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1465





 인간이 왜 동물을 학대하는가에 관한 정보는 모든 폭력을 종결시키기 위한 전략의 필수 요소이다(Arluke and Luke, 1997). 아시온(Ascione, 1993)은 동물을 향한 폭력이 인간폭력과 맺는 관계를 우리가 더 많이 이해할수록, 폭력의 예방 및 대처를 위해 기울이는 노력의 효과도 그만큼 더 커진다고 주장한다. 솔롯(Solot, 1997)의 말대로 "모든 생명이 존업과 존중의 대우를 받는, 폭력없는 사회를 추구하는 작업이 성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하여 더 잘 이해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다."

 ...솔롯은 이야기한다.

 모든 유형의 폭력 간에 연계성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각각의 폭력이 갖는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자신의 아이를 때리는 여성, 여자친구를 강간하는 10대 소년, 고양이를 불태워 죽이는 청소년 등 이들 모두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그들이 '다른 생명other living beings'을 대상으로 끔찍한 폭력을 저질렀기 때문이지, 그들이 언젠가 더 나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책 속에서


 온도차가 극명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다듬으려 해도, 어쩌면 내가 사는 세상과 네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다른지 알 길이 없다. 오늘은 도저히 조용하고 차분하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이었다.

 띄엄띄엄 지나치는 그곳의 소식에, 친구 한 명이 링크를 보내주었다. 청원 링크였는데 새삼 동물학대가 어제오늘의 일인지, 오늘과 내일이 또 같지 않을지, 회의적이었는데 친구가 덧붙였다. 

 '우리는 너무 급해. 너무 급해서..혹시 했다면 괜찮은데 안했다면 좀 해줘.'



  급했구나, 안했다면 해야 하는 거로구나, 이 생각 대신 많이 부끄러웠다. 

 내가 사는 동네는 길고양이들이 낮에도 가끔 어슬렁 길을 걷는 동네다. 산책다니는 고양이들도 있어서 자기 집에서 밥먹고 나한테 배고프다고 엉겨서 깜찍하게도 두번째 야참을 챙겨먹고 다녔던 고양이들도 있었다. 나는 내 집 뒷마당에서 매일저녁 카오스 자매와 까망이, 털복숭이 고양이에게 캔따개 노릇을 한다. 그것도 아주 기쁘게. 

 대형견들이 입마개를 굳이 하고 다니지 않아도 이곳에서는 무서워본 적이 없다. 견주 친구에게 물어보았더니 '내 개가 사람을 만약에 물었다...그래서 그 사람이 다쳤다..만에 하나 지병이라도 있어서 병이 심해지거나 아..생각하기도 끔찍하다. 내 개가 행동 잘못 하면 내 인생까지 종쳐. 내가 돈 많고 시간 많아서 훈련 받으러 다니고 늘 신경쓰는게 아니야. 당연히 해야하니까 하는거야.' 라는 답이 돌아온다. 물론 우리집 옆옆집 다리 세 개 달린 요크셔 테리어 맥스는 나만 보면 사생결단을 내겠다는듯 잡아먹겠다고 달려드는데 마침 오늘 주인과 함께 있는 맥스를 보고 깨달았다. 천사견이었구나. 

 강아지 공장과 고양이 공장이 없는 곳. 펫숍에서 개와 고양이를 파는 것이 올해부터 법으로 금지된 곳. 이런 곳에서 나는 내 고양이를 잃어버린 적이 있다. 전적으로 내 불찰이었는데 하루동안 고양이만 찾으러 돌아다닌 끝에 고양이가 스스로 내게 돌아와주었다. 그 일을 말하자 친구가 말한다.

 '만약 여기서 잃어버렸는데 못찾았으면 .... 건강원에 갔겠지. 고양이가 관절에 좋다고 잡아먹는단다.'



 너무 많은 일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한국에서 고양이를 입양하려던 친구는 그들이 달라는 입양신청서를 내고, 근무지와 직위, 연봉도 적어내고 기다렸다 한다. 그들이 하라는 대로 미리 방묘문과 방묘창도 설치해두고, 가정방문을 기다렸다고. 유력하니 조금만 기다려달라 해서 용품도 사두고 기다렸는데 한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서 수소문해보았더니 처음부터 본인은 미혼에 남자라서 아예 제껴두고, 다른 가정에 입양을 갔단다. 너무 화가 나서 그냥 고양이 펫샵에서 살거야. 라는 말에 다른 이가 만류했다. 너 그게 어떤건지 알잖아. 

 


 미혼에 남자라서 제꼈다는 그 입양담당자의 마음도, 화가 난 친구의 마음도, 둘 다 뭐라 말할 것이 못된다. 멀쩡히 잘 있는 고양이를 아스팔트 바닥에 패대기쳐서 일부러 죽이는 사람들이 있고 고양이 발톱에 매니큐어 칠해서 투견 훈련용으로 쓰고 꼬리 털가죽을 벗겨 지지는 사람들이 어디엔가 버젓이 다닌다. 어느 구름 뒤에 해가 있고 어느 구름 뒤에 폭풍이 올지 도저히 겉을 보아서는 알 수가 없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가 너무나도 선한 천사들의 동네라고 생각지도, 내가 떠나온 동네가 악의 구렁텅이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파렴치와 몰상식은 어디에나 있고 선한 마음은 징벌 제도와 상관이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아직도 개를 잡아먹는다는 것은 부끄럽다. 이것은 입장의 차이다. 완전한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도살장을 보고나니 생각이 싹 가셨다. 식물도 죽을 때 비명을 지른다는데, 그것은 어찌 먹느냐고 말한다면 '저를 아세요?'라고 말하고 싶어지겠지. 

 나는 단지, '불법적이고 임박한(unlawful and imminent)' 법익의 침해가 존재해도 항변할 수 없는 생명이었던 자두라는 고양이가 패대기쳐지는걸 몇 번이고 보면서 자두 뒤에 보이지도 않는 개와 고양이가 셀 수 없이 많았겠구나, 싶었다. 

 박찬욱의 말을 떠올린다.

 여러분, 희망을 버려요. 그리고 힘냅시다. 



 

 잔인한 덧붙임

 동물과 일하는 사람들은 비밀이 많을 수도 있다. 동물들은 말을 못하니까.

 미국의 어느 주법에는 소와 섹스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 주가 있다던데, 난 차라리 그 법이 한국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엔 무려 수간협회까지 있다. 경찰에게 신고해도 경찰이 제대로 출동하지도 않던.

 


 이 고양이는 우리집에 밥먹으러 오는 털복숭이. 

 이 아이가 한국에 있었어도 이렇게 때깔 곱게 자유롭게 살 수 있었을까. 그랬으면 진심으로 좋겠다. 

 나처럼 눈치보지 않고 밥주고 싶으면 밥주고, 만지고 싶으면 냥이 허락받고 만지고. 

 




다행히도 청원이 숫자를 넘어섰다.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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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 줄리언 반스의 부엌 사색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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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hrist Mother Mary and Joseph!


우리, 그러니까 조이스와 나는 간단히 뭔가를 만들어 먹고 전시를 보러 가기로 했다. 이것저것 준비하길래 도와줄 것이 없냐고 물은 게 화근이었다. Can you do these onions? 양파 손질 좀 해줄 수 있어? 라길래 뭔지도 모르고 양파를 썰었다. 나는 사과를 깎을 때 감자 껍질 벗기는 칼이 필요한 사람이어서, 하필이면 그날 아침 호박과 새우, 양파를 넣은 된장찌개를 먹은 날이어서.
 내 머릿속에 있는 된장찌개 속의 양파 모양으로 양파 하나를 손질했다. 이윽고 조리대를 본 조이스가 한 말이었고 난 잠깐 이 인간과 절교할까 망설였다. 햄버거를 만들 거란 걸 나한테 말도 안해줬는데 내가 궁예도 아니고 어찌 알았겠는가. 된장찌개 속 양파도 잘 넣으면 되지, 넌 그럼 양파 없이 먹든가! 속 좁고 뒤끝 있고 기억력 좋은 데다 양파 앞에서 망연자실해 본 이가 나 혼자만은 아니란 걸 줄리언 반스의 책은 까칠하게 이야기한다.




 양파와 관련해서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용어로는 slice와 chop이 있는데, 이 단어들은 논리상 서로 다른 방식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slice는 절반으로 자른 양파를 다시 가로로 얇게 자른다는 말이다. 그러면 반원형 양파가 어수선하게 흩어진다. chop은 절반으로 자른 양파를 세로로, 즉 꼭지에서 뿌리쪽으로 여러 겹 흩어지지 않게 벤 다음 가로로 자른다는 말이다. 그러면 잘게 잘린 양파가 수북이 쌓인다. slice는 finely로, chop은 finely와 roughly로 수식할 수 있다. 따라서 '썰다'라는 말은 다섯 갈래로 나뉘는데, 어느 쪽을 택할까 고민하느라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지 못한다. 물론 거꾸로 생각해서 이런 합리적인 자문을 해볼 수 있다. 즉 "내가 식탁에 음식을 받아놓고 '이 음식은 양파를 다르게 잘랐으면 좋았을 텐데'또는 '그랬어야만 하는데'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던가?"라고 물으면 물론 대답은, "그런 적은 한 번도 없다"이다. 그러나 부엌의 현학자가 내리는 결론은, 양파 자르기가 실패할 수 없는 작업이라기보다는 레시피를 열심히 잘 따랐기에 결과가 좋았으리라는 것이다. 


 

 양파 손질은 채썰기인가 다지기인가 세로 썰기인가 어슷썰기, 깍둑썰기, 혹은.... 이런 생각이 들게 하다가 결국, 책에 나온 조리법을 읽고 그대로 순서대로 따르되 단어 하나하나를 까칠하게 짚고 넘어가는 사람, 바로 줄리언 반스다. 
 1946년생, 영국 중부, 옥스퍼드 대학, 사전 증보판 편찬, 평론가, 작가, 메디치상, 구텐베르크상, 페미나상, 세 번의 슈발리에 훈장, 이외 다수 수상, 그러나 내게는 언제나 '팻에게'라는 헌사와 함께 책을 내는 작가. 이번 책은 '그가 요리를 해주는 그녀에게'라는 헌사가 있다. 책의 첫 번째 속지에는 2003이라는 숫자가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의 아내이자 영국의 전설적인 문학 에이전트, 팻 카바나가 뇌종양으로 쓰러져 숨진 시기는 2008년. 그러니 이 책 출판 당시 줄리언 반스는 주방에서 팻 카바나를 위해 요리하고 팻이 초대한 작가들과 식탁에 앉았을 것이다. 
 그 후 그는 모든 인터뷰를 거절하고 'Levels of Love'를 출간했으니, 시간은 이렇게 사무치고 과거는 이렇게 다르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그곳에서 우리는 모두 다르게 행동한다. 




 그 과거의 주방에서 줄리언 반스는 한 사람의 pedant가 된다. 이 책에서는 현학자라고 불리지만 실제 의미도 다르거니와 부엌에서 움직이는 반스의 느낌도 현학자라기보다는.....요리책 사진과 단어 하나하나에 편집자처럼 집착하면서도 좀 그대로 따라 해 보려고 노력하는 깐깐한 조리사에 가깝다. 이 단어에 대한 역자 주도 책 안에 있고, 조리법도 간혹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번역도 간간이 보인다. 마음에 걸리지 않는 부분이 전혀 없는 역작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손이 가고,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고, '맞아, 나도 이랬어'라고 생각하게 된다. 
주방에서 요리책을 들추어보는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하되 여전히 까칠하게 1, 2, 4 항으로 구성된 요리책을 보면 '내 요점은 출판사의 실수로 3번이 누락된 게 아니냐는 거고, 그렇다면 그 누락된 내용이 뭐냐는 거에요. 3번이 4번으로 잘못 인쇄된 건지도 모르지만요.'라고 저자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보는 깐깐함을 보인다. 즉, 줄리언 반스의 글에는 요리하는 사람들이 많이들 겪는 상황이 보편적으로 녹아있다. 




바질 페스토를 만들기 위해 말린 바질을 쓰는 경우(조리법 오독), 어쩐지 요리책에 사진이 실린 요리부터 해 보고 싶어 하는 경우(나는 제이미 올리버가 아니다), 어쩐지 자애로운 안주인이 여전히 어디선가 린넨 수건을 표백하고 집안을 어루만질 것 같은 환상(비턴 여사의 살림 교본), 감정이 부엌을 압도하는 경우(줄리언 반스가 요리하는 동안 팻에게 연정을 드러내는 제독의 목소리가 들려버렸다), 'fresh'란 낱말이 들어간 재료가 더 좋을 것 같은 착각(프레쉬 파스타와 슈퍼마켓에 파는 건면 파스타가 용도에 따라 다를 뿐, 어느 한쪽이 낫다는 게 아니다)......이런 환상, 착각, 경우의 수, 오독의 바다를 지나 독자가 마주치는 저녁 식탁의 한 장면.



...그리고 언제든 포미안의 암시대로 애피타이저나 디저트, 또는 둘 다 케이터링 서비스나 제과점에서 쓰면 된다. 프랑스에서는 그런 걸 예사로 여긴다. 이제는 영국에서도 다양한 애피타이저와 그럴듯한 과일 타르트를 사는 게 비교적 용이하므로, 그렇게 안 할 이유가 없다. 이 문제를 이렇게도 논할 수 있다. 손님들이 오기 직전까지 노예처럼 일해서 지친 주인, 그리고 지극히 분별있는 지름길을 택하고 생기 넘치는 주인. 당신이라면 그중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물론 그러려면 우리는 잔존하는 청교도 정신을 극복해야 한다. 상점에서 산 것을 우리가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속임수라는 생각을 억제해야 한다. 한편 그걸 우리가 만든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그건 그저 속임수일 뿐이다.


 
 이쯤 되면 인용과 샘플링의 차이가 주방에서 크로스오버하는 상황이 떠오르는데, 언젠가 생업으로 타르트를 만들던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케이터링 주문을 받았는데, 너무 예쁘게 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고. 열 명 분량의 디저트로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제철 과일로 적당히 못생기되 성의 있어 보이는 타르트를 주문하는 마음이 바로 저런 것이리라. 샘플링과 인용을 살짝 접어 나빌레라....줄리언 반스도 그러했다. 그는 직접 애피타이저, 디저트를 만들고 메인 요리는 델리에서 포리치니 라자냐를 본인의 집 식기를 가져다주고 당일 그 식기에 받아온다. 요리사의 스트레스 없는 좋은 저녁을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첫 번째 코스를 두고 뭐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좀 분하다). 디저트도 마찬가지였다(괘씸한 것들). 그러나 라자냐를 말할 때는 모두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이 라자냐 맛이 기가 막힌데!"
 "다행이군." 내 대답에 흔들림은 없었다. 그것으로 무사히 넘어간 듯했다. 




 그러고는 초대로 왔던 한 손님이 그에게 조리법을 묻고는, '실제 해보았는데 자네가 만든 것보다 훨씬 맛이 없더군'이라고 소식을 전한다. 우리 인생의 엑스 팩터는 이런 게 아닐까. 실상과 다른 요리, 디너 파티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저녁 초대, 요리책들이 보여주는 환상, 레스토랑은 집이 될 수 없다는 사실 같은 것.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오늘도 맛집을 찾겠지만, 우리 중 일부는 요리책을 '판타지' 장르로 분류하지 않고 '라이프, 리빙' 장르라고 생각하며 영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 도움을 받기 위해서 뒤적이고, 장을 보고, 주방의 조리대 앞에 설 것이다. 
 그리고는 요리책의 사진과 내가 만든 요리가 런웨이 모델이 입은 옷과 내가 입은 옷 태 만큼이나 다르다 해도 또 요리책을 뒤적일 것이다. 살다보면 자기만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몇가지 요리법 정도는 숙지하고 있는 것, 그리고 주방이 열악하다 해도(난 내 오븐이 마음에 안 들어서 내다버리고 싶다) 그 또한 아래 같은 마음으로 대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줄리언 반스의 'hand to mouth'. 





꿈이란 원래 다 그렇다. 나는 아마 코르뉘 가스레인지는 커녕 내게 확실히 필요한 보조 오븐도 갖지 못할 것이다. 그가 요리를 해주는 그녀 역시 가끔 열망하는 장작 오븐을 갖지 못할 것이다. 부엌에서는 또 무언가 소소한 문제가 계속 생길 것이다. 싱크대 배수구가 막히고, 그 아주 기발한 듯해도 바보 같은 구석 찬장의 문이 빙 돌아 열릴 때 뒤쪽에 놓인 갖가지 물건들이-다행히 주로 과일 티백이-여전히 계속 떨어져도 몇 달 지나도록 사라진 것도 모를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들을 요리에 들이는 노력에 대한 넓은 의미의 은유로 여기도록 해보겠다. 요리는 있는 것(주방 설비, 재료, 솜씨 수준)을 가지고 때우는 것이다. 그것은 작은 성공 하나하나가 가급적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고 실수도 할 수 있는 하나의 절차다. 만일 실제로 꿈의 부엌을 갖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보자. 우리가 하는 요리는 그런 부엌에 걸맞아야 할 테니, 그 가중되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하겠는가. 요리를 망쳐도 예의 그 모든 확실한 변명거리에 의지할 길이 없는 것이다. 최소한 지금 이 상태라면, 데이비드 여사 덕분에 새로 발견한 변명거리를 활용할 수 있다. "요리가 생각대로 안 나와서 이거 참 어떡하지. 어떤 멍청한 인간이 냉장고를 가스레인지에 딱 붙여놔서 말이야."


 

 자, 이제 이 책을 다 읽었으니 난 오늘도 텃밭의 토마토, 바질, 딸기, 호박, 당근, 옥수수, 양파에 물과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을 것이다. 그러고는 일찍 수확한 꼬마 딸기와 벌꿀 향이 나는 밀맥주를 마시며 저녁 메뉴를 생각해 볼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언젠가 마주했던 쉐프의 어느 레스토랑을 떠올리며 내 부엌에 요리책과 함께 서 보기. 적절한 작업지시가 없어 양파로 하느님을 찾게 만든 사람도 모름지기 먹어야 하니까. 
 이 책은 줄리언 반스가 요리의 신에게 보내는 조그만 쪽지, 요리책을 읽는 독자에게 띄우는 메시지. 다 읽고 나면 부엌의 요리책을 다시 들춰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수필이다. 






그날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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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5-17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싶어 담아놨는데 쥬드님, 벌써 읽었네요!

Jeanne_Hebuterne 2019-05-17 14:26   좋아요 1 | URL
네 다락방님! 줄리언 반스, 앤 타일러, 권여선, 아고타 크리스토프..이런 작가들은 이름만으로도 구매욕을 팔랑팔랑!! 중간에 번역이 왜 이런 것일까 하는 부분이 좀 있지만 그래도 좋았어요!

다락방 2019-05-17 14:27   좋아요 1 | URL
쥬드님, 사진에 와인잔도 너무 좋아요!

Jeanne_Hebuterne 2019-05-17 15:00   좋아요 1 | URL
하하 그러고보니 다락방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요! 저 날은 레스토랑 문을 닫고 나서 밤 열두 시 넘어 저만 홀에 앉아 서비스 받은 날이었어요. 조금 추워서 와인을 마셨는데 메를로 와인을 처음 좋아하게 된 날이었답니다. 어쩐지 이 상황도 다락방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요!
 
가만한 나날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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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끊임없이 분위기를 띄우려 하고, 다른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보며 안심하는 걸까.





살다보면 여러 번 바뀌는 날씨를 보기 마련이다. 어떤 날은 내가 버젓이 있는데 은근슬쩍 내 옆에 섰다가 슬슬슬 새치기하는 엑스엑스를 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마트 냉장고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앞으로 쓱 지나가는 사람이 '실례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거대한 사건을 제외하면, 사람의 일생은 작은 습관과 그가 제어할 수 없는 타인들의 예측할 수 없는 날씨로 이루어졌다. 




어떤 순간의 서늘함과 후덥지근함,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작은 날씨. 어떤 구름 뒤에 해가 있을지는 모르니까 그런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부터 나는 더 가만해졌던 것 같다. 예측할 수 없는 날씨를 생각하는 순간, 그냥 그렇게 물 밑으로 가라앉아버렸을 사건이 수면 위로 떠 오르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가만한 나날'은 보여준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는 재미와 소설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마음을 느끼게 해준 소설집. 




1987년 목포 출생, 국어국문학과, 서사창작, 제 9회 젊은작가상, 이런 글귀가 책날개에 적혀있다. 그리고 넘기면 지하철을 갈아타고 약속 장소로 가는 연승의 초조한 기색, 그런 그를 바라보는 여자친구 진아의 얼굴 가득한 물음표가 보인다. 그들은 연승이 몹시 존경하는 선배를 만나러 가는데, 연승은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이제 막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몇편의 작품, 공모전 출품, 그러다 들어간 대형 할인점 체인의 유통 분야, 그러다 그는 이제 영화를 만들려고 하고, 그보다 먼저 다큐 작업을 하는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려 한다. 

작가의 시선은 이들이 곧 만나게 되는 이상하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딱히 예상했다고 말하기도 힘든 선배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연승의 여자친구 진아도, 중한 선배를 좋아하는 연승도 예견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앉을 곳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조그만 공간, 너무나도 작고 천장마저 낮은데 그곳에서 태어난 아기 이야기에서부터 산부인과 이야기 같은 것, 요컨대 제각기 모두가 처음부터 과녁을 맞출 생각이라고는 없이 던져진 화살들같이 같은 지점을 통과하는 상황, 혹은 마음속에서는 알레르기가 올라오는데 하필 마지막으로 다녀온 곳이 뷔페여서 대체 무슨 음식에 내가 이러나, 말하기도 뭣한 상황. 친구와 약속을 잡아놓고서도 내심 '이 친구가 오늘 일이 있어서 못만난다고 문자 한 통 보내줬으면'하고 생각하며 외출 준비를 하는 순간.





 이런 순간의 물밑 흐름을 김세희는 잡아낸다. 그리고 이 작가의 단편을 읽다 보면, 세상에 소설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잡아채거나 가르치거나 막아서지 않는 글씨들. 그런 다행스러움은 표제작 '가만한 나날들'에서 담담하고 조용하게 드러난다. 





첫 출근을 앞둔 일요일, 나는 대학로에서 우연히 재화 언니를 만났다. 구름 끼고 쌀쌀한 바람이 불던 오후였다. 그때 스물여섯이던 나는 출근을 앞두고 마음의 준비를 한답시고 종일 원룸에 혼자 있다가, 괜히 잡생각만 가득해지고 점점 압박감이 들어서 집 밖으로 나갔다. 마로니에 공원 쪽으로 좀 걷다가 아이쇼핑을 할까 싶었다. 밤에는 엄마와 통화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지.




이 스물여섯의 '나'는 블로그 마케팅으로 제품 홍보를 하는 회사에 입사하여 가상의 인물 '채털리 부인'을 만들어 블로그를 꾸민다. 첫 출근을 하며 마음 속으로 재화 언니가 말해준 것처럼 '나는 프로다'라는 말을 주술처럼 되내이던 '나'는 가상의 채털리 부인이 되어 열심히 성과를 자기 눈으로 확인해간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개인 경험은 아주 생생하게 구체적인데, 이러한 구체성은 김세희 작가의 모든 단편 전반에 나타나 있다. 





주민등록번호도 있고, 금요일 밤이면 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을 사와 영화를 보며 마시고, 누군가의 집을 방문할 때면 딸기와 롤 케이크를 사서 가는 그런 사람들. 김세희의 소설 속에는 멀리 있는 엄마의 잔소리에 넌더리를 내는 원희(현기증)가 있고, 저 아이가 저런 모습이었나 싶어 남자친구를 바라보는 진아(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거야)가 있다. 첫직장에서 사수로부터 폴더를 만드는 법, 다이어리에 그날그날의 업무를 기록하는 법까지 배우던 선화(드림팀)가 있고, 처음 가본 동네에서 거대한 전기장판을 옆에 놓고 낮에 맥주를 마시는 루미(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가 있다. 



 

이 여자들은 자기가 직접 화자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타인의 눈을 통해 수면 위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는 이 여자들의 공통된 모습은 버거운 공기에 숨을 참다가도 가볍게 숨을 틔울 줄 아는, 이제 막 자라 어미 새의 둥지를 떠나는 어른의 모습이다. 거울을 바라보며 자기가 보는 것이 거울 표면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사람의 모습, 한마디로 부끄러움을 배워나가고 이별을 예감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할 줄 아는 여자의 모습. 이렇게 말하면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사실 오랜 시간 한국 소설 속의 여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던가를 생각하면, 조경란과 정이현의 인물들을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신선함이 다시금 느껴진다. 





어떤 종류의 경험은 소설로밖에 말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신선함이 순간의 경쾌함으로 그치지 않는 동시에 개인의 경험을 넘어 보편적인 묵직한 잔향을 만들어내는 것은 작가의 균형 감각이다. 한 세계에서 일어난 어떤 거대한 사건 앞에서, 그 사건과 개인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의 예리한 날 선 감각, 균형을 잡는 힘. 브레이크를 적절히 사용하면서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놓치지 않는 흐름을 보노라면 소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만한 나날' 속의 경진과 채털리 부인의 목소리 같은 것이.





채털리 부인은 신생아부터 6세까지 사용가능한 '3단계로 변형되는 프리미엄 토들러 침대'에 아기를 재우고, 토요일 밤에는 일본에서 수입한 '개 샴푸계의 샤넬' 제품으로 개를 목욕시켰다.

...

리뷰 업무를 하느라 하루를 다 보낸 날에는 저녁을 먹고 사무실에 남아 일상 게시글을 작성했다. 개인 블로그로 보이기 위해 일상적인 내용을 담은 글을 올려야 했고, 직원들은 가족과 친척들, 그 반려동물들 사진까지 활용했다. 이웃 수를 유지하려면 이웃을 맺은 블로그를 방문해 댓글도 남겨야 했다. 




라식수술, 치아교정 광고를 교묘히 허위로 만든 블로그에 거짓으로 작성하며 경진은 잠시 이래도 될지 망설이기도 하지만 이내 그는 자신의 결과물에 만족하고, 성취감을 느끼고, 나아가서는 일을 못 해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나가는 예린을 살짝 깔보기도 한다. 한 사람을 만들어나가고 채우는 작은 계단들이 있다면, 경진의 걸음은 계단 어느 즈음에서 층계참을 지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던 순간 이런 브레이크가 걸린다.




블로그 이웃이라는 여자였는데, 그 여자는 자신을 B기업의 뿌리는 살균제 피해자라고 소개했다. 두 아이 중 갓난아기를 잃었고, 다섯 살 아이는 폐가 손상돼 평생 산소 호스를 끼고 살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이것이 B기업의 뿌리는 살균제 '뽀송이' 때문이라는, 그 안에 포함된 독성 물질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채털리 부인님이 올린 후기를 보고 구매해서 쓰기 시작했거든요. 날마다 사용한다고 했는데 괜찮으신지......아무 일 없으시길 바라지만 혹시나 무슨 일이 있었다면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





경진의 엑셀러레이터가 잠시 멈추고 브레이크를 밟게 되는 순간, 그 멈춤에 스스로 답하는 순간, 그리고 내린 첫눈의 대목은 소설을 읽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시간을 통과하고, 그것을 인정한 다음 느끼는 죄책감과 부끄러움. 이러한 부끄러움이 사회의 경험과 개인의 이야기로 겹쳐질 때, 오르한 파묵이 말한 '서로 어긋나는 것을 동시에 바라보는 능력'이 빚어내는 소설 읽기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나의 첫 직장, 나는 그곳에서 26개월간 일했다. 스물여섯 봄부터 스물여덟 여름 무렵까지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얼굴에 확 와 닿던 건조한 공기며 흰 책상들이 놓여 있던 모습이 선명하다. 하지만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은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어쩌다 첫 회사가 화제에 오를 때면, 작은 광고대행사에 다녔다고만 대답한다.

 하지 않는 말들은 그것 말고도 또 있다. 별것 아니지만, 이를테면 이런 것. 그곳을 나온 이후 나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책장에 꽂혀 있으나 어쩐지 펼쳐 볼 마음이 일지 않는책. 나는 어디에서도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런 사람. 0과 1 이후의 진심을 보았던 사람. 엄중한 회초리의 사설이 아닌 경진 개인의 경험으로 회자하는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독자. 날씨는 내 옆 사람 탓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마트나 백화점 앞에서, 예측할 수 없었던 날씨 때문에 공기가 후덥지근하네, 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주 준엄하게 모든 사건의 시비를 가릴거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김세희의 단편 묶음은 독자에게 어떠한 결심을 하게 만들지 않고 그 자체의 구조 안에서 의문을 가지게끔 만든다. 비슷한 얼굴들 속 다른 얼굴이 보이게끔 하는 작품집이다. 




-따옴표 글은 책속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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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9-03-23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어요. 좀 더 자주 볼 수 있기를... 쟌느님의 페이퍼때문에라도 이 책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맞아요. 말씀처럼 ˝어떤 경험은 소설로밖에˝ 말할 수 없는 그런 게 읽어서 비로소 정리되고 이해되는 순간들이 있더라고요.

Jeanne_Hebuterne 2019-03-24 06:04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너무 오랜만에 알라딘 서재에 와서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기분이었는데 블랑카 님 이미지를 보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너무너무 반가워서요!!
이 책은 뭔가 쎄하고 꽁기한데 말하면 내가 소인배같아보이고..근데 기분은 또 그게 아니고 그런 포인트를 너무 잘 짚어내서 읽다가 그 생생함에 놀랐어요. 결국, 시인과 소설가는 더 잘 느끼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읽다가 정이현의 삼풍 백화점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잘 지내시지요? 새해엔 서재에서더 자주 보아요, 반가운 블랑카님^0^
 
글쓰는 여자의 공간 - 여성 작가 35인, 그녀들을 글쓰기로 몰아붙인 창작의 무대들
타니아 슐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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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다 은행 잔액의 차이다. 엉뚱하게도 '글쓰는 여자의 공간'을 읽으며 작가의 서재를 구경하다가 든 생각이다. 명작을 쓰지 못해서도 억울한데, 대체 명작을 뽑아내는 사람들은 터를 잘 잡아서인가! 이런 경망스럽고 불순한 호기심과 다른 사람 인스타그램 구경보다 재미있는 다른 사람 집구경이, 특히 작가들의 서재가 아닌 글 쓰는 작업실이 궁금해서 집어 든 책이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의외로 작업실의 스펙트럼이 넓고, 작업실을 규정하는 두 가지 결정적 요인은 개인의 재력과 성향,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싶었다. 




 '글쓰는 여자의 공간'은 버지니아 울프, 프랑수아즈 사강,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실비아 플라스(내가 좋아하는 순서다) 등 여성 작가 35인의 글쓰는 공간을 담고 있다. 집은 그 사람의 성정을 담았다면 작가가 글을 쓰는 공간으로 쓰는 곳은 작가의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 작업실은 때로는 부엌, 개인 서재, 호텔, 카페, 혹은 집안 곳곳이 되기도 했다. 

 나탈리 샤로트는 '글을 쓰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허공에 뛰어드는 일과 흡사하다. 카페에서라면 쉽게 뛰어들 수 있다'라고 말하며 전화를 받을 일도, 누군가 자질구레한 집안일로 자기를 찾는 일도, 불쑥 방문을 여는 사람으로 방해받을 일도 없는 카페를 글쓰기 공간으로 칭송했다. 이 책은 가정과 개인, 사회의 여러가지 방해와 비협조 속에서 가까스로 자기의 글쓰기 공간을 찾아내 스스로에게서 무언가를 뽑아낸 사람들의 마음속이 한가득 있다. 




 35명의 작가들의 제각각 글만큼이나 다른 사정들이 있어서, 물론 집이 여러채 있고 글쓰기를 위해 로지아를 지어 글을 썼다는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도 있고, 개인 비서를 두고 사자 모피를 깔개로 둔 서재에서 작업한 카렌 블릭센 같은 작가도 있다. 

 서재는 글쓰는 공간이 될 수 있지만 글쓰는 공간이 서재인 것은 아니어서, 이 부등식에는 오히려 글 쓰는 공간보다 중요한 것도 있으니, 작가 개개인의 성향과 삶의 사이클 같은 것이 포함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실비아 플라스는 결혼과 출산 후 온전히 글쓰기에 집중할 수 없었고, 버지니아 울프는 몽크스 하우스의 헛간을 개조해 글쓰는 공간으로 활용하다가 마침내 정원 구석에 목재로 된 작업실을 짓고 나서야 더욱 마음편히 글을 쓸 수 있었다. 왜 그 전에는 마음이 불편해서 글을 쓸 수 없었냐고? 어머니 사망 후 열세 살부터 9년간 아버지를 뒤치다꺼리했고 의붓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한 그가 아버지 사후 24년 후 쓴 글을 보면 엿볼 수 있다.



 "아버지의 생일이다. 살아 계셨다면 오늘로 아흔여섯 살이었겠다. 아버지도 다른 사람들처럼 아흔여섯까지 살 수 있었을 텐데, 다행히도 그러질 못하셨다. 만약 그랬다면, 아버지의 인생은 내 인생을 완전히 끝장냈을 것이다. 살아 계셨다면 어땠을까? 나는 글도 책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실비아 플라스에 관해서는 엇갈린 증언들이 나온다. 주로 알려진 사실은 테드 휴즈와 실비아 플라스가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았고, 육아와 가사를 병행하던 실비아 플라스는 그야말로 글을 쓸 시간이 없었다는 증언과, 부부가 일을 나누어서 했다는 증언(번역가 유타 카우센)이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책 속 사진의 실비아 플라스는 책상 위에 올라가 앉아 책을 들여다보거나 뒷마당 테이블 위 타자기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 사진은 순간이어서 그가 연속 몇 시간 동안 작업을 했는지, 혹은 일할 시간을 넉넉히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단, 실비아 플라스가 남긴 말은 그 시간의 흐름이 녹녹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내가 글을 쓸 수 있을까? 많이 써보면 작품을 쓸 수 있을까? 작품을 잘 쓸 때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해야 할까?"




 서른다섯 명의 문체만큼이나 다양하고 제각각인 글 쓰는 공간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보게 되는 책이다. 주로 세상에 이제는 없는 작가들이 많지만, 엘프리데 옐리네크, 니콜 크라우스처럼 살아있는 작가도 다루고 있다. 제인 오스틴처럼 초상화로 사진을 대신한 작가도 있고, 인물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호사를 누린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안네마리 슈바르첸바흐 같은 작가도 있다. 오죽하면 '식탁에 앉은 안네마리 슈바르첸바흐는 꼭 타락한 천사 같았다'고 무려 토마스 만이 말했겠는가. 



 

 주로 작가의 서재를 구경하다보면 높은 천장과 시원한 전망, 책으로 가득한 서고 같은 것으로 주눅이 들곤 하는데, 이 책 속의 작가들은 그 스펙트럼이 참으로 넓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지정학적 위치가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해리엇 비처 스토가 뉴잉글랜드 메인 주에 살고 있었으니 다행이었지, 남부 연합군 지역에 살았다면 과연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나올 수 있었을까? 공간에 대해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다시 자연스레 앞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니까 이 책에 소개된 작가 중 메리 매카시는 한나 아렌트와 절친이었지만 시몬 드 보부아르는 메리 매카시를 좋아하지 않았고, 카슨 매컬러스는 엘리자베스 보옌과 친했지만 그는 또 안네마리 슈바르첸바흐를 사랑했고..읽다 보면 글쓰는 여자들의 굳게 앉은 뒷모습 그림자가 보일듯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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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주무르다 보면 겨울 쯤에는 진짜로 부드러운 정말 곶감이 되거든? 겨울이 와야 정말로 맛있는 곶감을 먹을 수 있는 거야.





 딸과 달리 무심하고 태평해 보이는 엄마의 입에서는 딸이 듣고 싶어 하는 답이 아닌 응당 엄마가 해야 할 말이 흘러나온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는 한순간도 관객의 추측을 비켜나가는 호흡이 없다. 대신 느릿느릿 쉬엄쉬엄 흘러가는 사계가 펼쳐지고 모든 것을 직접 해야 하는 시골이 펼쳐진다. 제목 그대로  작은 숲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고받는 편지처럼 떠오른다. 주인공 혜원은 떠나려다 돌아오고 돌아오려다 떠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생활의 결을 친구들과 나누고 이미 떠난 엄마와 생각을 나누게 된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히 흘러가는 혜원은, 한번쯤 누구나의 속에나 들어앉았을 법한 캐릭터다.


 





 서울에서 임용시험을 준비하다 고향 미성리로 돌아온 혜원은 집에 불을 피우고 언 땅의 배추로 국을 끓여 먹는다. 다음 날에는 눈을 치운 다음 얼큰한 수제비로 꽁꽁 언 몸을 녹인다. 회사를 그만두고 돌아와 과수원을 꾸린 재하와 한 번도 고향을 떠난 적이 없는 은숙이 혜원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고, 직접 영글어낸 사과를 건넨다. 스트레스 끝까지 받은 날의 매운 떡볶이, 화해의 크림 브륄레, 겨울을 녹이는 막걸리, 그리고 엄마의 감자빵과 오코노미야끼가 시골의 말끔한 햇빛과 함께 영화를 채운다.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가 발굴한 것은 세련된 전원일기의 힘이다. 돌아갈 수 있는 시골집이 있고, 땅에서 작물을 거둘 수 있는 힘이 있으며 그것을 함께 나눌 친구가 있다. 그러나 정작 혜원을 채운 것은 배고픔의 기억이다. 편의점 도시락의 쉰 밥을 뱉어야 하고 자기는 떨어지고 남자친구는 붙은 시험 결과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엄마는 수능 얼마 지나고 편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 엄마의 부엌에서 요리하고 엄마의 마당에서 장작을 패다가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데'라고 생각한다. '고모는 이모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쫄래쫄래 따라가 허겁지겁 집밥을 비우고, 동네 아주머니들의 수다 대잔치에 온몸이 비비 꼬인다. 가득 찬 프레임과 바삭바삭한 조명 아래 깔밋한 장면들을 보다 보면, 의외로 서울 편의점의 차가운 불빛, 가득 찼는데도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혜원의 서울 집이 상처에 소금 뿌리듯 지나간다. 가득인데, 없는 것이 더 눈에 들어온다.





 때는 이제 2018년, 사람들은 세련된 식기, 깔끔한 인테리어와 결로방지 열선을 깔아둔 풍광 좋은, 잡지에 나올 것 같은 집을 짓고 농어촌으로 스며들기를 시도한다. 집은 깨끗해야 하고, 소품은 정갈해야 한다. 

 봄 양배추로 전을 부쳐 먹고, 꽃으로는 튀김을 만들어 먹는다. 쌀을 빚어 막걸리를 나누고 치자 물과 시금치 물을 내어 팥을 곁들인 떡을 찐다. 자연과 대화하는 법으로 이 영화는 부엌에서 일하는 손과 그 손이 빚는 한 상을 소담스럽게 담아낸다. 이 개별 요리를 등장시키지 않고는 어리고 젊은 혜원이가 엄마를 떠올리고, 낙방한 시험 다음의 길을 찾고,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맺는 방법을 알 수 없다는 듯이. 계절의 차이와 요리의 차이는 다정한 단짝처럼 붙어 다녀서, 시도 때도 없이 테이크아웃 요리를 먹고 마트에서는 늘 알록달록한 과일과 봉지에 든 과자를 살 수 있는 현실에서 눈을 돌려서 '아, 나도 저런 한 끼를 차려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내가 손수 해와 바람, 흙으로 만들어낸 제철 재료. 그것을 마트나 인터넷 택배가 아닌, 우리 집 밭이나 마당에서 거실로 순서 옮긴 다음 조용하고 정갈한 부엌에서 요리한 다음 친구들 혹은 우리 집의 강아지, 마당을 채운 공기의 결과 함께 나누는 것이 요즘은 판타지가 되었다. '생계 걱정이라고는 1도 없는 판타지'라는 감상이 슬픈 것은,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생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일은 복잡해졌다. 옥상 텃밭이나 베란다 정원, 주말농장을 생산적인 먹거리 취미로 삼고 바쁨을 정신이상자 수준으로 강조하며 살아내는 것이 마치 바람직한 2018년의 구성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내게 지금이 씨앗을 뿌릴 시기임을 일깨워준 이상, 노는 뒷마당 땅을 다시금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물론 영화에서는 나지 않던 내가 만들어낸 거름 상자에서는 아름다운 향내가 나고 땡볕에서 밭을 맬 때마다 열사병에 걸린 것처럼 나는 허덕대다 초주검이 되어 흙 묻는 작업화를 털어내겠지. 참, 농사를 업으로 하는 내 친구는 아예 농협 빚과 독한 농약 묻은 옷 처리용 세탁기를 처음부터 따로 사용했었다고 말했는데 그에 비교하면 나 역시 탱자탱자 나른하고 게으른 일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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