써 페이지를 뜯어내거나 재차 숨은그림찾기를 하지 않아도 그곳에 그대로 있는. 늦은 밤, 옆에 누가 있든 아니면 혼자 소파에 앉아있든 아무도 모르게 지하로 난 계단을 발소리도 없이 내려가 불을 켠다. 기억하고 있는 서가의 그 책장 칸에서 바로 그 책을 꺼내어 들면, 그 날의 내가 눈에 밟힌다. 다시 지상의 공간으로 올라오기 전 책장을 훑는 손끝이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은 문장이나 단어 끝 마침표나 줄임표. 문득 어느 한순간의 강력한 한 방이 아닌 내 안에서 조용히 이어져 온 가느다란 실금의 흔적으로 찍힌.......





해갈을 욕망하고 지내다 보면 어느새 물을 잊게 되지. 사막낙타가 사막낙타가시나무를 우물우물 씹듯 제 입안에 고인 핏물로 목을 축이듯. 이게 내가 식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암흑은 인공위성으로 어제 찍어둔 빙하. 오늘은 사라지고 없을 테지. 





*파란색 글씨는 모두 김소연 시인의 시집 <눈물이라는 뼈>에 수록된 '비밀'의 조각과 전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4-02-23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에서 김소연의 시집을 다 뽑아들고 그중에서 어떤 걸 사야할까 고민했던 날이 있었어요.
<눈물이라는 뼈>라는 시집 제목에서도 보이듯이, <마음사전>이라는 책 내용도 그렇듯이, 김소연 시인은 보통 사람이 흔히 쓰는 단어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 새로운 의미를 붙이는데에 탁월한 능력이 있는 시인 같아요. 암흑과 순백, 울음과 공명통, 눈물과 뼈, 알록달록한 알약의 이미지란 또 어떤가요.
너무 일찍 깨어나서 좀 더 자려고 소설가 한강의 목소리를 귀맡에 틀어놓고 한동안 누워있다가 일어난, 그래도 아직 새벽이네요 ^^
윤상의 저 노래는 제목부터 공감입니다. 흔해빠진 사랑, 정말 흔해빠진 사랑 맞아요.

Jeanne_Hebuterne 2014-02-23 20:05   좋아요 0 | URL
hinine님, 김소연 시인은 저도 참 좋아하게 되었답니다. 시인이 쓰는 산문은 단어 활용이 소설가가 쓰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가 보여서 <마음사전>을 유심히 읽었지요. 종종 낱말을 가리고 뜻만 보고 그 대상이 어떤 단어인지 알아맞추는 놀이를 혼자 한 적도 있었어요. 설레임, 첫사랑, 이런 것들이 김소연 시인의 필터를 거치면 묘하게 하늘거리는 것 같았어요. 애매할수록 정확해지는 것 같았어요. 세상이 애매하니까요.

hnine님은 그러고 보면 검푸른 새벽과 참 어울리는 분인듯 해요. 단상과 감상을 효율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을 흘려보내시지 않으시니까요. 새벽에 듣는 윤상은 늘, 소리 전체를 울린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일렉트로닉스와 제 3세계 음악을 자신이 원하는 만큼 섞는 재주와 초반 박창학의 가사가 그랬더랬지요. 흔해빠진 사랑인데, 가사 말미에 나오는 남몰래 따라 부르는 서글픈 멜로디, 그 부분에 마음이 홀렸더랬어요. 결국, 남몰래 나도 부를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으로 들렸는데 저역시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을거란 생각에서요. 흔해빠진 것의 위력은 이런 부분에서 나오나 봅니다.

다크아이즈 2014-02-23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물이라는 뼈, 저도 관심 있었는데, 여기서 발견하네요.
<암흑이 비단처럼 보일 때가 있지.... 가장 시린 한 구석만이라도 잠시만이라도 그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싶어지는 때. 지금은 시린 발을 담그지. 바닷물처럼 그 속에 정강이를 담그고 조금씩 조금씩만 앞으로 나가보는 때. 할 말은 혼자서만 하는 때.> 이런 구절들의 향연이라면, 제 폐부를 찔러도 사서 보는 수고로움은 마땅하다고 봐요.

생채기, 상처, 흉터 이런 말은 저도 너무 자주 써서 이제 그 말들의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어느새 들여다 보면 그런 낱말이 난무하는 단상들을 보고 확, 정신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그것들을 내가 곱씹어서 얻은 게 뭔데? 이런 오기 같은 게 생기지 뭐예요? 해서 요즘은 그 말들을 안 쓰려고 안간 힘으로 버티는데 그게 잘 안 되지 뭡니까?


에뷔테른님도 휴일 잘 견디시어요^^*

Jeanne_Hebuterne 2014-02-23 20:10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휴일이 다 간 지금 팜므느와르님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약간은 헐렁하고 약간은 묵직한, 늘 '약간의' 시각입니다.

김소연 시인의 시를 접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시를 읽은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단어의 선별, 조사의 사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김소연 시인의 시에서 느끼곤 했습니다. 지금 시린 발을 담근다고 하지 않고 '지금은' 시린 발을 담근다고 할 때, 어제와 오늘은 다른 순간이 되는 것 같아요. 우리 말은 조사로 인해 부정확해지고 도리어 조사로 인해 더 정확해지는 순간이 많은데 시인과 소설가의 글은 조사 사용으로 인하여 그들의 개성을 드러내는 듯합니다.

생채기, 상처, 흉터. 참 슬프고 아련하고 반면 단단하고 굳건한 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어요. 말들의 감옥이라는 표현에 잠시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말들의 감옥에 저마다 갇혀있다면, 저는 종종 그 벽이 점 좁아지는 감옥에 들어 앉아 있는 것 아닌가, 하고요. 그래서 요즈음은 낱말을, 좀 더 곱씹어 보고 소리내어 읽어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종이 위의 글씨와 공기 중의 글씨는 참으로 다른 것 같아서요.

휴일이 다 갔습니다. 이제 새 날이 또 오겠지요. 주말 마무리 잘 하시고, 재미있는 새로운 한 주 되시기를 바랍니다 :)
 

 






 

 어떤 선물, 유일무이한.





 한 남자, 피아노와 성조기를 등지고 관객을 향해 허리를 약간 굽혀 인사한다. 객석은 가득 찼고 사람들은 일어나 있다. 흑백이라 잘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 얼굴에 웃음이, 연주회장일 거라 짐작되는 장소는 박수소리로 가득하였음이 느껴진다. 그들은 그들이 들었을 희로애락에 고마워하는 것이리라. 카네기 홀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1891년부터 카네기 홀은 뉴욕의 클래식 음악 연주회장으로 명성을 높여왔다. 그 명성은 셀 수 없이 많은 오케스트라, 지휘자, 앙상블,  성악가와 독주 악기 연주자들이 거쳐 감으로써 120년 이상,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카네기 홀은 어떻게 가나요?' 라는 여행객들의 질문에 어느 뉴요커가 '연습, 연습, 연습이오!' 라고 답했다는 농담이 아직도 전해지는 곳. 바로 카네기홀 연주회 실황을 엮은 귀중한 박스반을 선물 받았다. 





         







 고마운 마음 한가득에 열린 귀에는 기쁘고 화나고 사랑하고 즐거운 마음. 

 피아니스트가 창조할 수 있는 모든 음악.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음표는 그것이 무엇이건 읽을 수 있는 음악의 모든 것을 품었다. 모차르트의 밝음, 쇼팽의 맑음, 리스트의 기교, 스카를라티의 생동, 스크리아빈의 파괴. 이 희로애락을 듣노라면 세상에 그가 표현하지 못했을 감정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1903년 러시아 태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1925년 베를린 연주를 시작으로 1928년 뉴욕 카네기 홀에서 토머스 비첨 지휘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하룻밤 새 유명해진 연주자가 된다. 




  I played the octaves the loudest, the fastest, they ever heard in their life.




 이 박스의 첫 장은 토머스 비첨과의 카네기홀 데뷔 무대가 아닌 토스카니니와의 협연인데, 그 속도감과 박력에 뒤따르는 서정적인 느낌은 여전하다. 피아니스트의 피아니스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연주가 그 뒤로도 이어지니, 머레이 페라이어(유일무이한 연주), 루빈스타인(나보다 뛰어난 연주자), 라흐마니노프(편집권을 아예 넘겨버림), 클라우디오 아라우(내가 꿈꾸던 세계를 그는 이미 완성했다.)와 같은 연주자와 작곡가들의 찬사가 그의 피아니즘을 보증해준 셈이다. 속지에서 전하는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연주 감상을 잠시 들어보자.




 It was an incredible shock for me because it was more Horowitz than what I thought Horowitz was. Nelson and I were sitting there holding hands, tense. The strength of his expression, the sound, and this incredible violence he has inside which is so strange, weird and frightening. That he can express it. He's like possessed. I've read about this, but this was the first time that I saw on stage someone who has that!




 과연, 연주를 들어보노라면 아르헤리치의 감상과 다른 피아니스트, 작곡가들의 말이 틀림이 없다. 카네기홀의 첫 연주라는 1943년 4월 25일의 연주는 지금과 비교했을 때 열악한 당시 녹음 상태를 참작하더라도 충분히 충격적이다. 저 연주가 정말 70여 년도 더 전에 있었던 연주일까? 음반 자켓을 보면 마치 초대장처럼 이러한 글씨가 보인다.







CARNEIE HALL

presents


Vladimir Horowitz

Pianist


THE HISTORIC BROADCAST 

OF APRIL 25, 1943


Tchaikovsky : PIANO CONCERTO NO.1

NVC Symphony Orchestra

Arturo Toscanini


Sunday afternoon, 3:30 o'clock.







 이 박스반의 특징은 이렇게 새겨진 생생함에서 온다. 또한, 모든 음악이 같을 필요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된다고 말하듯 1943년 토스카니니와 협연할 때의 호로비츠와 1976년 로트로포비치와 협연할 때의 호로비츠는 같지 않다. 협연을 잘 하지 않아 협연이 드문데 이 박스반의 협연을 들어보면 그가 오케스트를 어떻게 압박하지 않고도 압도하는지 알 수 있다. 

 비록 녹음상태가 옛날일수록 좋지 않아 감상에 무리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음질과 무관하게 지나간 어떤 시간을 돌이켜볼 기회라는 것도 흔치 않은 것이 아닐까. 일례로 1966년 연주회에서는 객석의 기침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1949년 연주에서는 희미한 잡음이 짧지 않게 드리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호로비츠의 연주는 진눈깨비, 안개처럼 있으되 있지 않은 것을 펼친다. 더군다나 모든 음반이 다 그런 것도 아니며, 카네기홀에서의 그의 연주를 시간 순서로 모아 조금씩 변하는 레파토리와 연주자의 개성이 점차 다듬어지고 또렷해지는 것이 보인다는 것이 이 박스반의 큰 장점이다. 





 마흔하나의 음반, 마흔하나의 다른 얼굴. 

 연주는 때로는 강렬하고 때로는 나른하고 때로는 천진하기까지 하다.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팔꿈치는 아래에 축, 손가락을 쭉 편 채로 손바닥은 아예 건반 아래에 내려가 있다. 호랑이처럼 포효할 때도 있고 햇빛 아래 이슬처럼 반짝일 때도 있다. 그러나 과장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다. 일례로 '겨울바람'이라는 부제로 유명한 쇼팽의 에튀드 Op.10-4. 리히터의 연주는 2분 3초가 걸리는데 호로비츠의 실황에서는 40여 초가 더 길다. 리히터는 으르렁거리듯 단숨에 한 덩어리의 바람이 되어 귀를 훑는다. 호로비츠는 앞과 뒤의 균형을 조심스레 찾아나가며 음표를 하나씩 쌓아올린다. 전체를 들으면 두 연주자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씩 드러난다. 해석의 차이는 이런 것이 아닐까. 시간이 더, 혹은 덜.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내가 자주 떠올리는, 어떤 이의 말, 음악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 강함과 약함, 좀 더 긴 시간과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만약 어느 것은 강하고 어느 것은 약하게 한다면, 강한 것은 어떻게 강하며 약한 것은 어떻게 약한 것일까? 강하게 한다면 약함과의 대비를 통한 강함일까, 그것 홀로 두드러지는 강렬함일까? 




 그 강렬함 속에서 읽는 어떤 색깔.

 

 

 

우리는 파란색을 안다고 생각한다.우리는 파란색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먼셀 표색계, 혹은 삼원색의 하나라는 국어사전의 설명으로 그 파랑이 완벽한 파랑이 될 수 있을까? 스펙트럼을 통과했을 때 초록과 남색 사이의 어떤 흐름을 파랑이라고 한다면, 초록에 가까운 파랑도, 남색에 가까운 파랑도 파랑일 것이다. 그러나 노랑 위의 파랑과 빨강 위의 파랑이 다르듯, 음악은 마치 시처럼,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자 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내가 호로비츠를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스카를라티, 스크리아빈처럼 호로비츠가 아니면 몰랐을지도 모를 작곡가의 음악. 얼굴을 바꾸는 연주. 하나하나 음표를 공들여 쌓듯 하는 성실한 연주. 말년으로 갈수록 표현력은 점점 증폭되고 강렬해진다. 그를 일컬어 많은 음악평론가와 고전음악 애호가들은 '마지막 낭만주의자'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그가 정말 '마지막 남은' 낭만주의자여서가 아니라, 그만큼 시대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손가락을 쭉 편 채 음표를 하나하나 가다듬듯 어루만지다가 점차로 자신이 쌓아올린 이미지의 정점을 보여줄 때의 호로비츠는, 유일무이하다. 마치 수백 번도 더 해보았다는 듯한 무심한 움직임과 호로비츠 자신이 아니면 보여줄 수 없었을 연주. 멀리서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시선의 이동. 듣는 이의 눈앞에 끌어내는 이미지. 피아니스트가 이해하는 음악의 얼굴. 이것은 어쩌면 훌륭한 연주만이 아닌, 훌륭한 글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특징일 수도 있다. 그의 음악은 글을 닮았다. 그 닮은 얼굴을 보노라면 상하좌우가 바뀐 듣는 이의 마음이 스친다. 호로비츠의 음악이 주는 메세지를 듣다 보면 위대한 연주, 유일무이한 연주란 무엇인가가 보인다. 이것이 바로 내가 호로비츠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이 박스반에는 12년간의 은둔을 끝내고 카네기홀에 다시 선 1965년 5월 9일의 실황이 담겨있다. 속지를 살펴보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It is here I should start again. 



 12년의 쉼이 어떠했을지, 그 쉼 후 다시 시작하는 마음이 어떠했을지 음반 뒤에 감상을 덧붙이며 짐작해 본다. 거침없는 리스트를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파괴적인 스크리아빈으로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공연은 음반과는 달라서 청중과 무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 이 분명함에 있어서 호로비츠가 침묵을 걷어내기 위해 생각한 것은 바흐의 토카타였다는 것.  

 

 

 조용하게 퍼지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피아노 소리가 뚜벅뚜벅.

 

 

 

 쉼을 끝내고 어디론가 떠나거나 어디에선가 돌아올 이가 있다면 나는 1965년 5월 9일 일요일 오후 3시 30분, 호로비츠가 연주한 바흐의 토카타를 권하고 싶다. 그 뚜벅뚜벅 발자국을 일러주고 싶다. 언젠가의 네가 나에게, 언젠가의 나를 나에게. 이미 지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무엇을. 그리하여 우리는 계속 흐를 것이며 음악도 계속 흘러, 잡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이렇게 여기에 기억될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oonnight 2014-02-17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잔님께 꼭 맞게 어울리는 선물인 듯. +_+; 너무 예뻐요.>.<
잔님 페이퍼를 읽다보니, 저도 소장하고 싶은(듣고 싶다기보다;;;) 욕구가 마구 끓어오르지만 저같은 막귀인간-_-이 사기에는 음반에게 미안해진다는. ㅜ_ㅜ 그치만 갖고 싶다. ㅠ_ㅠ;;;

Jeanne_Hebuterne 2014-02-17 22:33   좋아요 0 | URL
moonnight님! 늘 한결같은 님 퍼스나콘을 보면 어쩐지 여기가 덜 낯설어 보여 안심이 된답니다. 제가 은근히 든든해 하는 것, 아시지요? 요즈음 이것저것 바뀐 것이 많아 좀체로 껍질에서 나오질 못하고 있었거든요. 이럴때 보이는 반가운 얼굴을 보면,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몰라요!

음반에게 미안해질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여림히 잘 들으면 그 자체로 좋지 않을까요? 저도 아는 것이 없어 몹시 헤매는데, 이 박스반은 가격면에서도 내용면에서도 꽤 알찬듯 싶습니다. 호로비츠 만년의 연주는 많았으나 초기 연주도 많고, 특히 토스카니니와의 협연이 무척 좋아요. 음반을 잘 살펴보니 프라이빗 레코딩도 좀 있어요. 출처를 알 수는 없지만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원은 아닌듯 합니다. 게다가 dvd도 몇 장 있어 호로비츠의 음악을 처음 접하는 이에게도, 팬에게도 꽤 의미있는 선물이 될듯 합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계속 새로운 것이 보여서, 꼭 드라마 보는 재미처럼 매일밤 듣게 되었어요. (실제로 보면 더 이쁘답니다. 문나잇님 취향에도 딱일듯!!!)

moonnight 2014-02-18 13:50   좋아요 0 | URL
잔님... >.< (뭐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팬심ㅜ_ㅜ)


그나저나,

헉 이렇게 부추기시면... 이 손가락은 왜 멋대로 클릭클릭;;;;;
잔님 덕분에 용기내어봅니다. 저도 들어볼래요. 불끈;
예쁘다 예뻐+_+;;; (계속 감탄중 +_+;;;;;;;;;;;;;)

Jeanne_Hebuterne 2014-02-19 15:04   좋아요 0 | URL
즐거운 감상 되시기를 바랍니다, moonnight님!! :)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곳에 자취를 남겨주셔서 제가 더 고마워요!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
실비아 플라스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잊었다. 전기밥솥에 밥도 넣지 않고 코드를 꽂아둔 채 '보온'을 눌러둔지 까맣게 잊었다. 마지막 취사가 기억나지 않았으니 얼마 동안 부푼 공기를 애써 덥혔는지. 잊지 말아야지. 오랫동안 밥통을 쓰지 않을 때엔 반드시 코드를 뽑아 두자. 그러나 이를 어쩌나. 오늘 아침밥이 한가득 남아있다. 이대로 먹지 않고 잊으면 이제 내리 석 달을 밥통은 신이 나서 제 온기를 돌려댈 것이다. 나는 이렇게 까마득히 잊는 일이 많다. 잊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망각을 이상하게 볼 수도 있겠다. 그러면 잊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깥에서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고 육화하여 안에 지니는 일이다. 반대로 잊는 것은 무엇인가.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일이다. 내다보아서 내 것이 되지도 않고 단열과 방음이 잘 된 방에서 기껏해야 부러워만 할 뿐이다. 무엇의 안쪽에 있는 내게는 무엇의 안쪽만 보인다. 그러나 아마도 밖에서 들여다 보는 이의 눈에는 슬픔과 기쁨, 고단함과 휴식, 바윗덩이와 자갈이 보일 것이다. 서랍에서 그것을 끄집어내고 싶었으나 내 서랍은 텅 비었다. 잊었기 때문이다.



 

 찬란하게 흐린 아침......지난밤 한 시간의 여유가 주는 달콤한 선물. 매일 이럴 수는 없을까? 자닌, 디나, 제스 마리까지 여자 신입생들은 모두 아침을 먹은 뒤 성경책으로 단단히 무자하고는 예배가 마치 버스라도 되듯 놓치면 안된다고 재잘거리면서 교회로 몰려갔어. 나는 무신론자의 커피를 석 잔째 마시며 친구들을 향해 자애로이 웃어 보이고는 실존주의자의 달걀을 먹었지. 다들 착하지만, 아, 맙소사, 너무 어려. 무 어리다고, 스무 날만 지나면 스물네 해도 끝나고 스물다섯 해를 맞이하겠지. 이렇게 말하면 잔인할 수도 있지만 사실인 걸 어떡해. 사반세기가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말이야. 오, 주님. 나머지 칠십오 년은 해가 뜨건 달이 뜨건 폭풍우가 불건 피바람이 휘몰아치건 주님의 영광으로 복되게 해주시옵시서.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이 나왔다. 책장을 넘겼다. 나의 사랑 테디에게 보내는 1956년 10월 7일의 실비아 플라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육하의 거의 모든 것을 안다. 1956년 10월 7일, 케임브리지 대학교 뉴넘 대학 여자 기숙사에서 실비아 플라스가 테드 휴즈에게 편지를 사랑을 담아 썼다. 그러나 아무리 추측해 보아도 완벽하지 않은 두 가지가 있다. '어떻게' 와 '왜' 이다. 둘 중 하나는 어떻게든 추측했도 나머지 하나는 흐릿하다. '나의 사랑 테디' 이 음절이 주는 잘 막힌 띄우기와 시원하게 뚫린 은근함에서 오는 비는 공간.




 

 아마도


 어느 흐린날,


 어쩌면


 두 사람이 손 맞잡고 건너도 충분한 길을 


 언젠가


 에이리얼의 입김처럼 황홀하게 걷는 걸음으로


 다시, 아마도


 '아마도' 였을 것이다.


 



 일요일은 싫어. 편지가 안 오니까. 편지로 읽는 당신 목소리가 그리워. 얇지만 글이 명쾌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책을 읽어봐. 이 책이 바로 나의 실존이야. 화날 정도로 잘 쓴 책이지. 제발 금요일에 런던으로 오라고 이야기해줘. 일요일까지 같 있을 수 있게 말이야. 칸 로스한테 연락이 오건 안 오건 상관없어. 



 

 '아마도'의 눈길로 책장을 넘기면 테드 휴즈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위와 같은 마무리로 끝을 맺는다. 실이 매듭을 짓듯, 보고 싶다는 말로 시작하여 보고 싶다는 말로 되돌아간다. 책 읽는 손끝. 육하를 다 끼워 맞추었으나 끝끝내 남는 '아마도'. 바다 우뚝 외딴섬처럼 그것이 전달 못 하는 진실.




 느낌이 말한다. 



 들리세요?



 귀기울이면


 



 나의 사랑 테디. 

 운을 떼던 그녀가 '엄마, 사랑하는 우리 엄마에게' 라는 편지로 잠시 옆을 본다. 

 데 듀 콩티노 호텔, 프랑스 파리, 1956년 8월 25일. 그 옆 각주가 따귀처럼 따라붙는다. 플라스는 어머니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증오한다고 밝혔노라고. 이 선명함. 이 불안함. 무지개의 흔들리는 스펙트럼을 무지개 안에서 밖으로 바라본다. 편지는 밝고 경쾌하고 간결하다. 언제 무엇을 했고 어떻게 하고 싶다는 것. 어떤 것을 보았다는 것. 이 수많은 '것'들이 실비아 플라스와 오릴리아 플라스 사이를 오간다. 종이에 펜과 잉크로 호기심 많은 고양이를, 테드 휴즈를, 호텔 전경을 그린다. 앞과 뒤, 오른쪽과 왼쪽을 보면 실비아 플라스가 바라본 고층에서 떨어진 깃털이 보인다. 




You walked in, laughing, tears welling confused, mingling in your throat. How can you be so many women to so many people, oh you strange girl? 



 테드 휴즈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사이 끼어드는 그림을 보다 책장을 넘기던 손끝에 걸린 실비아 플라스의 말 한마디. 1952년에 스스로에게 한 말이었으니 이 드로잉북보다 조금 전이다. 그러나 그 후에 끼어든 아빠는 또 다르지 않았나.




At my twenty I tried to die...but they pulled me out of the sack.

And they stuck me together with glue.






 천천히 번지는 어둠과 쉽게 스미는 절망을 섞으려는 시도. 검정과 보라가 1963년 11월 아침에 드러났다. 빛과 밝음이 주는 그림자, 이런 실마리는 그러나 이 드로잉집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내가 이토록 찬란한 흐림을 첫 문장에서부터 느낀 것은 오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 보이지 않는 무지개. 그러나 일부 스펙트럼이 눈 끝에 걸린다. 관찰, 그리고 관찰한 것을 표현하려는 움직임. 펜 끝을 세우거나 눕히고, 짙거나 옅게. 우산과 구두, 정박한 조그마한 어선과 회벽의 공동주택. 이 전체를 지나고도 독자 안에 틀어박힌 무심한 이는 '무엇을 보았나?' 라는 질문에 우산과 구두, 정박한 조그마한 어선과 회벽의 공동주택을 보았어요.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정작 보아야 하는 것은 다 놓친 채.




 나는 왜 기억하지 못하고 모두 잊어서 슬픈가?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해서이다. 지나치고 잘못 알 정확하지 않은 무엇. 정보와 느낌이 섞인 글. 시선이 어긋난 달의 옆모습. 그 옆모습은 무엇인가? 책 속에 길이 있으니 고전을 읽으라는 공허한 말. 어떤 영화가 내게 큰 감동을 주리라고 도리어 내가 벼르고 갔던 나날. 느낌이 그저 '좋으니까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라는 것에 그쳤던 그릇된 감상. 너무 볶아서 나오는 쓴맛을 구수함이라고 느끼던 어느 날.




 그래서 그 맛도 향도 느낌도 감동도 길도 정작 나의 길과 일치하지 않았던 허무함. 




 이 안타까움을 읽지 못하면 실비아 플라스의 드로잉은 습작에 불과한 것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요네하라 마리의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 라는 고양이를 다룬 수필도, 백석의 '가난한 내가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내린다'는 시 구절도, 칸 로스한테 연락이 오건 안 오건 상관없다는 실비아 플라스의 편지도, 결국은 관계에의 애정, 사랑하는 마음, 기다리는 마음을 담았건만 그것을 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 속에 숨은 것을 찾아내고 그 밖에 나타난 것을 거울에 상하 좌우 앞뒤 비추어 본다.

사람이 사람의 입으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지리와 멸렬에서 벗어나려는 작가의 눈길. 그 길을 눈으로, 발끝으로 내딛는다. 실비아 플라스는 그녀의 다른 글에서 "my lusts and my little ideas"라는 어구를 남긴 적이 있다. 작은 생각이라는 부분에서 눈이 멈춘다. 붉음이 옅어지고 흐려져 흰색이 되는 어느 지점, 말할 필요 없는 것은 자르고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그럼에도 언어로 남기려는 노력. 언어를 업으로 삼는 이의 노력은 이런 것이다. 짧고 간결한 편지 속에는 광기도 어둠도 괴로움도 없다. 아빠, 개자식. 이런 외침도 없다. 그러나 나무는 마침내 헐벗고 만다는 시를 노래하는 시인의 또 다른 생활이 그녀가 눈으로 찍은 자신의 시선으로 들어있다. 




 농게가 득실거리는 록하버 만의 진흙 웅덩이에서 괴이한 광경 목격. 바스러질 듯 메마른 습지 풀이 갯가를 에워싸고 간기가 끈끈히 배어나는 황록색 개펄이 저 멀리 펼쳐진, 물 빠진 갯바닥. 한복판으로 갈수록 질척해지는 개흙 밭. 딱딱한 껍데기를 등에 얹은 채 바스락바스락 붅히 움직이는 흑녹색 농게들로 진흙 바닥이 살아서 꿈트랜다. 큼지막한 연녹색 집게발 하나를 쳐들고 옆으로 기어가는 모양새가 마치 거미와 갯가재와 귀뚜라미를 잡종 교배한 듯 사악하다. 둑 가까이 있던 놈들이 우리 발소리를 고는 잽싸게 둑으로 기어오르더니 거무튀튀한 진흙 바닥에 난 구멍으로 쏙 들어가거나 풀뿌리 사이로 몸을 숨긴다. 물 빠져 시커멓게 드러난 질척한 갯바닥 한복판에서는 농게들이 얕은 진흙의 겉켜를 파고들지만 집게발은 여전히 툭 튀어나와 있다. 바싹 마른 풀뿌리와 메말라가는 홍합 껍데기 더미 사이에 난 수억 개의 구멍에서 집게발과 눈알이 밖을 또록 내다본다. 야트막한 둔덕에 게딱지로 만든 전구가 수억 개 박혀 있는 것 같다. 이미지 하나. 게들이 저 아래 덩이진 개흙에서 사락사락 살아가고, 기이한 습성이 지배하는 진흙으로 이어진 별세계, 그곳에 대한 괴이한 이미지.









 나는 앞서 망각과 기억, 안과 밖, 앞과 뒤, 바라보기와 그 속에 숨은 것을 생각했다. 

 실비아 플라스의 습작과 짧은 편지를 보노라면 생각 도중 '아마도'로 뒤덮인 한 구역이, 무엇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선명하게 들리는 것을 느낀다. 그녀가 쓴 글은 이미 완성을 거쳐 우리 앞에 있다. 내 앞에, 당신 앞에. 우리는 끝내 그 글을 이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끝난 채로, 매듭을 가졌으니까. 




 실비아 플라스라는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테드 휴즈의 생일 편지와 실비아 플라스의 시 선집, 일기와 편지, 드로잉으로 실비아 플라스를 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육하원칙을 떠올려도 '아마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어떻게'에서 막히기 때문이다. 보라색이 왜 검정으로 변하는가? 오븐에 머리를 집어넣을 때 어떻게 숨을 쉬었는가? 

 실비아 플라스의 글과 그림을 볼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이 빈 공백을 자기 생각과 상상으로 채워선 안 된다는 것. 언어는 슬프면 슬픈 대로, 비어있으면 비어있는 대로 전달해야 할 그 자체의 역설을 극복하고 결코 말할 수조차 없는 것을 빈약의 비극을 극복해 가며 우리 앞에 드러나는 것이다. 문학은 그런 것이며, 이것은 실비아 플라스의 드로잉집 뿐만 아닌 문학과 언어 전체에 걸쳐 잊지 말아야 하는 것, 



시계가 쉬지 않아 부쩍 많이 쉬게 된다. 


너절하고 비루한 생각과 텅 빈 밥통의 나날.


그러나 그래도 다행은, 


아마도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 

현실과 실제에 뿌리내린 삶의 복된 이면과 윤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에 실린 편지글 발췌)


그러니 많이 기억하고 꺼내어 보자. 





*영어 인용은 책 밖에서 가져온 실비아 플라스의 시와 일기.

*한글 인용은 책 안에서 가져온 실비아 플라스의 글과 그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늘바람 2014-02-17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탐나는 책이네요 ㅅ

Jeanne_Hebuterne 2014-02-17 22:2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 하늘바람님. 퍼스나콘이 정말 화사하니 따뜻합니다 :)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은 나왔을 때 바로 샀는데 리뷰를 조금 늦게 올리게 되었답니다. 책 두께가 얇고 펜으로 그린 연습작품이 많아요. 타이핑한 시 원문, 습작 드로잉, 어머니와 테드 휴즈에게 쓴 편지. 이중에서도 습작이 가장 많아 쉬엄쉬엄 넘기기에 좋은 책인듯 합니다. 보노라면 실비아 플라스는 애정을 듬뿍 담아 테드 휴즈를 그리고(실제보다 미남으로 그렸어요), 일상의 사물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그리는 등 좀더 다른 시선을 원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해봅니다. 그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펜끝이 그리는 어떤 관찰과 노력이 엿보입니다. 이제 곧 봄, 퍼스나콘과도 같은 봄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