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서른네 살이다. 3년 전 결혼해 지난해에 딸을 낳았다. 세 살 많은 남편 정대현 씨, 딸 정지원 양과 서울 변두리의 한 대단지 아파트 24평형에 전세로 거주한다. 정대현 씨는 IT 계열의 중견 기업에 다니고, 김지영 씨는 작은 홍보대행사에 다니다 출산과 동시에 퇴사했다. 정대현 씨는 밤 12시가 다 되어 퇴근하고, 주말에도 하루 정도는 출근한다. 시댁은 부산이고, 친정 부모님은 식당을 운영하시기 때문에 김지영 씨가 딸의 육아를 전담한다. 정지원 양은 돌이 막 지난 여름부터 단지 내 1층 가정형 어린이집에 오전 시간 동안 다닌다.


 나와 비슷한 나이, 비슷한 지역에 사는 작가의 책을 읽는 것은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도 같다. 이때 소설은 작은 반사판이 되는 것 같다. 도시 생활자라는 별명이 붙은 정이현 무렵부터, 서울이나 대구, 부산, 혹은 다른 친숙한 지역 출신의 작가들이 조금씩, '지금, 여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 이전 작가들은 그러지 않았던 것일까? '그게 이상하게도, 그렇게 됩니다.'라는 어느 소설가의 말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정이현이 '삼풍백화점'을 통해 냉면을 먹고, 백화점에서 어떤 무늬 다이어리를 살까 고민하고, 정장 바지 코너에서 친구라기에는 낯선 그를 만나는 이야기를 그려낸 그 시점이 하나의 갈림길을 만든 때라고 생각한다. 대도시에서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나가고, 커피를 마시거나 쇼핑을 하는 여자의 이야기. 이상하게도 그 전에는 소설 속에서 조금은 보기 힘들었던 이야기들.



 1978년생, 사회학을 공부하고 PD수첩, 불만 제로 등의 작가로 10년간 일했다는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은 제목이 많은 정보를 준다. 82년생, 그러니까 지금 삼십 대 중반, 한국에 사는 여자. 1982년, 여아 낙태 통계 그래프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고 그 이후 99년, 워렌 버핏은 금융위기를 맞은 한국을 돌아본 다음 경구피임약 회사의 주식을 사들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국은 여성인권이 낮았다가 당시 그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으며, 90년대 후반부터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남성과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낮은 혼인율과 출산율. 이것이 그가 예상한 대한민국의 미래였다. 
 결코 원금을 잃지 않는다는 이 주식 전문가의 의견과 맞물리는 82년생 김지영 씨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쉬워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쉽다는 것은 어떤 일이 행해지는 데 그다지 많은 수고나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고,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이야기의 속도감이 상당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나는 외려 이 '쉬움'이 나로 인한 것임을 안다. 한 치의 틈이 없이, 내가 잠시 82년생 김지영이었으므로. 그래서 나와 이 글의 간극이 긴밀하여 마음이 급해질까봐, 그 점이 저어된다.



"원래 애 낳고 나면 마디마디가 다 약해져. 모유 먹이면 약도 편하게 못 쓰는데. 물리치료 받으러 올 수는 있어?"
 김지영 씨는 고개를 저었다.
 "손목 많이 쓰지 말고 잘 쉬어. 어쩔 수 없지 뭐."
 "애 보고 빨래하고, 청소하고.......손목을 안 쓸 수가 없어요."
 김지영 씨가 푸념하듯 낮게 밀히지 할아버지 의사는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쭈그려서 쓸고 닦고 다 했어. 이제 빨래는 세탁기가 다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다 하지 않나?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더러운 옷들이 스스로 세탁기에 걸어 들어가 물과 세제를 뒤집어쓰고, 세탁이 끝나면 다시 걸어 나와 건조대에 올라가지는 않아요. 청소기가 물걸레 들고 다니면서 닦고 빨고 널지도 않고요. 저 의사는 세탁기, 청소기를 써 보기는 한 걸까.
 의사는 모니터에 뜬 김지영 씨의 이전 치료 기록들을 훑어본 후, 모유 수유를 해도 괜찮은 약들로 처방하겠다고 말하며 마우스를 몇 번 클릭했다. 예전에는 일일이 환자 서류 찾아서 손으로 기록하고 처방전 쓰고 그랬는데, 요즘 의사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손으로 모심고 낫으로 벼 베고 그랬는데, 요즘 농부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라고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김지영 씨가 하는 대가 없는 노동, 까닭 없는 힘듬이 과연 대가를 측정할 수 없고 까닭이 없이 일어나는 일일까? 왜 김지영 씨의 말이 새롭게 들리고, 할아버지 의사의 말은 너무 많이 들어 당연한 것이 되었을까? 왜 그는 언어에 대한, 단어에 대한 선택조차 제대로 하기 힘든 것인가?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왜 여성은 자기 몸에 대한 주도권을 가질 수 없을까? 왜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을 조심스러워 해야 할까? 아무도 차별받지 않는다지만 그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와 누구의 귀로 들어가는 것일까? 많은 틀린 일을 하는 이들은 자기 행동에 그 어떤 반성도 자각도 없건만 왜 페미니스트들은 자기검열을 거쳐야 하며 다른 모든 방면에서 조심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아직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이야기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객체로서, 'her'로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여자이며, 화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책과 어떤 음악은 지독한 여성혐오자가 남긴 것일 때도 있다. 나는 짧은 드레스를 입는 것을 즐기고, 하이힐도 좋아한다. 그 하이힐이 내 엉덩이를 치켜올려주고, 남자들로부터 시선을 받는 것을 즐긴다는 것과는 다른 뜻이다. 왜 내가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서는 것이 남자들의 시선을 의식해서라고 재단하는 것일까?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없는 것은 그 물건이 무거워서이지, 내가 남자처럼 힘을 길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유와 당위를 헛갈리는 것은 어리석은데, 왜 김지영 씨는, 김지영 씨의 주변 사람들은 이 덫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을까? 




 "남자애들은 쉬는 시간 10분 동안도 가만히 안 있잖아. 축구든, 농구든, 야구든, 하다못해 말뚝박기라도 한다고. 그런 애들한테 어떻게 와이셔츠 목까지 닫아 입고 구두 신고 다니라고 하겠어?"

 "여자애들이라고 싫어서 안하는줄 아세요? 치마에 스타킹에 구두까지 신겨 놓으니까 불편해서 못하는 거라고요. 저도 국민학교 때는 쉬는 시간마다 말뚝박기하고 사방치기 하고 고무줄놀이 하고 그랬어요."



 그 그물망이 너무나도 촘촘하고 엄밀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이것이 전 사회의 암묵적인 동조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지금이 아무리 여자가 대학을 가고, 판사도 하고, 이전과는 다름을 강조하여도 그것은 전과의 다름이지 남자와 같은 자유를 누린다는 뜻은 아니다. 씨네 21의 이다해 기자가 말하였듯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라는 질문에는 '그럼 당신은 남자와 여자,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까?'라고 되받아치는 것이 적절하다. 적절한데, 문제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감히 '나치'라는 단어를 붙인 '페미나치'라는 조어를 만드는 시대에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모욕을 모욕이라 말하기 힘들 때가 있고, 내가 느꼈던 이상한 감정을 상대에게 설명하여야만 할 때도 있다. 내가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해서 누군가가 내 자동차를 들이박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왜, 유독 여성 범죄에 관해서, 여성이라는 특질에 대해서는 원인과 당위가 뒤바뀌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조남주의 소설은 조용하다. 지나치게 앞서나가거나 뒷걸음질 치는 법 없이 김지영 씨의 시간을 연도별로 훑는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통계자료나 당시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그 자료는 김지영 씨의 이야기에 간결한 힘을 싣는다. 

 이것은 일어나지 않았던 일, 허구가 아니라 지하철 어느 역에서 네 옆자리에 앉았던 어떤 여자의 이야기라고, 집회에 나가 함께 촛불을 들고, 무엇이 떳떳하고 옳은 일인지,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무엇보다도 너와 다를 것이 없는 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어쩌면 좀 과할 수도 있는 소설 끝 진료 부분에 이르러서는, 좀 과장됐어. 그런데, 그게 그렇게 과장된 것도 아니고 다시 보면 실제 있는 일이잖아? 하는 자조적인 헛웃음이 나온다. 길가며 무심결에 바라본 누군가의 모습이 사실은 거울에 비친 나였음을 자각하는 순간 나오는 표정과 같은 색깔의 웃음. 나는 이 헛웃음이 아무 성과 없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거리를 유지하기 힘들었던 책.



 *따옴표 글은 모두 책속 인용

 




댓글(7)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개 2016-12-12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냥이와 잘지내시죠?

Jeanne_Hebuterne 2016-12-28 0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개님!
삼남매 모두 잘 있습니다! 요즘은 사료 고민이 많아요ㅠㅠ 제가 먹이는 사료가 괜찮을까 싶어서 조리식을 시도중인데 이게 삼남매가 먹어야 먹일 수 있으니까요...홀리스틱 급 캔푸드를 주문했는데 이곳도 얘들이 잘 먹을까 조바심중입니다. 냥이들 소식 전해주셔요^^

2017-01-03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5 0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8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0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2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