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신화 - 클래식 음악의 종말과 권력을 추구한 위대한 지휘자들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김재용 옮김 / 펜타그램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휘자의 눈은 오케스트라 전체를 응시한다. 모든 연주자는 지휘자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고 느끼고, 여기에 더해 자신의 소리를 듣는다고 느낀다.  ... 지휘자는 연주자 개개인의 마음 속에 있다. 그는 연주자들 각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모든 면에서 살아 있는 법의 화신이다. 그의 손은 명령하고 금지한다. ... 연주가 진행되고 있을 때에는 작품 외에 아무 것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연주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만큼은 지휘자가 세계의 지배자가 된다.-책 속에서, 엘리아스 카네티. 





 연주하지 않고 작곡하지 않으면서 창조에 버금가는 행위를 하는 느낌을 주는 존재. 전제를 통제하고 확장하면서 소리를 만들어 가는 존재. 뭔가를 만든다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존재. 노먼 레브레히트의 거장 신화는 이러한 '지휘자'라는 이야기를 하는 책이다. 읽노라면 황색의 전통을 바탕으로 검은색을 덧칠하려 애썼다는 느낌이다. 





 오래된 이야기. 그러나 오래지 않은 이야기. 
 이것은 앞으로 올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이야기. 
 사건, 상황, 말, 그리고 소리. 노먼 레브레히트는 데일리 텔레그라프, 이브닝 스탠다드, BBC RADIO 3 등을 거친 음악 평론가이자 소설가. 날카로운 귀와 황색 언론의 뒷말이 어우러진 그의 '거장 신화'를 읽노라면 흡사 주방의 뒷이야기를 다룬 앤서니 보뎅의 '키친 컨피덴셜'을 읽는 듯한 느낌이다. 고전 음악을 듣는 이라면 솔깃, 고전 음악을 듣지 않는 이라면 흘깃, 넘길 수 있는 이야기들. 최초의 지휘자 한스 폰 뵐로가 지휘하다 발등 찍어 괴사로 사망하게 된 이야기부터 나치에 어중간하게 협력하느라 애먹은 푸르트벵글러, 음반 시대의 황제 카라얀을 거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클라이버와 텐슈테트, 현재 베를린 필을 지휘하는 사이먼 래틀까지를 아우른다. 그 사이에는 오로지 자신들만의 이익을 생각하며 그 자체로 움직이는 빈 필하모닉, 아직도 험난한 길을 가는 여성, 흑인 지휘자 이야기가 조금씩 스민다. 그리고는 마침내 지휘의 종말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 도톰한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잔무늬와 큰 물결이 어우러져 어떤 존재를 조망하지만, 명암을 적절히 덧붙여 지루하지 않은 책.




 과장과 축약, 비약과 해명을 듣노라면 그것은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소리의 이미지,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려울 것이라는 추측, 모른다는 편견, 관심 없다는 단정을 벗어나 요즈음 지켜보기 힘든 시간의 흐름을 떠올린다. 오랜 시간 한자리에 앉아 4악장에 이르는 교향곡을 듣는 이들이 줄어든다. 한 장에 이만 원 가량 하는 음반은 이제 박스반으로 바뀌어 장당 몇천 원의 가격에 구할 수 있다. 복각과 리마스터링을 거친 음반 속에는 그러나 몇 년도인지 어디에서, 누가, 누구와 함께했는지 하는 정보가 빼곡하다.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호오의 감정에 그칠 것이니 그만큼 위험한 것이 어디에 있나. 이 책은 그 중에서도 '누가' 했는지에 관한 물음에 답하는 길고 긴 해명 글이다. 그들은 누구이길래 악단의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사이먼 래틀이 지금처럼 유명해진 것은 유명하지 않은 악단에서 최고의 연주를 뽑아냈기 때문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종종 지휘자를 앞에 세워두기만 할 뿐, 자신들 마음대로 연주할 때도 있다. 어떤 이들은 불굴의 논리를 꺾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소리를 매끄럽게 완화한다. 그것은 청중이 사랑하는 소리일 때도 있고, 음반사가 좋아하는 소리일 때도 있다. 노먼 레브레히트가 말하듯 지휘자는 요청을 수락하고, 조건을 받아들이고, 컨디션을 조절한다. 이것은 홀로 만든 것일까, 누군가가 애써 만든 것일까?





 막상 포디움에 섰을 때에는 자신의 작품을 훌륭하게 지휘하지는 못했던 베토벤, 최초의 지휘자 한스 폰 뵐로, 무력에 맞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를 넘는 것에 맞선 토스카니니, 누구보다도 따뜻한 모차르트를 들려주지만 인간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브루노 발터, 나치 행사에서도 연주했지만 유대인 단원들을 구하려는 헛된 노력을 했던 푸르트벵글러, 제왕이 되고 싶었던 카라얀, 'DO YOUR WORST'라고 말하며 오케스트라와 가까워졌던 토머스 비첨, 그 자체로 뉴욕이었던 번스타인. 이들이 만드는 것은 음악이지만 음악은 종종 그 자신만으로 어떤 길을 가는 것은 아니라고 노먼 레브레히트는 평범하고 무난한 어조로 말한다. 거장의 목록은 책 뒤의 색인으로 충분하다. 대신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휘의 속성을 파고들어 지휘자로 은유할 수 있는 사회, 정치, 경제, 문화의 지렛대이다. 그리고 저자 자신이 밝히듯 그 지렛대를 이야기하는 목소리에는 일체의 아첨도, 완곡한 미사여구도, 맹목적인 신격화도 없다. 이를테면 이러한 대목처럼.




로제 문하 중에서 고아가 된 어느 여성 바이올리니스트가 뮌헨의 리허설에 참가하려고 했지만 발터는 말러 친구들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이 여성의 참가를 거절하였다. 발터는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여 유명인에게는 특권을 주었지만, 오만하게도 젊은 음악가나 고생하고 있는 작곡가의 어려운 상황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발터와는 대조적으로 말러는 재능 있는 젊은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했고,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가족이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기도 다. 쇤베르크는 "발터는 훌륭한 지휘자다." 라고 인정했다. 그는 오랫동안 공표되지 않았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하지만 사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는 항상 역겨운 돼지처럼 탐욕스러운 사이었다.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난다." 많은 풍자화에서 발터를 이렇게 돼지에 비유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발터의 예술에 감탄했던 동료들도 그의 성격은 경멸했다. 발터가 친구라고 주장했떤 토스카니니조차도 그를 '감상적인 바보'라고 불렀다. 



 발터는 아름답게 지휘했다. 서정적이고 우아하게 모든 선율적인 요소를 강조했고, 전주곡에서는 중세적 분위기를 확립하였다. 4주 뒤 나는 클렘페러가 이 작품을 쾰른에서 공연하는 것을 들었다. 전주곡의 처음 여덟 마디부터 완전히 달랐다. 클렘페러의 지휘는 매우 엄격했고, 개인적인 억양은 완전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클렘페러의 연주에서는 발터가 이 작품에 불어넣었던 서정적인 표현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마치 이 곡이 조스캔 데프레가 작곡한 곡인 것처럼 연주했다. 발터와 클렘페러의 두 연주는 모두 놀라웠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지휘자가 음악의 사운드와 타일에서 엄청난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베르톨트 골드슈미트






 이 두 상반되는 단락은 훌륭한 지휘자가 반드시 훌륭한 인간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카라얀과 번스타인은 어떤가? 음반사가 좋아하는 매끄러지는 듯한 사운드를 보여주기 직전의 카라얀의 60년대 베를린 필과의 녹음을 들어보면, 카라얀과 오케스트라가 역동적으로 만들어내는 의욕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함께 협력해서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공동의 느낌, 함께 쌓아올린 노련하고도 세련된 느낌. 그 뒤의 약간의 거리감이 점점 더 벌어지기 전까지도 카라얀은 분명 브루노 발터가 보여준 가짜 페르소나를 구축한 것이라고 노먼 레브레히트는 지적한다. 인공적으로 만든 이 느낌은 음악 세계가 진짜와 허상으로 나뉘어 있으나 그 둘이 꼭 일치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또는 카라얀이 떠난 다음 베를린 필하모닉이 그들의 다음 지휘자로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선출한 것을 보노라면, 오케스트라는 자신의 취향과 상황을 무기로 외부에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카라얀의 이전은 푸르트벵글러였고 이후는 아바도였다. 푸르트벵글러와 아바도는 묘하게 닮았음을 노먼 레브레히트는 지적한다. 아바도는 자신의 기호를 내보이지도 않았고 개인의 권리를 존중했다. 한마디로 카라얀과 정반대였으며, 베를린 필하모닉의 차기 지휘자 선출에 가장 놀란 사람은 아바도 자신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예상 밖의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카라얀 사운드가 어떤 것이었던가. 공격성, 균일함, 매끄럽고 고장 없는 독일 자동차 같은 이미지의 카라얀 사운드는 마지막까지 그의 리허설이나 녹음의 세부적인 사항을 관찰한 리카르도 샤이가 남긴 말을 통해 전해진다.




 오케스트라의 음질을 매일같이 탐구하는 그의 모습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상임 지휘자로 30년 가까이 있은 뒤에도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학생처럼 취급하였고, 어떤 구체적인 효과를 성취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다. 그는 오케스트라가 자신들의 고유한 소리를 내는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날 그 날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수정해 가면서 자신이 원했던 효과를 향해 사운드를 조정하고 구체화했다. 그는 왼손의 중지로 허공을 어루만져 부드러, 즉 비단 벨벳의 질감을 얻어 내었다. 그 순간 바로 그만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베토벤의 교향곡 전집을 네 번째로 녹음하던 때 그는 세계 각지에서 이 곡들을 연주한 뒤였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고 활기에 찬 연주를 위해 한 소절 한 절씩 연습시켰다.



 

 이 책의 전반을 덮는 것은 이러한 음악사에 남은 인물들의 평가와 비평, 남겼던 말, 작은 글귀 한 조각들이다. 동료 음악가의 전언이 남겨 줄리니는 성인이 되고 토스카니니는 폭군이 된다. 카라얀은 독재자가 되고 발터는 이중인격이 된다. 그러나 그 큰 흐름에 있어 지휘자가 남기고자 했던 개성 있는 음향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증언하는 날카롭고 예민한 귀가 들려주는 소리는 이 책의 장점이다. 

 음악은 모든 것과 동떨어져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아니다. 지휘자의 출현이 교향악과 맞물렸지만, 그 에움길은 정치, 사회와 떨어져서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 중에는 예외도 있고 필연도 있다. 매끄러운 도치치 사운드를 원하던 나치의 꼬리표를 떼어내려 안간힘을 쓴 카라얀, 쉬운 언어와 화려한 감상을 원하던 뉴욕이 사랑한 번스타인의 오케스트라를 들어보면 시대가 사랑하는 지휘자의 특성이 대표하는 그 시간이 느껴진다. 




 노먼 레브레히트는 이 책을 통해 번스타인은 교향곡을 연주회장에서 지휘하며 익혔고, 해석이 화려하면서도 피상적이었다고 평가한다. 뉴욕타임스의 해럴드 숀버그는 번스타인이 피아노를 치며 지휘할 때 그의 테크닉을 반복해서 비난했고 전통적인 고정 관객은 그가 무대 위에서 펄쩍 뛰는 모습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는 매력적이고 능변이면서도 부유했고, 모범적인 가정을 꾸렸다. 한마디로 그는 미국이 원하던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기술적인 결함을 보완해 가면서 숀버그조차도 '자신의 천성적인 화려함을 잃지 않고도 색채는 물론이고 악구 내에서의 자유는 물론 구조적인 완성도도 갖추고 있다'라고 평가를 바꾸었다고 한다. 그는 말러의 분열된 모습, 어떤 특징도 찾을 수 있고 모든 해석이 가능하며 정반대의 특징도 똑같이 나타난다고 평했는데, 이는 번스타인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지휘는 작은 새 같아서 꼭 쥐면 날아가 버린다는 콜린 데이비스의 말이 사실일 것이다. 꼭 쥐지 않고 자신 그대로 행하는 것이 지휘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대로'라는 것은 그 홀로 존재하기 힘든 것인지도.





노먼 레브레히트는 지휘자의 탄생에서 죽음까지를 짚는다. 지휘가 왜 필요했는지, 어떻게 그 많은 지휘자가 나타났다가 오디오 시대를 형체를 달리하는지, 나치, 뉴욕, 영국 지휘자의 오랜 공백, 다른 세계에서 온 지휘자들을 거쳐 음반 업계의 구조, 지휘자들 연봉과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살림을 꾸려나가는지 까지를 짚는다. 그 뒤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로널드 윌포드와 성장을 억지로 멈추게 된 젊은 지휘자들의 모습도 있다. 줄어든 공급, 높아진 요구 등을 거쳐 노먼 레브레히는 카라얀과 번스타인 이후 지휘자 자신의 이름만으로 5천 장의 음반을 팔거나 티켓을 매진시키는 지휘자는 없음을 이야기한다. 물론 이 책을 썼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어떠한가.




1990년대 말 지휘자들의 이러한 정체성 위기는 리허설 룸에서 녹음 스튜디오까지, 버스턴에서 베를린까지 클래식 공연의 모든 영역을 휩쓸었다. 연주회장은 저반도 차지 않았고, 새로운 음반도 얼마 팔리지 않았고, 정부는 보조금을 삭감했고, 클래식이라는 좋은 음악에 대한 애정은 속물적이고 시대착오적이고 현실과 유리된 것이라며 폄하 당했다. 미국의 한 텔레비전 프로듀서가 호의를 갖고 어느 유명 지휘자를 한산한 시청 시간대에 출연시키려고 하자 방송국 사장은 전화기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 "그따위 놈을 내 방송에 나오게 할 수는 없어! 시청자들은 그런 프로그램 따위는 보지도 않는다고." 그 어떤 미디어의 거물도 토스카니니에 대해서 감히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 지휘계의 위기와 클래식 음악의 쇠퇴 사이의 연관성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20년 전 한스 폰 뷜로와 아르투르 니키슈가 해의 독립을 주장했던 이래, 지휘자는 조직화된 음악 활동의 가시적 상징으로 군림해 왔다. 가시성은 실무적이고 윤리적인 리더십의 책임을 반한다. 미국의 지휘자 건서 슐러는 자신의 풍부한 사상을 담은 책 '완벽한 지휘자'에서 지휘자의 이러한 책임을 '미학적 도덕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즈음이면 책의 앞부분에서 언급한 베르톨트 브레히트 희곡의 한 단락이 다시 떠오른다. 

 영웅이 없는 삶은 불행하다는 대사에 이은 한 단락. "아닙니다. 영웅이 필요한 곳이야말로 불행한 곳이지요."




 이 책은 1991년의 저작이며, 끝에는 한 단락이 더 있다. 그 마지막 단락의 마지막, 마지막의 마지막 말은 솔티의 작별 인사이다. "클래식 음악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지휘자의 출현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를 평범한 언어로 이야기한 야심과 노력의 연대기. 때로는 권력을 위한 개인 욕심의 남용이기도 하고 때로는 미학적 결단이기도 하여 음악에 부쳐 따로 생각해볼 만한 부분. 이 책은 고전 음악을 이해하는 절대 좌표가 될 수도 없고 판단의 근거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을 듣는 행위에 있어 지도는 될 수 없을지언정 작은 쉼표는 될 수 있음이 분명하다. 음악은 저 홀로 있을 수도 있지만, 외따로 떨어져 천상에만 울려 퍼지는 것은 아니니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09-27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